091. 황녀의 첫 번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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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황녀의 첫 번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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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황녀의 첫 번째 위기
2023.01.11.
수많은 눈들이 황녀를 바라보았다. 은근한 의심과 설마 하는 시선들이 뒤섞였다.
황녀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숨기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알았다고 말하면 마리아 에텔의 어처구니없는 약혼식을 묵인한 셈이 되고, 모른다고 말하면 여름 연회에 대한 제 통제력이 실추되는 것이다.
둘 중 무엇을 골라도 제 완벽한 평판에 오점이 묻게 된다.
진즉 마리아 에텔 그 멍청이를 찾아 어디엔가 가뒀어야 했는데.
분노로 이가 악물렸다. 지독한 후회가 몰려왔지만 귀족들 앞에서는 티조차 낼 수 없었다.
황녀는 그나마 차악을 골라야 했다.
“에텔 영애가, 오라버니를 위해 하나쯤은 힘을 보태고 싶다고 해서……. 아무리 간절히 애원했어도 내가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모두한테 폐를 끼쳤습니다.”
아. 그제야 황녀를 둘러싼 귀족들의 얼굴에 이해의 표정이 떠올랐다. 늘 마델레이네 공녀의 공적을 질투하던 에텔 영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법했다.
사정을 아는 제국의 귀족들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릴 법한 이야기였다.
비록 내일 연회부터가 걱정이었지만 우선 오늘을 넘기면 일단은 괜찮아질 것이었다. 황후인 어머니께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회유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형편없는 연회 대신 세련된, 제가 바라는 연회가 치러질 것이었다.
“제국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때였다.
“훌륭한 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페르티에서 사절단 대표로 참석한 키월 공작입니다.”
외알 안경을 쓴 준수한 남자가 황녀에게 예를 갖췄다. 스스로를 키월 공작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뒤로 마델레이네 소공작이 따라왔다.
“헤페르티에서 온지라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태자 전하께 힘을 보태는 것과 아까 나간 영애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난처한 얼굴이었다.
오늘 일로 에텔 후작은 황가에 있어 내쳐진 것과 진배없었다. 이런 와중에 타국에까지 마리아와 태자가 연인 관계였다는 걸 밝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타국에 대한 실례는 아까 전 연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황녀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제국의 중심인 귀족으로서 태자 전하께 힘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지요.”
“말씀 감사합니다. 전하. 헤페르티에도 황녀 전하께서 여름 연회의 모든 것을 훌륭히 총괄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아까 나간 영애는 어지간히 전하께서 믿고 맡길 수 있을 법한 측근이었나 봅니다.”
측근.
별거 아닌 그 한 단어에 제국의 귀족들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귀족들에게 퍼져 있는 가십과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그, 황녀 전하께서는 마리아 에텔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러게. 그토록 친애하시는 리베오른 후작 영애한테도 연회에 대한 공은 일절 나누지 않으셨는데. 어느새 그렇게 친해지신 걸까요?.”
“어, 리베오른 후작 영애는 몰라도 예전에 누구였더라, 왜, 황녀 전하께서 춘궁기의 리테일 영지를 복구하신 일로 여름 연회 중 급작스레 마차 행진을 나가셨지 않습니까. 그때 누가 대신 연회를 잠시 체크했다고 들었는데.”
“아, 맞아요. 마델레이네 공녀.”
누군가 손가락을 튕기며 무심코 대답했을 때, 황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수롭지 않은 수군거림 속에 얼마든지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키워드가 섞였다.
황녀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수군거림은 그대로 사라져야 했다.
조금 토라진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리베오른 후작 영애야 얼마든 달랠 수 있었다.
지금 급한 건 갑자기 나온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 반쪽짜리의 이야기였다.
그 천것만 없다면, 얼마든지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
순간 스스로를 다독이던 황녀의 생각이 멈춰 버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오페라라도 관람하듯 푹신한 소파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일행, 그 사이에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있었다.
꿰뚫어 보듯 덤덤한 초록색 눈 위에 조소가 뚜렷했다.
여태껏, 한 번도 누구에게도 저런 비웃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황녀의 마음이 요동쳤다.
평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황녀의 모든 것을 이루는 근간이 뿌리째 흔들렸다. 만약 여기에서 올리비아가 나서기라도 한다면, 저는 모든 게 끝장이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조차 잃은 황녀는 어떻게든 올리비아가 끼어들 틈새조차 없애려 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친, 분이 있다니. 그럴 리가요. 그저, 모두 알다시피 에텔 영애가 워낙 공식적으로 오라버니의 옆에 서고 싶어 하니. 그러니…….”
“전하.”
어디에선가 나타났는지, 유모인 루하스 남작 부인이 황녀를 불렀다.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급박함에 황녀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 그러면. 단순히 ‘몸이 좋지 않은’ 영애는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은근하게 황녀의 말을 비튼 키월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황녀를 쳐다보았다.
늘 완벽하던 황녀가 지고한 태자의 허물을 들춰 내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순식간에 황녀는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키월 공작을 마주했다.
부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지 못했어야 할 텐데. 간절한 희망이 피어나기도 전에 키월 공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전후 복구에 바빠서 저희 헤페르티에 소식이 온통 느려졌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저는 그간 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마델레이네 공녀라는 이야기만 들어 왔어서.”
확인 사살이었다. 공공연히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확언하지 않던 것을 황녀의 입으로 확인받은 셈이 되었다.
아교를 바른 것처럼 황녀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는 키월 공작의 뒤에 있는 마델레이네 소공작을 바라보았지만, 늘 유능하던 소공작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깔렸다. 무슨 말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 이 또한 제가 분위기를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키월 공작이 어수룩하게 웃었다. 처음 황녀한테 말을 걸 때처럼.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녀가 한참 만에야 빙그레 웃었다.
“……난, 잠시. 바람을 쐬어야겠군요.”
황녀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우아한 걸음이 멀어졌을 때에야, 귀족들은 여름 연회가 열린 뒤 처음으로 이 연회장에 그 어떤 황족도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대공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의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제 우리도 돌아가 볼까요?”
.
.
.
미적지근한 밤바람이 뺨을 건드렸다. 황녀는 잇새로 분한 숨을 내쉬었다. 바다 빛 눈동자가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 능구렁이 같은 헤페르티 공작 놈. 다 알면서 나를……!”
“전하!”
거친 말에 루하스 남작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여름 연회였다.
누가 지나가다 듣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얼굴이었지만 황녀는 그에 마음 쓸 여력이 없었다.
“왜 하필 이번 연회에 타국 사절단이 와서……!”
언제는 타국 사절단이 여름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그 사실을 완전히 삭제한 채 황녀는 분노를 표했다.
“하필 거기에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있어서……!”
그때 눈만 안 마주쳤어도 좋았으련만. 헤페르티의 공작은 왜 마침 그때 제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아무리 봐도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더러운 수를 쓴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딱 그 순간 저를 지켜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씨근대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마리아 에텔에 이어 헤페르티의 공작,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까지.
“안 되겠어요. 유모. 진짜 모조리 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모조리 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밤하늘 위로 고요한 인사가 내려앉았다. 분통을 터트리던 황녀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잿빛 머리의 제법 잘생긴 기사. 황녀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비칸데르의 기사로군요.”
“제 주군께서 황녀 전하께 꼭 전하라는 말씀이 하나 있으셨습니다.”
허락조차 없이 기사는 용건부터 꺼내 들었다. 모든 기사들의 맹세를 받아 왔던 황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녀는 기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돌아섰다.
“어디서,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비칸데르는 다 이리 무례한가?”
“전하께는 세 번의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이 바로 첫 번째 위기였습니다.”
“……뭐?”
순간 걸음을 옮기려던 황녀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첫 번째 위기라니. 세 번의 위기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황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쿵쿵-, 뛰었다. 입에 침이 바싹 말랐다. 설마, 이게 다 대공이 꾸민 간계인 걸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카탕타에서는 편히 쉬셨습니까.”
애써 비웃으려던 황녀의 얼굴이 뻣뻣해졌다. 스산한 바람이 황녀의 등줄기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카탕타라니, 감히!”
파들파들 떨리는 음성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뒤에 있던 루하스 남작 부인의 얼굴은 기사의 머리 색깔처럼 잿빛으로 물들었지만, 황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이 황녀를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잇새로 짓이기듯 나간 목소리가 거칠었다. 번뜩이는 눈빛이 기사를 마주했을 때,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듯 덤덤하고 잔잔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그저 제 주군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이만.”
가벼운 묵례를 마친 기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찢어 죽이리라. 저 기사도, 명을 내린 비칸데르 대공도. 그 뒤에 숨어서 저를 보고 있을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것도.
시야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 * *
연회장의 한 응접실.
마리아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너덜거리는 드레스 끝단, 찢어진 듯 아픈 귓불, 아니 이런 것을 모두 떠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어!”
마리아가 그토록 사랑하던 바다 빛 눈동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공포감에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마리아는 애원하듯 레오포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 레오포드.”
푸른 눈에 눈물이 글썽였지만, 레오포드는 제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말했잖아. 마리아 에텔. 너는 딱 일 년만 수고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 일 년도 제대로 못 하고 이런 일을 벌여?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것도 타국의 사절단들이 다 와 있는 앞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분노가 사정없이 마리아를 찔렀다. 이미 처참하게 뜯겨 나간 자존심을 붙잡은 채,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의 연인인데. 왜 제가 일 년짜리 약혼녀예요?”
“……뭐?”
마리아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꾹꾹 참아 왔던 서러움과 참담함이 해일처럼 마리아를 덮쳤다.
상황에 대한 절망과 비참할 정도로 저를 막 대하는 연인의 태도, 모든 귀족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수치스러움이 터져 나왔다. 결국 마리아는 죽기보다 싫었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왜 저를, 정부 따위로 취급하,”
“겨우, 그런 거 때문에 지금! 하.”
하지만 더 커다란 분노가 마리아의 말을 막았다. 마리아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숨이 가빠졌고, 모든 게 꿈인 것처럼 기묘하게 느껴졌다.
겨우, 겨우라니. 여러 번을 곱씹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눈물샘이 건조해졌다. 그러는 사이, 선명해진 시야 너머로 레오포드가 창밖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지.”
붙잡을 새도 없이 레오포드가 응접실을 나섰다. 삼엄하게 경계를 서는 기사들이 언뜻 보이더니 이내, 쾅-. 문이 닫혔다.
불안한 예감이라는 건 언제나 잘 맞았다. 마리아는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리고 레오포드가 섰던 자리에 다가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하. 마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초점 없는 푸른 눈 밑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 *
“어때요? 괜찮았어요?”
기대 가득한 붉은 눈이 올리비아를 향해 반짝였다.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 아래에서, 올리비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
하하하. 에드윈이 나직하게 웃었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퍽,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늘 모두의 사랑을 받던 황녀의 평판이 흔들리는 것을 직접 보게 되다니.
기분이 묘했다. 과거에 늘 평판이 흔들렸던 건 저였는데. 레오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교계의 소문에 휩싸였던 것도, 날카로운 질문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비칸데르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자신의 위치가 오늘 제도의 연회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생경했다. 오늘의 자신은 과거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부러워하던 위치에 있었다.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누군가 고난을 겪는 것을 남 일 보듯 지켜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올리비아!”
순간 초조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태자가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저렇게나 처음 보는 얼굴로.
달빛의 마법인 걸까. 아니면 정말 제 위치가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저를 따라 뛰어온 듯한 태자라니.
지척까지 다가온 태자는 잠시간 입술을 짓씹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일렁이는 바다 빛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