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약혼녀에게 보내는 애틋한 선물
(86/151)
086. 약혼녀에게 보내는 애틋한 선물
(86/151)
#086. 약혼녀에게 보내는 애틋한 선물
2022.12.25.
태자 궁의 이른 아침.
하지스 백작은 커다란 분홍색 벨벳 상자 두 개를 든 채 태자의 침실로 향했다.
조금 전, 에텔 후작저에서 온 이 두 개의 상자에는 태자의 예복과 구두가 들어 있었다. 상자 위 커다란 리본 장식에는 달콤한 향수가 뿌려진 카드도 한 장 꽂혀 있었다.
- 채비를 마치고 곧 입궁할게요. 당신의 마리아가.
여느 연회 때와 같은 카드 내용이었다.
연회 날마다 마리아 에텔이 입궁한 뒤, 태자와 함께 단장을 하며 연회의 입장에 동행하는 건 제법 오래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하지스 백작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통유리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지난밤은 밤이슬이 유난히 많았다. 정원 위로 피어난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그 몽환적인 분위기는 정원을 신비롭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꼭 어제. 연회의 주인처럼 당당하던 마델레이네 공녀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홀린 듯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던 하지스 백작은 어슴푸레 비치는 햇살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가느다랗게 비추는 햇빛 아래 정원의 풀잎이 반사되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은빛의 티아제 궁처럼.
쓴웃음을 머금은 하지스 백작은 다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발코니로 나갔던 태자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도 연회장에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마델레이네 공녀의 거부에 제법 상심이 큰 것 같다는 귀족들의 뜬소문은 삽시간에 연회장을 뒤덮었다. 그 덕에 귀족들이 모두 출궁하고 나서야 태자는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태자의 침실 앞으로 다가가자 문 앞에 있던 시종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침실 안. 하지스 백작은 익숙하게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어제 태자는 침실에 들어와서도 독한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술에 강한 태자라도 지금쯤이면 푹 잠들었을,
“……내게 편지 온 거 없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하지스 백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간해서는 술에 취한 다음 날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는 태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지스 백작은 놀란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에텔 영애로부터 예복이 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입궁을 알리는 카드도,”
“올리비아한테서는?”
이를 악문 태자의 목소리가 하지스 백작의 말을 잘랐다. 평소라면 빠르게 답변이 돌아왔겠지만, 침묵이 길어졌다.
레오포드는 고개를 돌려 하지스 백작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레오포드의 눈에는 하지스 백작이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게 선연하게 보였다.
그야말로 확실한 대답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도.
맥이 탁 풀리는 동시에 밤새 머릿속을 울렸던 담담한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송구하지만 앞으로 저를 부르실 때 애칭은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되었다.
새까만 밤이 가도록 레오포드는 인내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올리비아라면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변명이나 이유라도 보내올 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이건,
“……나쁜 꿈 정도로 끝날 일이니까.”
레오포드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끓는 분노가 목 안쪽을 사납게 할퀴었지만, 레오포드는 통증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래, 악몽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고 나면 사라질, 그뿐인 꿈.
올리비아가 저를 지나치듯 스쳐 가고, 애칭을 거부하고, 다른 이와 같은 반지를 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아침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점점 확신이 얹어지는 순간, 레오포드의 머릿속은 어제의 일로 뒤엉켰다.
애칭을 거부하는 올리비아. 대공과 같은 반지를 끼고 나타난 올리비아. 그리고 반짝이는 얼굴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올리비아……!
무언가 섬뜩한 직감이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올리비아는 변했다. 그것도 아주 나쁜 쪽으로.
헉, 하고 레오포드는 숨을 삼켰다. 지독한 통증이 레오포드에게 엄습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오르는 예감을 지워 낼 수는 없었다.
“전, 전하! 괜찮으십니까?”
단말마의 호흡에 당황한 하지스 백작이 서둘러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커튼을 걷었다.
금세 방 안에 찬란한 햇빛이 들어찼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햇빛에 레오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츰 빛에 눈이 익어 가는 사이,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정원이 눈에 박혔다.
“바로 의원을!”
“……내 정원이 은빛으로 빛나는군.”
설렁줄을 잡아당기려던 하지스 백작은 새삼스럽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그 어둠 속에서 호흡을 삼켰던 소리와는 달리 태자 전하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밤을 지새운 티조차 나지 않는 잘생긴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본 곳에는 과연, 은빛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법한 장관이 펼쳐졌다.
하지만 하지스 백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 황궁에서 ‘은빛’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스 백작의 심장이 기이하게 두근거렸다.
지금이라면, 하지스 백작은 느릿하게 떨어지는 태자의 입술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언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그리고 하지스 백작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공녀는 어제 대공과 함께 대공저로 귀가했습니다.”
짐작한 거처였지만 이전에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당장 올리비아의 거처를 티아제 궁, 아니 이 태자 궁의 태자비 방으로 변경해야 했다. 올리비아가 제도로 돌아온 지금이 적기였다.
딱 몇 개월만 더 버티면 일 년이었고 그러면, 마리아와의 약혼 기간이 끝나는 즉시 올리비아와 국혼을 치르면 모든 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거였다.
조급함이 레오포드를 잠식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물러가던 어제의 올리비아 모습이 눈에 선해서, 레오포드는 탁하게 내뱉었다.
“……오늘 연회 전에 잠시 볼 수 있도록 데려와.”
“송구하지만, 연회 전 전하의 일정이 꽉 차 있습니다.”
“빼.”
유능한 보좌관인 하지스 백작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하지스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헤페르티 사절단의 첫 대면 인사는 조정이 어렵습니다. 그 뒤에도 오르앙 왕국의 사절단의 인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답변에 레오포드는 입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날 선 눈매 끝에 잠깐의 미련이 담겼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갈급하다 해도 레오포드는 태자였다.
전쟁 후 헤페르티와의 첫 대면이었다. 대공이 첫 공무로 헤페르티와의 협상을 고른 이상, 오늘의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닌 협상의 초석이 될 것이었다.
대신 레오포드의 잘난 머리는 다른 방안을 골랐다.
“올리비아한테 드레스를 보내.”
드레스라니. 하지스 백작은 잠시 망설였다. 과거 공녀한테 드레스를 보낸 적은 많았으나 지금 태자의 명령은 조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드레스를 보내면 되겠습니까?”
“그야.”
어제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를 말하려던 레오포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요정처럼 아름답던 그 차림은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
어두운 빛깔의 드레스를 입었지만, 세상에 저만 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던 올리비아가 떠올랐다. 마음에는 덜 찰지언정, 그 애매한 드레스들로 올리비아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잠시 고민하던 찰나였다.
“어떠세요, 전하?”
해묵은 기억 너머로 잔뜩 긴장한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레오포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주 더운 날이었던 것 같다. 분명 올리비아와의 약혼식을 준비하던 날들 중 하나였다. 그날, 올리비아는 저를 향해 물었다. 눈부시게 흰 드레스를 입고서.
앳된 얼굴 가득 기대를 담고 저를 바라보던 올리비아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을 때에서야, 레오포드는 굳게 다물린 입술을 열고 대답했다.
“흰색. 흰색이 좋겠군.”
제법 오래된 회상을 꺼내듯 레오포드의 바다 빛 눈이 애틋해졌다. 그 정도의 추억이라면 분명 올리비아도 다시 그녀가 품었던 십일 년의 감정을 떠올릴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오포드는 그 오래된 기억 속, 올리비아의 질문에 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별로일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공녀가 화사한 타입은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전하. 말씀대로 앞으로 흰 드레스는…….”
울지 않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이던 얼굴도, 드레스 자락을 꽉 그러쥐던 작은 손도.
레오포드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연인인 마리아 에텔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
.
.
한편, 레오포드가 욕실로 들어간 뒤.
시종장에게 드레스에 대해 일러 둔 하지스 백작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흰 드레스라니. 선택지가 넓어서 다행이었다. 더불어 전하 본인의 예복에 대해서는 그 어떤 명령도 없었다는 것도.
하지스 백작은 상자를 툭, 열어 보았다. 마리아 에텔이 바치는 예복은 늘 그렇듯 태자 전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와 소재였다.
꼼꼼하게 예복을 살피던 하지스 백작은 저도 모르게 작은 숨을 뱉었다.
정교하게 수놓인 황가의 문양 자수며, 완벽하게 재단된 예복이었다. 아니, 이건 잘 만들어진 예복인 걸 떠나 지나치게 격식을 갖춘 예복이었다. 꼭 약혼식이나 결혼식에서 사용될 법한.
하지스 백작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태자 전하가 언급한 ‘흰 드레스’에 너무 골몰한 모양이다. 여름 연회의 예복에 약혼식이라니.
찜찜하게 뻗어 오는 감을 애써 무시한 채, 하지스 백작은 예복을 내려놓았다. 그는 지금, 변화하는 태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 *
“……다른 날은 몰라도 내일은 꼭 참석해요!”
앙칼진 고함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꼭 제가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던 원망 어린 눈빛도, 오늘 자신이 연회에 참석한다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믿는 양 기세등등한 모습까지.
오늘 연회에 가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비아. 올리비아?”
나직한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불렀다. 자조적인 상념에서 깨어나며,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도 대공저의 응접실.
바로 앞에 앉은 에드윈이 편지 한 통을 든 채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어요. 올리비아.”
“네?”
“빨리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가야지. 여기에는 내 아가씨의 관심을 빼앗는 게 너무 많아요.”
나직하게 간추린 말 아래로 대공이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알고 있는 소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듣기에는 그저 제법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금세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에드윈은 치미는 감정을 애써 욱여넣었다.
그리고 앓는 목소리로 사정하듯 말했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난 정말 심각하다고요. 올리비아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로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요.”
“안 참으면,”
쾌활하게 농담을 이어가려던 올리비아는 순간 말을 멈췄다.
저를 보고 가여운 척을 하던 에드윈의 새빨간 눈이 짙게 번뜩였을 때, 올리비아는 어쩌면 에드윈의 말이 반쯤은 진심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뒷말을 이었다.
“……이라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을게요.”
“해도 지극히 괜찮은데요. 난.”
어쩌면 반보다 더 참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혹하듯 고혹적인 에드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볼이 달아오를 정도로 근사한 목소리에 에드윈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아차 하며 소벨을 바라보았다.
티 나지 않게 분홍빛 분위기를 참관하던 소벨은 시침을 뚝 떼며 시선을 내렸다.
“……편지들을 확인하신 뒤 답신을 하시면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편지……들?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하던 올리비아는 그제야 에드윈이 들고 있는 편지뿐 아니라 테이블 위에 가득 올려진 편지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게 다 저한테 온 편지예요?”
황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함부로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지만, 올리비아도 에드윈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네. 뭐.”
마뜩잖다는 듯 편지를 바라보던 에드윈은 곧바로 들고 있던 편지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개중, 올리비아가 신경 쓸 법한 편지라면 이 한 통 정도?”
고운 분홍빛 편지 봉투 위에 찍힌 에셀라의 개인 인장을 확인한 올리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느슨하게 휘어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윈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냉큼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어?
올리비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은근한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향했다.
“이 편지를 드리면, 아가씨는 내게 뭘 주실 건가요?”
“어차피 제게 온 편지 아니에요?”
“지금은 제 손에 있네요.”
나른한 눈은 올리비아를 놓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시선이 점점 요요해졌다.
붉어지는 뺨을,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뾰로통하게 나오는 입술을.
그러면서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연신 마주하는 눈을 바라보는 에드윈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치사해요.”
“때로는 치사해져야 관심을 주시는 아가씨보다 더 하려고요.”
한마디도 안 져 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러 톡 내민 입술은 신사의 낯을 뒤집어쓴 사내에게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느른하게 목울대를 울린 에드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론, 소벨에게 나가라는 듯 손을 내젓는 것을 잊지 않은 채로.
이 정도 투정이면, 관심을 빼앗긴 심술로는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에드윈이 빙그레 웃음을 삼켰다.
* * *
그 시각, 태양 빛이 작열하는 황궁의 정문.
“뭐, 라고요?!”
커다랗고 웅장한 성곽에 압도당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탕타 자작 부처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다시 한번 봐요. 분명히 황녀 전하께서……!”
“애석하게도.”
하나도 애석하지 않은 얼굴로, 기사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연회의 초대 명단에 두 분의 이름이 없습니다.”
카탕타 자작 부처의 얼굴은 이내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