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세기의 약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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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세기의 약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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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세기의 약혼식 (1)
2023.01.01.
약혼녀.
그 세 음절이 콘라드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머릿속에 올리비아의 일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린 뒤, 콘라드는 밤을 새워 올리비아의 일기장을 모두 읽었다.
남의 일기장을 함부로 읽는다는 미안함 따위보다 절박함이 더 컸다.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여동생이나 핏줄에 대한 정,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고작 여섯 살이었던 아이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던 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이 일기장 안에 단 한 줄이라도 이 애가 숨통이 트일 만한 일이 있기를 바랐었다.
그리고 다섯 권이나 되는 일기 속에서, 콘라드는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기뻐하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건 올리비아가 아홉 살, 태자의 열한 번째 생일에 간 날에 있었던 이야기였다.
- 처음으로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너무 좋았다. 태자비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잘해야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태자 전하를 뵙고 나니 진짜 태자비가 되고 싶다. 태자 전하는 나를 도와주신 천사 같은 분이니까. 찬란하게 웃는다는 건 태자 전하 같은 분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 정말 좋다. 태자비가 되면 아버지께서는 매일 나한테 말을 걸어 주실 테고, 태자 전하도 나랑 같이 지내겠지. 그러면 오라버니들과 에셀라와도 함께 지낼 수 있겠다. 생각만 해도 좋다. 엄마가 말한 대로 내가 최선을 다하면,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질 거다.
우스웠다. 그 다섯 권 중에서 그 애가 행복했던 순간이 고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래서 더 마음이 아렸다. 그 뒤로 올리비아는 그 ‘찬란한 웃음’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까. 그 안간힘 끝에 오는 무응답에도 자신을 채찍질했으니까.
그래서 콘라드는 태자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를,”
꺼끌한 통증이 목 안쪽을 사정없이 긁었다.
“……그 애를, 정말 약혼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야…….”
바로 답변을 할 것같이 여유롭던 레오포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바다 빛 눈이 커다래지고, 시니컬한 웃음을 걸고 있던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렸다.
이내 집무실에 무거운 기운이 깔렸다. 누구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짙은 안개처럼 음울한 분위기에서 레오포드는 가만히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올리비아를 약혼녀로 생각했냐니.
그야,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 옆에 있는 이가 올리비아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일까.
그런데 왜 저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걸까. 레오포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하지, 그 한 단어가 지독하게도 입안에만 맴돌았다. 누군가 심장을 조이는 것처럼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이 말을 하고 난다면, 편해질까.
그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건 마리아 에텔이었다. 마리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포드는 무의식적으로 소공작을 바라보았다.
소공작의 자수정 빛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이상하게 저렸다.
이 무거운 분위기와 상관없다는 듯, 마리아는 요정처럼 발랄하게 말했다.
“아, 손님이 와 계셨네요. 실례할게요, 레오포드. 연회 준비 때문에 제가 전하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요.”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소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레오포드는 허망한 숨을 삼켰다.
아까의 질문에 뭐라도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는 모든 게 변명처럼 느껴졌다.
변명이라니. 제가 변명을 해야 할 사람은 이 제국에 아무도 없었다.
대답 따위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았다. 잘난 자존심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러는 사이, 콘라드는 묵례를 마친 뒤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레오포드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헤페르티 사절단과의 대면 인사가 있다고 했잖아.”
소공작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제 연인의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가뜩이나 레오포드가 마델레이네 소공작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초조했는데.
혹시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이야기를 할까 서둘러 달려왔다. 그런 마음은 알아주지도 않은 채 면박이라니.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 될지 꿈에도 모르는 레오포드가 야속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애써 쾌활한 척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귀엽다고 해 주면 한 번은 넘어갈 요량이었다.
“그거야, 뭐. 꼭 레오포드가 가야 하나요? 어차피 연회에서도 볼 텐데.”
“마리아. 타국과의 대면은 국사야. 그리 가볍게 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날 선 목소리였다. 마리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앞이 그렁그렁하게 번졌다.
“하. 울지 마. 마리아.”
저를 달래는 건 고작 건조한 말 한마디였다. 예전과 같은 포옹도, 뺨을 쓸어 주는 다정한 손짓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건 레오포드의 말을 듣는 것뿐이었다.
“안, 울어요.”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오늘만 지나면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따로 준비를 해서 들어갈게요. 연회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하니까요.”
뒤돌아서는 파란 눈이 단단하게 번뜩였다. 오늘, 절대로 변하지 않고 마침내 이루어질 마리아의 계획처럼.
.
.
.
하.
레오포드의 한숨 소리에 커프스 단추를 끼우던 시종이 움찔했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그조차 신경 쓰지 않고 사납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는 걸까. 국사를 가벼이 보는 이에게 태자로서 한마디 한 것뿐인데.
예쁘게만 보였던 어리숙함에 짜증이 몰려왔다. 마리아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러면 오늘은 연회장에서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멀리 떨어져 줄 텐데.
아까 마리아한테 직접 말했어야 했는데 황급히 나가는 터에 붙잡을 수도 없었다.
마리아가 오늘 타국과의 교류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맥 정도라도 짚으면 좋을 텐데. 적어도 올리비아만큼이라도…….
“그렇게 잘 알면 공녀가 직접 나서지 그래.”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순간 레오포드의 입매가 뻣뻣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힐난하듯 올리비아를 몰아붙이던 기억 속의 목소리는 분명, 제 것이 확실했다.
* * *
한낮의 비칸데르 대공저.
응접실 소파에 앉은 올리비아는 가만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다란 상자 속 드레스와 구두를.
“태자로부터 선물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소벨의 질문에 선물을 보겠다고 한 건 충동이었다. 올리비아가 여태까지 봐 온 레오포드는 아주 자존심이 강했다. 그렇게 오만한 남자가 모든 귀족들 앞에서 애칭 부르는 것을 거절당했다.
그런데 선물이라니.
“……선물을 가장한 폭탄이 아닐까요?”
아주 잠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소벨은 잠시 굳은 얼굴로 마법사를 불러오겠다고 진지한 대답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건.
“흰, 드레스네요.”
소벨이 중얼거렸다.
누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흰 드레스였다. 은사로 꽃 모양 자수를 놓고 자잘한 다이아몬드 가루를 흩뿌린 고가의 드레스.
“……폭탄보다 더 질이 나쁘네요.”
“예?”
소벨이 되물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답변할 힘조차 없었다. 이건, 정말이지.
제 열여섯, 약혼식의 드레스와 꼭 빼닮았으니까.
모두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잿빛으로 점철된 기억이 울컥 올라왔다. 그 더운 날의 들뜬 기대와 기다리던 순간의 벅찬 기분들.
그리고.
“……별로일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공녀가 화사한 타입은 아니잖아.”
한순간에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던 말까지.
올리비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숨이 자꾸만 먹먹하게 막혔다. 그때의 비참함과 수치스러웠던 기분이 떠오르며 머릿속을 채웠다.
무슨 이유일까. 도대체 제게 이런 드레스를 보낸 저의가 뭘까.
왜 제게 자꾸…….
딸랑-. 가볍게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었을 때에서야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아침부터 달콤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드레스 상자를 툭 쳤다.
“잘못 왔군요.”
그러더니 올리비아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세상 어떤 사내가 제 아가씨가 다른 남자가 보낸 드레스를 입는 것을 두고 본단 말이에요?”
에드윈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는 그리 마음 넓은 신사까지는 못 되어서요. 올리비아도 이해해 줘요.”
질투를 뻔뻔히 드러내는 말은 묘하게도 올리비아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올리비아의 가쁜 숨이 천천히 본래의 호흡을 되찾아 갔다.
슬쩍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핀 에드윈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매혹적인 입술 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올리비아가 입는 드레스, 걸치는 숄. 하다못해 발목에 걸치신 실 발찌까지도. 샘을 부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샘이 나는군요.”
올리비아는 잠시 에드윈의 말을 곱씹었다. 옷에 샘이 난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묻기에는 왠지 위험하다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적당히 타협을 보려는 의미에서 농담을 던졌다.
“……실 발찌에 방울까지 단 분이 할 이야기는 아닌 듯싶은데요?”
“달았으니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죠. 나는 이미 만천하에 아가씨의 귀여운 고양이다, 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아가씨께는 이리 드레스가 오니. 음, 결투라도 신청할까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말끔하게 어둠이 사라진 얼굴을 보고서도 에드윈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더구나. 내 아가씨께서는 내가 선물한 드레스조차 다 입지 못하셨는데. 감히 어딜 넘보는지.”
겉으로 보기엔 느긋한 이 말 아래에 진득한 진심이 묻어났다. 소벨은 잠시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문 앞에 서 있던 하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하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칼을 꺼내야 하는 날이 곧 올 거라는 표정에 소벨은 한숨을 삼켰다.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났지만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소벨은 전하의 칼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미리 꺼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 * *
여름 연회의 두 번째 날.
연회의 시작은 무난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그 멍청한 마리아 에텔이 올리비아를 따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시름 던 황녀는 연회의 주인답게 환하게 웃으며 모든 귀족들을 응대했다.
“황녀 전하, 오늘따라 유난히 더 아름다우세요.”
“어머, 황녀 전하께서 언제고 아름답지 않은 날이 있으셨나요?”
오가는 짓궂은 농담에도 젊은 백작은 벌게진 얼굴로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시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황녀는 고아하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는 말은 당연했다.
어제 늦은 밤, 황후한테 폐광산 이야기를 털어놓은 덕분에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푹 잠도 잤고, 낮에는 황후께서 어떻게 올리비아한테 명령할지 계획도 들었다.
그러니 자연히 더 환하게 웃을 수밖에.
“고마워요. 백작.”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옮기던 황녀는 저만치 떨어진 영애들을 발견했다. 연회의 분위기를 좋아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얼굴이었다.
“뭔데 그래요.”
황녀는 그쪽으로 다가가 가장 친한 놀이 친구인 리베오른 후작 영애한테 물었다. 영애는 잠시 난감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저희끼리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주인으로서 궁금하네요.”
“어딘가, 음.”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황녀에게 소곤거렸다.
“약혼식 느낌이 나는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약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우아하게 웃던 황녀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선율이 점점 멀게 들리는 와중에, 연회장의 장식들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오늘따라 더욱 반듯하게 정렬해 놓은 테이블과 의자들, 계단을 따라 놓은 수반과 어룽거리는 불빛들. 화려하게 반짝이는 흰색 바탕의 깃과 화려한 꽃들까지.
……설마.
황녀의 모골이 송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