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세기의 약혼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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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세기의 약혼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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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세기의 약혼식 (3)
2023.01.08.
우아한 선율에 맞춰 연회장의 문이 열렸을 때.
마리아는 오늘에야말로 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믿었다. 모든 건 완벽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꽃잎과 반짝이는 조명,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찬란한 약혼 드레스와 저를 빛나게 해 줄 온갖 보석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들까지.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이 고귀한 자리, 타국의 사절단까지 온 자리에서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은 천한 반쪽짜리가 아니라, 이 귀한 마리아 에텔이라고.
특히 연회장 어딘가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올려다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게.
황홀할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마리아의 발끝부터 온몸을 관통했다. 심장이 벅차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저를 발견한 듯 계단 아래에서 뛰어오는 레오포드의 뒤로 역광이 비추었을 때.
마리아는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건 지금 올라오는 레오포드. 그리고 그의 손을 잡을 저였다.
하지만.
“올, 리비아…….”
조용한 연회장 위에 울린 이름은 제가 아니었다.
구름 위로 떠다니던 장밋빛 미래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마리아 에텔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제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어 줘야 하는데. 레오포드는 제게 너른 등을 보인 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연회장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있었다. 대공을 옆에 낀 채,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듯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웃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묘한 기시감이 출렁이며 마리아한테 다가왔다. 마리아는 그 기시감의 정체도 알지 못한 채 절박하게 레오포드를 향해 외쳤다.
“……뭐 하는 거예요, 레오포드? 제가 여기 있는데……!”
마리아의 목소리가 바들거렸다. 이렇게 울먹이면, 늘 레오포드는 저를 봐 주었다. 그러나 저를 향해야 할 애틋한 눈은 마치 한곳에 박힌 듯 흔들리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음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속삭임을 떨쳐 내며 마리아는 레오포드의 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이 팔을 놓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저, 여기 있어요. 제가 당신의 마리아잖아요!”
당신의 마리아.
악을 쓰는 목소리가 천장 높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제가 여기에 있는데,”
어딜 보고 있어요. 레오포드.
“그만!”
묵직한 황제의 고함이 들렸을 때에야 마리아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새까맣게 번졌던 눈앞에 이제야 모든 게 제대로 보였다.
더 이상 저를 보지 않는, 다정했던 제 연인의 등.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는 타국의 사절단과 귀족들. 찢어 죽일 듯 저를 노려보는 황녀와 그 옆에 있는 황후까지.
차가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황후를 보자, 순간 마리아 에텔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리지 않던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지금 태자 전하께서 마델레이네 공녀를 부르신 게 맞죠?”
“에텔 영애와 약혼식을 하시면서요? 아니, 지금 이게 약혼식은 맞나요? 사절단의 축하 공연이라더니.”
“구경거리는 구경거리네요. 타국의 사절단이 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거 에텔 영애가 혼자 벌이는 일인가요?”
“그럴 리가요.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연회를 꼼꼼히 보시는데요.”
“그러면 황녀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란 말이에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엘킨 공작님이 모든 걸 준비해 주신다고 했다.
마리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연회장을 살폈다. 지금 제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엘킨 공작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엘킨 공작의 얼굴이 보였을 때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뭔가 잘못된 거예요, 폐하! 이건 엘킨 공작님께서도, 아니 황후 폐하께서, 읍!”
순간, 커다란 손이 마리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호흡조차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에 마리아는 공포에 질렸다. 레오포드, 레오포드가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더 이상은 봐주지 않아. 에텔.”
마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완벽하게 올라간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귓가에 닿는 으르렁거림은 분명 레오포드의 목소리였다. 멀리 황제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영애의 상태가 좋지 않군. 밖으로 내보내지.”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이건, 꿈인 걸까. 돌아서는 레오포드의 등이 차가웠다. 어깨에서 손이 떨어졌음에도 육중한 무게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모시겠습니다. 영애.”
어느새 달려온 기사와 시녀들이 마리아를 에워쌌다. 공손한 말과 달리 그들은 마리아의 입을 틀어막은 뒤, 추포하듯 아무렇게나 팔을 꺾어 잡았다.
마리아는 기사들 사이로 겨우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직시해야 했다.
하지만 경외라고 생각했던 모든 시선들은 저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기에, 왜 약혼녀도 있는 태자를 넘볼까요. 넘보길.”
“태자 전하의 마음이 저렇게 기울어질 줄은 에텔 영애도 몰랐겠죠.”
“어휴. 그래도 저라면 어제 딱 눈치챘을 텐데. 애칭이라니.”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모든 세상이 먹먹하고 느리게 돌아갔다. 수군거리는 말들이 마리아의 위치를 함부로 재단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드레스 밑단이 형편없이 끌리는 걸 본 순간, 기시감의 근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비호와 애정 아래에서, 계속 예쁘게 굴 거지?”
서늘하게 저를 바라보던 바다 빛 눈동자, 거기까지라는 듯 정해진 답을 요구하던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
“……그럴 리가 없잖아.”
마델레이네 공녀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는 가정에 딱 떨어지게 내뱉던 강한 대답까지.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믿을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젓던 마리아 에텔의 시야에 문득 초록 눈의 여자가 보였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야?
얼음처럼 얼어붙은 마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쾅-, 연회장의 문이 닫혔다. 복도의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닿자 마리아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
.
.
“마리아!”
에텔 후작은 애끓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장벽처럼 단단히 선 귀족들에게 막히고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끌려 나가는 딸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욕심을 너무 낸 거지.”
“태자 전하께서 돌아보시지도 않으시네.”
수군대는 목소리가 딸을 비난하고 깎아내렸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귀한 막내딸은, 저런 소리를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에텔 후작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엘킨 공작을 향해 사정했다.
“공작님, 어떻게 좀…….”
“난들 뭘 어쩌겠나.”
태연한 목소리였다. 후작은 얼빠진 얼굴로 엘킨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예?”
어제까지만 해도 제 딸을 향해 준비가 잘되었냐고 묻던 공작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니!
“공작님,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지. 태자 전하께서 마델레이네 공녀의 애칭을 부르기 전까진.”
후작의 얼굴이 멍해졌다. 엘킨 공작은 입매를 가늘게 올렸다.
아비나 딸이나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을까. 어제 애칭을 부르던 태자의 얼굴을 보고서도 계획을 감행하다니. 엘킨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엘킨 공작은 두 방향을 다 준비했다.
에텔 영애가 잘되면 그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에텔 영애가 황제의 분노를 산 지금이야말로 사절단과의 교류를 조절해 황제와 태자의 신임을 사기에 적기였다.
특히나, 마델레이네 공작이 공녀를 데려오지 못한 일로 황제의 눈 밖에 나기 일보 직전이라면.
엘킨 공작은 조금 떨어져 있는 마델레이네 공녀를 바라보았다.
태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저렇게 무심한 얼굴이라니. 게다가 공녀를 감싸듯 앞에 나선 대공까지. 보면 볼수록 더 탐이 났다.
“……그러고 보니. 따지고 보면, 내가 저 아이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것이지.”
엘킨 공작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마델레이네 공작한테 경고를 주기 위해 여자를 붙인 게 자신이니, 공녀의 탄생에 있어 자신은 신이었다.
반면 에텔 후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급한 건 바깥으로 끌려간 제 귀한 막내딸이었다.
“그게 무슨. 아니, 공작님!”
“드레스에 돈을 많이 들였던데. 상단에서 곧 청구서가 날아갈 걸세.”
공작이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이해한 듯 창백하던 에텔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걸 알고서도 제 딸을……!”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에텔 후작님.”
에텔 후작의 말 위로 건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선이 마리아 에텔한테로 향한 틈을 타 은밀히 다가온 황제의 시종장이 덤덤하게 말했다.
비로소 달라진 제 처지를 실감한 듯 에텔 후작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엘킨 공작은 두 걸음 물러나며 속삭였다.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렸나. 후작. 배웅은 않겠네.”
.
.
.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악단이 새 왈츠 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춤을 추는 이가 없었다.
즐거울 거라 예상한 여름 연회. 하지만 지금 연회장에는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졌다.
올리비아는 조금 전 황제와 황후가 나간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먼 길을 온 사절단도 있는 자리에서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군.”
애써 호탕하게 웃던 황제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던 건 올리비아만 본 게 아닐 거다.
“모두 방금 있었던 일은 싹 잊고 부디 연회를 즐기길 바라네.”
황제와 황후에 이어 태자까지 서둘러 연회장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레오포드가 저를 쳐다보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저를 함부로 부르는 목소리 따위를 곱씹고 싶지도 않았다.
얼어붙었던 분위기에 수군대기만 하던 귀족들은 눈치를 보며 조금씩 먹잇감을 살폈다.
지금 가장 흥미를 끄는 이는 이름이 불렸던 올리비아, 그리고 저 멀리 있는 황녀였다.
지금 제 앞에 세 명의 기사님이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물어뜯긴 지 오래였을 거다. 귀족들은 간을 보듯 올리비아와 황녀의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도 아주 잠깐 마주쳤던, 인형처럼 예쁜 푸른 눈을 까뒤집듯 저를 노려보던 마리아의 눈이 어른거렸다.
“……괜찮아요, 올리비아?”
“네?”
“나는 재미있는 구경을 한 거 같은데. 올리비아는 조금 멍해 보여서요.”
물론. 마지막에 감히 올리비아를 부른 건 담아 두겠지만.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올리비아는 푸스스 눈매를 아치형으로 무너뜨렸다. 에드윈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마리아 에텔의 눈도, 태자가 보냈던 드레스도 모두 잊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올리비아만 괜찮다면 내가 한 곡을 청하고 싶지만, 대공저로 돌아가도 괜찮을 듯싶어요.”
이제 보니 에드윈뿐 아니라 하워드와 윈스터까지 올리비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저에는 좋은 기억들만 안고 가야 했다. 이 찜찜함은 연회장에서 털고 가야 했다.
“저는 멋진 두 기사님의 호위 속에서 안전할 테니, 에드윈은 사절단과 인사라도 하는 게 어때요?”
명랑한 대답이었다. 잠시간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의 눈매가 얄궂게 휘어졌다.
“음, 나는 한시도 올리비아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요. 그렇다면 그저 함께 관망하다 돌아가는 건 어때요?”
“관망이요?”
묘한 단어였다. 고혹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던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황녀한테 가까워지자 멈춰 선 곳에는 마치 준비된 것 같은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려한 연주가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빙그레 웃은 에드윈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황녀의 목을 대령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 선한 내 올리비아를 위해.”
목을 대령하라니. 질겁하던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문득 광산에서 에드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원한다면 황녀의 목을 대령하겠다는 말이 떠오르게 무섭게, 에드윈의 말이 이어졌다.
“우연찮게 벌어지는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 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거든요.”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꾸민 거예요?”
“뭐, 가볍게 맛보기 정도?”
어깨를 으쓱이는 에드윈이 황녀가 있는 방향을 손짓했다.
“그런데 에텔 영애는 어떻게 감히 전하의 연회에 저런 걸 끼워 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황녀를 둘러싼 귀족 무리에서 나긋한 의문이 터져 나왔다.
“전하께서 얼마나 연회를 꼼꼼히 살피시는지 모두가 다 아는데.”
“설마 전하께서 에텔 영애가 이럴 거라는 걸 알고 계셨을 리는 없으셨을 테고.”
이어지는 귀족적인 어투들 사이로, 황녀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박혔다. 올리비아와 마주친 바다 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 이래서 관망이구나.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