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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클라이맥스를 위한 준비 (87/151)


#087. 클라이맥스를 위한 준비
2022.12.28.



 
카탕타 자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었다.

여름 연회를 위해 제도로 올라오기 전부터 카탕타 자작 부처는 수많은 기대에 부풀었다.

가문의 역사상 여름 연회에 가는 것도 자신들의 대가 처음이거니와, 심지어 황녀 전하께 직접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그래, 초대!


“늘 시답잖은 소리는 아랫것들로부터 나오죠. 자작께서는 아랫것들의 입단속을 제대로 하시고요. 내가 이곳에 오래 묵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지 않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자작은 그날, 황녀의 은밀한 명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숨죽이게 만들던 위엄 어린 눈빛과 그 뒤에 이어지던 달콤한 연회 초대까지.

그 때문에 처음으로 사용인들에게 단단히 엄포도 두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초대 명단에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작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뙤약볕 열기가 이글거리는 가운데, 무뚝뚝하게 저를 보는 황궁의 기사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위축되는 마음을 애써 떨치고 자작이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자작님, 이만 가요.”

뒤에서 자작 부인이 소매를 붙잡으며 소곤거렸다. 돌아보니 붉게 달아오른 부인이 실망 가득한 얼굴로 애써 웃고 있었다.


“뒤에서 모두가 보고 있어요.”

아. 그제야 자작은 뒤에 있는 사용인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마부들이야 이 소리를 듣지 못할지라도, 바로 뒤에 있는 하녀들은 이미 거절당하는 걸 두 번이나 들었다.

체면은 이미 구겨진 상태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치심이 또다시 몰려왔다. 입술을 파르르 떤 자작은 애써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대단치 않다는 듯 뒤를 돌았다.


“뭐, 이왕 온 김에 제도 구경이나 하고 가지.”

그때까지만 해도 자작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화야 나지만, 그저 정말 바쁘신 황녀 전하께서 잊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유모라던 루하스 남작 부인에게 편지를 한번 보내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현실적으로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어느 황궁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참.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자애로우시면 작위조차 대단치 않은 이들까지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는지.”

자작의 걸음이 뚝 멈췄다. 마차 앞에 서 있던 카탕타의 기사는 물론 하녀들까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한 번 더 이어졌다.


“작년에도 저런 이들이 수없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이름만 대면 다 연회에 들어갈 줄 아는 시골뜨기 귀족들.”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모욕 뒤로 낄낄 웃는 소리가 멀어졌다.

시골뜨기 귀족.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이는 하녀들의 모습까지.

겨우 가라앉혔던 자작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 충분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자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자작은 성큼 뒤를 돌아 기사들한테 바짝 다가가며 고함쳤다.


“뭐요? 지금 한 말 그대로 다시 말해 봐!”

 
.
.
.


“자작님, 여보. 괜찮으세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울먹이는 자작 부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자작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숙소로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에이, 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람.”

 
모욕을 주듯 저를 밀쳐 내던 황궁 기사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자작은 제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는 치워지듯 황궁의 정문 앞에서 내쫓겼다.

그것도 제 사용인들이자 영지민들의 앞에서.

분함과 창피함, 수치스러움이 자작을 덮쳤다. 영지에 있었더라면 이런 우스운 꼴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황궁의 기사라는 자들은 대체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저를 모욕 준 걸까.

한번 뻗어 나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화살은 자작 본인에게도 돌아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영지를 벗어나 이 제도까지 온 걸까. 저는 그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카탕타 가문이 중앙 귀족에 입성할 수 있는 기회. 황실에 눈도장을 한번 찍는 계기. 부인이 그토록 꿈꾸던 화려한 연회를 경험할 행운.

제 기대가 주제넘었던 걸까?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 저는 엄연히 황녀 전하, 아니 황녀로부터 초대를 받은 몸이었다. 그런데 제 자랑스러운 카탕타 가문이 초대 명단에도 없다니.

이건 황녀의 잘못이었다.

전에는 상상도 못 할 무엄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자작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황녀에 대한 원망이 들불처럼 번졌다.

성녀처럼 자애로운 황녀, 모든 이를 품어 주는 황녀. 이제까지 황녀에게 향했던 굳은 믿음이 산산조각 났다.

자작이 눈을 감았다. 눈매 끝으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자작 부인은 분통 터지는 마음을 다그치는 말로 대신했다.


“아이고, 왜 울어요. 빨리 카탕타로 돌아가요.”

그 목소리는 문 바깥으로 퍼져 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복도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무슨 일이긴요. 황녀 전하가 자작님께 똥 뿌린 거지.”

“쉿! 말조심해요. 여긴 카탕타가 아니에요.”

하녀의 거침 없는 말에 마부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하녀는 개의치 않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니, 솔직히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황녀 전하께서 저택에서 별말 다 하신 거 모두 알잖아요. 아무리 자작님이 좋게 포장하셨다고 해도 어찌나 까다로우셨는지. 그 십 일 넘는 기간 내내 저택 분위기가 얼마나 삼엄해졌어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황녀 전하께서 드실 음식이라지만, 그토록 귀한 식재료들을 카탕타에서 어떻게 공급해요. 청소는 또 어떻고요. 시녀님들도 다 귀하신 귀족이라면서 우리 마님께도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 안 나세요?”

기억이 안 날 리 없었다.


“자작령에서는 청소를 이따위로 하는 모양이죠?”


“음식이 형편없군요. 전하께서 드실 음식인데, 신경 좀 썼으면 좋겠어요.”

 
고상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말을 할 때마다 자작과 자작 부인이 어쩔 줄 몰라 했던 게 그들의 머릿속에도 또렷했으니까.

저들을 깔보듯 바라보았던 아름답고 우아한 황녀의 얼굴까지도 말이다.


“정말 저택에서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장 보러 갈 때마다 이야기했더니 속이 조금 풀렸다니까요?”

“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마음 놓고 황녀에 대해 말하던 사용인들은 일순간 귀신을 본 것처럼 얼어붙었다.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호기를 부렸던 하녀마저도 겁을 왈칵 집어먹고 서둘러 몸을 굽혔다. 와들와들 떠는 목소리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이고, 나으리.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겁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탓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관계에 대해 듣고 싶어서 말이지.”

눈을 질끈 감았던 하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듯 갑자기 나타난 귀족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들어 보니 억울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시린 은발에 잘생긴 사내. 수척하게 뺨이 말랐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어딘가 고귀한 분위기가 풍기는 남자였다. 다른 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하지만 제법 오래 산 하녀의 눈에는 귀족 남자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뭇대던 하녀가 결국 입술을 떼었다.


“정, 말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 황녀 전하가 얼마나 오랫동안 카탕타에 묵었는지부터 알려 준다면.”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언제 오셨는지, 언제 가셨는지 훤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하녀의 대답에 은발의 귀족,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낮의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

막 집무실에 들어온 레오포드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거친 손길로 단정하게 맨 타이를 풀었다.

갑갑함이 조금 사라졌지만 이미 망가진 기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비틀린 입매 사이로 어이없다는 듯 날카로운 숨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 사절단과의 첫 대면 인사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패전국 주제에.”

결국 날 선 말이 쏟아졌다.

하지스 백작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집무실에 있는 것은 태자와 저, 그리고 외무대신의 대리로 따라온 마델레이네 소공작뿐이었다.

그제야 놀란 마음을 삭인 하지스 백작은 태자를 살폈다.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레오포드는 형형한 눈으로 조금 전을 떠올렸다.


“아쉽군. 연회의 첫날에도 참석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인사를 한 뒤, 레오포드는 그저 의례적인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딘가 이상했다.


“송구합니다. 저희가 갑작스레 연락을 받은 터라 급히 달려왔음에도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헤페르티 사절단의 말은 다 그런 식이었다.


“……사절단의 규모가 크진 않군.”


“송구합니다. 전하. 아직 저희 헤페르티가 전후 복구에 매진 중인지라. 여름 연회에 참석할 이들을 최대한 모았음에도 부족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를 갖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례했고, 묘하게 불쾌감까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레오포드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려 했다. 패전국이 승전국의 연회에 참석하니 얼마나 배가 아플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절단의 관심이 온통 딴 곳으로 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레오포드가 뼈 있게 한마디를 했을 때, 사절단의 주축 키월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그런데, 비칸데르 대공도 오십니까?”

 
헤페르티를 패전하게 만든 원수라도 보고 싶은 걸까. 제 앞에서 암살이라도 시도할 요량이라면 그것참 볼만하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저희로서는 뼈아픈 이야기지만, 그토록 훌륭한 기사가 있으셔서 좋으시겠습니다.”


“……뭐?”

 
그 순간 레오포드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사절단이 지칭하는 자가, 대공이란 말인가?


“복구하는 지금에서야 소문을 들었습니다. 비칸데르 대공께서 기사가 아닌 민간인은 절대 건들지 않으셨다고.”


“포로도 정당한 대우를 갖춰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점에서만큼은,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살육귀라 별명이 붙은 대공의 자애로운 면모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표정 관리조차 안 되었지만 사절단과의 첫 대면 인사를 망칠 수는 없어서 겨우 배웅까지 마쳤다.

레오포드는 이를 갈며 화를 벌컥 터트렸다.


“원래 패전국들은 다 그렇게 덜떨어지고 무도한가? 자신들을 패배하게 만든 자를 존경하려 하다니. 하긴, 그래서 패배했겠지.”

하지만 앞에 앉은 마델레이네 소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레오포드는 애써 감정을 갈무리했다.


“……공녀가 제도에 있는데 아직도 대공저에서 머무른다더군.”

그 말에야 소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을 보니 이제야 속이 좀 풀렸다. 진즉 말하기 전에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레오포드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내 공작과 소공작을 믿고 계속 올리비아에 대한 일을 맡겨 왔는데, 안 되겠어. 오늘 연회가 끝나는 즉시, 올리비아를 태자 궁의 태자비 방으로 들이려 해.”

“전하. 그게 무슨,”

소공작의 숨소리가 떨렸다. 레오포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약혼녀를 조금 일찍 데려온다는 것인데. 그리 놀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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