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세기의 약혼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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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세기의 약혼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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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세기의 약혼식 (2)
2023.01.04.
우아한 선율이 흐르는 연회장.
가장자리에 선 귀족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연회장으로 입장한 태자였다.
“태자 전하 드십니다!”
늘 옆에 있던 ‘마리아 에텔 영애’는 없었다. 단독 입장으로도 모자라 사절단 응대까지 미룬 채, 태자는 예의 그 날카로운 눈으로 연회장을 압도하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에텔 영애일까요, 마델레이네 공녀일까요.”
주어도 없이 모호한 말이었지만, 귀족들은 모두 단박에 이해했다. 하지만 아무도 쉽사리 답을 내지 않았다.
아직 마리아 에텔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둘 다 연회장에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귀족들의 동태를 살피던 하지스 백작은 한숨을 삼켰다. 타국의 사절단도 와 있는데 가십을 떠들다니.
빠르게 태자 옆으로 다가간 백작이 소곤거렸다.
“귀족들이 태자 전하의 단독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타국의 사절단도 와 있으니 지금이라도 사절단과 담소라도 나누시는 편이,”
“……공녀는 입장했나?”
“예?”
백작의 얼빠진 대답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레오포드는 성마른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제가 올리비아에게 선물한 드레스와 비슷한 드레스 자락이 보일 때마다 속이 뒤집힐 듯 일렁였다.
혹시나 올리비아일까, 하는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도 잠시였다. 달빛을 부은 듯 시린 은발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들뜬 기분은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리비아의 출발 시간을 확인하게끔 시종이라도 보낼 걸 그랬다.
“그렇게 잘 알면 공녀가 직접 나서지 그래.”
이 와중에도 한번 떠오른 제 목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성가시다는 듯 올리비아를 힐난하던 그날의 모든 게 뚜렷해졌다.
습하고 높은 온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던 귀족 회의와 별것 아닌 일로 토라진 마리아, 그 모든 것에 짜증을 토해 냈던 저. 그리고.
“……아니에요. 전하. 제가 괜한 말을 꺼냈습니다.”
웃으면서도 고개를 숙이던 올리비아까지. 어딘가 상처받은 듯한 초록색 눈이 애써 휘어지던 모습을 떠올리며 레오포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낯선 감정이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생경한 기분에 머릿속은 뒤엉킨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레오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땐, 날이 좋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하필 올리비아가 말을 붙인 날, 제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짜증을 낸 것…….
하. 레오포드가 가만한 숨을 뱉었다. 우습게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건 변명이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제가. 고작 지나간 과거의 하루에 핑계를 대고 있었다.
대체 왜.
목적지의 바로 앞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레오포드는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으로 치닫는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불안하게 뛰는 심장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베르탱.”
“예, 전하.”
“……올리비아, 아니. 리브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해.”
레오포드는 일부러 올리비아의 애칭을 입에 올렸다. 겨우 두 음절 소리 내어 말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안 되겠다. 연회고 뭐고 올리비아가 오자마자 태자궁으로 데려가야겠다, 생각할 그때였다.
“실례할게요. 오라버니.”
우아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황녀였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황녀는 연회의 주인. 적어도 올리비아의 입장 시기 정도는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러지.”
.
.
.
“마리아 에텔, 그 멍청이는 어디에 있어요?”
어둠이 깃든 테라스에 들어서자마자, 황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따라오던 하지스 백작이 깜짝 놀라 두꺼운 커튼을 내리고 앞에 경계를 섰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레오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회야. 말을 가려서 해.”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말은 가려서 했어요. 오라버니, 설마 오라버니께서도 알고 제 연회를 망치는 편에 서신 건 아니시죠?”
황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제야 유난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레오포드의 눈에 띄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까지 못 보셨어요?”
황녀가 비명처럼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지고한 황제에 대한 두려움과 귀족들 앞에서 망신당할 걱정이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황녀는 거칠게 커튼을 걷었다.
오라버니도 보면 알 것이다. 지금 오라버니가 택한 그 멍청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지금 제 연회장이 꼭 약!”
“……올리비아.”
잔뜩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황녀의 말을 끊었다. 홀린 것처럼 태자가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자의 뒷모습에 황녀는 마지막 희망이 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오, 오라버니!”
황녀는 사납게 태자를 부르다 멈칫했다. 멀어지는 태자의 의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완벽하게 예장을 갖춘 태자의 복장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황녀가 황급히 테라스에서 나왔지만 이미 태자는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잡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았다. 이미 사라진 태자 대신 마리아 에텔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가 누가 있을까.
아! 황녀는 다급하게 에텔 후작을 찾았다. 하지만 수많은 귀족들이 들어찬 이 연회장에서 에텔 후작을 찾는 것 또한 하늘의 별 따기였다.
“황녀 전하! 오늘 연회도 너무 근사합니다.”
“어쩜, 이런 콘셉트를 다 고안하셨습니까?”
귀족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황녀의 드레스 뒤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 *
“참으로 한가하십니다. 전하. 사실 우리가 그리 반가운 사이는 아닐 텐데.”
대공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레오포드는 아찔한 기분을 맛보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파트너라는 것을 과시하듯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올리비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레오포드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다. 일그러지는 입매를 겨우 다잡은 채 레오포드가 툭 내뱉었다.
“내가, 보낸 드레스가 아니군.”
제가 보낸 드레스를 입지 않은 올리비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어제 본 붉은 보석보다 훨씬 ‘약혼’의 느낌이 강한 반지였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레오포드는 마음 한편이 기이하게 아릿했다.
바다 빛 눈동자에 미묘한 감정이 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아무도 모르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제게 흰 드레스를 보낸 레오포드는 꼭 열여덟 약혼식의 레오포드처럼 예복을 입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제게 왜 드레스를 보내셨어요?”
덤덤한 질문이었다. 기묘할 정도로 가라앉은 초록색 눈이 레오포드를 향했다. 레오포드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녀의 옆에 있는 대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야! 올리비아 그대는 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려던 말이 막혔다. 레오포드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
약혼녀. 이 쉬운 세 음절이 과연 정답일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순간의 정적이 마치 영원처럼 길어지던 찰나였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드십니다.”
뿔피리 소리와 함께 시종이 목청 좋게 외쳤다. 동시에 하지스 백작이 뒤에서 소곤거렸다.
“전하, 가셔야 합니다.”
“……조금 이따 다시 이야기해.”
레오포드는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리브.”
고집스레 올리비아를 애칭으로 부른 뒤에야, 태자가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상대방을 베어 버릴 듯 서늘한 붉은 눈이 태자를 향했다.
……죽일까.
잠시 충동에 휩싸였던 에드윈은 아차 하며 빠르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초연한 눈으로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아가씨의 단단함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묘했다.
“……괜찮아요, 올리비아?”
“……그럼요. 안 괜찮을 이유가 뭐 있겠어요.”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안 괜찮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레오포드 프란츠가 마지막까지 제게 예의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 * *
“황녀가 주관한 이 여름 연회에 헤페르티의 사절단을 비롯해 타국의 사절단이 온 것은 처음이오.”
황제의 중후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모두 프란츠 제국에 온 것을 크게 환영하오. 특히 앞으로도 우리 프란츠 제국과 헤페르티와의 결속이 굳게 이어지길…….”
지고한 황제의 음성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기품 있게 웃는 낯 아래로 황녀의 불안한 눈이 연회장을 살폈다. 하지만 몇 번을 살펴도 마리아 에텔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너무 과한 걱정을 한 걸까. 하긴, 마리아 에텔도 머리가 있다면 타국의 사절단이 온 곳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메슥거리던 속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연설이 끝난 모양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연회장에 울렸다.
황제는 흐뭇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황후와 태자, 그리고 황녀까지.
불안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완벽했다.
저 아래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황제인 저와 프란츠 제국에 자신의 모든 공을 돌리는 대공까지.
입을 꾹 다문 것은 건방지던 헤페르티도 마찬가지였다. 제 기분을 살피듯 애써 웃는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황제의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짝짝, 가벼운 박수로 분위기를 환기한 황제가 호탕하게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지. 이번 연회에서 황녀가 사절단을 위해 축하 공연을 준비했다지?”
황제는 자랑스러운 눈으로 잠시 황녀를 바라보았다. ‘축하 공연’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황녀가 무어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폐, 폐하!”
“그러면, 시작하지.”
어느새 새로 들어온 악단이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그리고 지휘자가 지휘를 시작했을 때.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선율에 레오포드는 잠시 멈칫했다. 기분 좋게 음악을 즐기던 귀족들도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건 약혼식의 행진에서나 사용될 법한 음악이었다.
“축하 공연이 무슨 연극 같은 건가요?”
모두가 웅성거리던 그때였다. 환한 조명이 계단 위로 쏟아졌다. 계단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꽃잎들이 위에서 내려오는 와중에 누군가 조명 아래로 걸어 나왔다.
“누구죠?”
“저 사람, 에텔 영애 아니에요?”
눈을 깜빡거리던 황제가 순간 레오포드를 돌아보았다. 옆에 서 있던 레오포드는 어느새 성큼성큼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타국의 사절단이 왔는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목덜미를 지나 머리끝까지 뜨거운 분노로 달아올랐다. 상황은 가까이 갈수록 촌극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반짝이 사이에 파묻힌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잇새로 짓이기는 분노에도 마리아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낭랑하게 말했다.
“저희 약혼식이잖아요. 레오포드.”
“……뭐?”
“전하께서도 흔쾌히 승낙하셨잖아요. 이 공식적인 약혼식.”
마리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레오포드의 팔을 잡았다. 일그러진 레오포드의 얼굴에서 살기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마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황후 폐하와 엘킨 공작님의 보호 아래에서 치러지는 약혼식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부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무슨,”
“공녀와 했던 것보다 더 성대하게. 기억 안 나세요?”
마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레오포드의 머리에 불현듯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공식적인 약혼녀라고 저를 과시해 주세요. 제가 업무를 수행하기 더 수월할 수 있게요.”
어떻게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하다 못해 멍청한 생각에 레오포드의 말문이 막혔다. 이 모습을 다르게 바라보았는지 마리아의 얼굴이 다시금 환해졌다.
“타국의 사절단이 하객으로 참석한 정도면, 전 약혼식보다는 성대하겠죠. 그렇죠?”
교태 어린 목소리가 의기양양하게 울렸다. 레오포드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급한 건 타국의 사절단이었다. 어떻게든 빠르게 수습을 해야 했다.
곧바로 뒤를 돈 태자는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마리아를 미친 여자 취급해서라도 무마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저를 바라보는 초록 눈과 마주쳤을 때, 레오포드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굳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호흡을 빼앗긴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모든 신경이 오로지 올리비아만을 향했다.
우습게도 올리비아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했다. 올리비아가 괜찮다고만 하면, 모든 게 괜찮을 것만 같다는 지독한 열망이 피어날 때였다.
올리비아가 희게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헉, 레오포드는 채 갈무리되지 못한 날숨을 삼켰다. 이를 악물어도 폐부를 찔린 듯 고통이 몰려왔다.
알았어야 했다. 그 불안하게 일렁이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어야 했다.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초조함이 무엇이었는지.
시선이 가시는 동시에 날카로운 감각이 심장 위로 선연하게 박혔다.
레오포드는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올, 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