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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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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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2022.12.21.
“아버지…….”
그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간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아버지가 일기장을 보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제가 느꼈던 지독한 감정들이 아버지한테도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금 전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떠한 감흥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제 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시니까.
냉철하지만 공정하고 따뜻한 분.
그게 콘라드가 바라보는 아버지,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이었다.
아버지가 에셀라와 제이드에게, 그리고 제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콘라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견 차가운 듯 보이는 얼굴로 자식들을 바라볼 때면 얼마나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는지도.
콘라드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에 어떠한 동요라도 있기를 바랐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이든 안쓰러움이든, 혹은 동정이든.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콘라드는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섬뜩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툭, 일기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신 콘라드의 귓가에서 반복되었다.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아버지에 대한 굳은 믿음 위로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내일부터 헤페르티 사절단이 연회에 참여한다지. 태자 전하께서도 타국의 사절단이 있을 때는 올리비아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신다 하셨다. 그러니 아침 일찍,”
“아버지……. 일기, 를 보셨잖아요.”
콘라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처음 있는 일에 공작은 매서운 눈으로 아들을 질책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시선이 아니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무언가 턱턱 걸렸지만 콘라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건 올리비아, 그 애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이건 다 오해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께서도,”
“오해? 무슨 오해.”
“그러니까…….”
되묻듯 돌아온 말에 무심코 대답을 하려던 콘라드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목 안쪽이 까끌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통증이 예리하게 콘라드를 할퀴었다.
오해,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올리비아를, 그 애를 미워한 이유는 명확했다.
다정했던 부모님은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었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죽었다. 모든 게 올리비아가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올리비아가 들어와서?
콘라드는 잠시 휘청였다. 두 다리가 지탱하고 있는 바닥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아, 버지.”
간절한 부름이었다.
제발, 그는 지금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공작은 무심한 눈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제법 여물었다고 생각한 큰아들은 아직도 마음이 여렸다.
“말하고 싶은 게 뭐냐.”
콘라드는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 와중에 아버지의 목소리는 잔혹할 정도로 선명했다.
“나도, 에셀라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조금 바뀌긴 했다. 그 애를 조금이나마 용서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 아이가 오늘 연회에서 웃고 있더구나.”
하. 공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했다.
그 얼굴 위로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스쳐 갔다. 콘라드의 어린 시절, 공작 부인이 죽고 난 뒤 오열하던 얼굴과 똑같았다.
그래서 콘라드는 늘 아버지의 편이 되었다. 기둥 같은 아버지한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헤이즐이 왜 죽었는데.”
그게 올리비아를 탓하는 이유일 수는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동안에도 흐릿하던 형체는 점점 또렷해졌다.
저를 바라보며 고집스레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아무리 모욕을 줘도 제 곁에 와서 웃던.
그리고 마침내.
남을 보듯 자신을 지나치던 올리비아.
체념의 끝에 선 초록색 눈빛으로 콘라드를 짧게 보다가 돌아서던 모습이 떠올랐다.
폐부를 찔린 듯 콘라드가 숨조차 쉬지 못하자, 무심한 자수정 빛 눈이 콘라드를 응시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너는 정말 몰랐니?”
문득 제이드가 저를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얼빠진 얼굴로 올리비아에 대해서 말하던 제이드에게 제가 했던 말도.
그제야 콘라드는 제이드가 허물어진 잔해만 남은 것처럼 서 있었던 것을 이해했다.
그때 제 눈이 지금 아버지처럼 온전한 증오만을 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에서야 콘라드는 깨달았다.
제가 미워해야 했던 사람은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교계에서 끊임없이 베이는 꼴을 보여야 했던 이는,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쉬어라. 내일 대공저에 다녀오는 것은 잊지 말고.”
금세 감정을 갈무리한 듯, 아버지는 올리비아의 방을 나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콘라드는 한 발도 뗄 수 없었다. 이제야 진실을 알아차린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비겁하게도 제가 미워하지 못했던, 이 케케묵은 상처들의 원흉은.
전부 다. 아버지였다. 결코 공정하지도, 강인하지도 않은 아버지.
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아니, 이토록 늦게까지 외면했다.
이겨 낼 수 없는 참담함에 콘라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 * *
황녀 궁 응접실.
통유리 창 너머로 짙푸른 어둠이 드리운 정원이 보였다. 정원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등불들이 연회의 화려한 분위기를 돋웠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황후는 정원 쪽으로 눈길 한 점 주지 않은 채, 마주 앉은 황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황후는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부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름답게 치장한 황녀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로 변명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줄 몰랐어요. 그랬더라면 절대로 올리비아 그 천것한테 건네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 맹랑한 게, 하필 황제 폐하께서 시키신 일을 여태껏 본인이 한 거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 저를 협박해서…….”
황녀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이전에 황제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건 황제가 술에 거나하게 취했던 몇 달 전의 이야기였다. 전쟁터에서 대공이 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았던 황제는 술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황후는 내가 이번에 황녀에게 부여한 게 얼마나 큰 보물인지 모를 거야.”
세상에 하사할 게 없어서 폐광산을 하사하고는, 그걸 보물이라니. 하지만 황후는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화를 가라앉혔다.
“예전에 로웰의 공주가 그토록 아끼던 광산을 앗아 온 적이 있었지. 효심 깊은 개라면…….”
졸음이 몰려오는 듯 황제의 말은 거기에서 멈췄다. 하지만 황후는 다음 말까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황녀가 그 폐광산을 소유한 한, 어쩔 수 없이 대공은 황실의 개노릇을 충실히 수행할 거라는 것.
그런데, 그 폐광산을 올리비아한테 넘겼다니. 황후는 눈앞이 아연해졌다.
오늘 황제가 일찍 잠에 들어 다행이었지, 까딱하면 이 말을 황제 앞에서 들을 뻔했다.
그러는 사이, 황녀는 발을 뻗을 공간이라도 만들려는 듯 황후의 옆으로 다가가 애걸했다.
“폐하, 어머니. 저 좀 살려 주세요. 정말, 황제 폐하께서 아신다면…….”
황녀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지고한 황제의 진노는 벼락같은 호통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신임을 받은 덕에 제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 그것들이 한순간에 아스라이 부서질 것이 자명해서.
황녀의 고운 얼굴 위로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황녀. 하, 울지 말아요. 황녀답게 굴어야죠. 이 상황에서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울먹이는 딸의 모습을 보자 머릿속을 휘젓던 아찔함이 싹 사라졌다.
입술이 마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다스리며, 황후는 지금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올리비아 그 애가 광산의 가치를 알고 있나요?”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아요.”
“황녀. 확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황후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겁을 덜컥 집어먹은 황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절대, 절대 모를 거예요. 황족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인데, 그 천것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미 알았더라면 오늘 다 밝히고도 남았을 아이예요.”
하. 황후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황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연회는 한참이나 남았다. 가치를 알고 있다면 언제고 밝힐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폐광산의 소유권이 넘어간 사실이 밝혀진다면 올리비아 그 반쪽짜리가 그 광산을 황녀의 일을 대신한 대가로 받아 갔다는 것까지 알려질 게 눈에 훤했다. 황제는 절대로 몰라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연회 때 올리비아 그 애가 얌전히 태자의 옆으로 돌아오게끔 만들어야 했다.
태자 역시 헤페르티 사절단이 있을 때는 최대한 올리비아를 곁에 두겠다고 했으니, 그것은 걱정이 없었다. 오늘이야 튕기듯 애칭을 거절했다지만 숱한 모욕을 견디면서도 태자의 옆에 있었던 아이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착착 정리되는 와중이었다. 한숨을 돌리던 황후의 뇌리에 번뜩 오라버니 엘킨 공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텔 영애를 태자비로 올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폐하.”
“재밌는 패인 듯싶은데. 성과를 보여 준다면 마음이 기울 수도 있을 테지요.”
그때 제가 했던 대답에 엘킨 공작은 짙게 웃으며 연회 마지막 날을 기대하라고 했다.
연회 마지막 날이라니. 무슨 일을 벌일지는 몰라도 이제 마리아 에텔은 쓸모없는 패가 되었다. 황후는 재빠르게 설렁줄을 당겼다. 이내 바깥에 있던 시녀장이 들어왔다.
“……엘킨 공작에게 지금 당장 입궁하라고 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 부름에 응답하는 오라버니라면 당장 궁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하지만 늘 충성스럽게 움직이던 시녀장은 잠시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 엘킨 공작님이라면. 오늘 사절단 응대 때문에 외부 궁에서 하룻밤 묵는 일정을 소화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필.
다급한 마음에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아까 연회에서 잠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절단을 대접하는 대표로서 자리를 비우기도 쉽지 않을 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황녀의 표정이 더욱 울상이 되었다.
황후는 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빙그레 웃었다. 시녀장을 내보낸 뒤, 황후는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황녀. 걱정하지 말고. 체통을 지키세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안 그래도 올리비아를 데려간 대공의 속내가 음험하다 느껴, 이미 사람을 시켜 비칸데르령 쪽으로 보냈어요.”
“그렇다면…….”
“지금이야 대공의 비호 아래에서 날뛴다 한들, 제까짓 게 태자의 옆으로 안 오고 배기겠어요?”
황후가 낭랑하게 말했다. 그제야 황녀는 조금 안심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황후는 화사하게 웃었다. 어차피 오라버니의 말을 들어 유추하건대, 마리아 에텔의 행동은 연회 마지막 날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은 대공의 속내를 파악하고, 올리비아 그것을 태자의 옆으로 돌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황후는 다시 미간을 풀었다. 고혹적인 입술 끝이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황녀 또한 황후를 닮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 * *
그리고 연회의 두 번째 날 아침.
에텔 후작저의 드레스 룸.
창문으로 화창한 아침 하늘이 보이는 가운데, 마리아 에텔은 홀린 것처럼 한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잘해 낼 수 있었는데, 마담. 내게 시간을 너무 많이 불렀군요.”
마담 플루토는 겨우 몸을 세운 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난밤, 부티크의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던 에텔가의 사용인들은 거의 납치하다시피 저와 재단사들을 에텔 후작저로 데려와 으름장을 놓았다.
가장 빠른 속도로 에텔 영애의 드레스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엄포에 마담과 재단사들은 모든 총력을 기울여 삼 일 치의 일을 간밤 새에 끝냈다.
하지만 마담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마리아는 황홀한 기분에 휩싸였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입었던 약혼식 드레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
진주와 다이아몬드 가루를 아낌없이 흩뿌린 저 드레스는 엘킨 공작님과 아버지의 돈으로 저를 위해 제작되었다. 백금 티아라는 물론이고 햇빛에 반짝이는 풍성한 베일까지.
저 드레스를 입고 모든 귀족과 사절단 앞에서 약혼식을 치르는 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갔다.
그런 저를 바라보는 레오포드의 눈빛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것도 분명했다.
“그러니, 바쁘고 존경받는 내 아가씨 귀찮게 편지 보내는 일은. 더는 없는 겁니다. 순진하지 않은, 전하?”
문득 떠오른 기억에 마리아의 푸른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편지라니. 레오포드가 그 반쪽짜리한테 편지를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대공의 말은 거짓일 텐데. 곧 태자비가 될 사람이 이렇게 사사로이 흔들리다니.
저 드레스를 입고 약혼만 한다면……!
잡념을 떨치고 약혼식을 상상하는 것에 집중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부푼 기대에 부응하듯 유모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아가씨께서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약혼녀가 되실 거예요. 세기의 약혼식이라고 불릴지도 몰라요.”
세기의 약혼식.
마리아는 입속으로 단어를 굴려 보았다.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하긴.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에 타국의 사절단이 함께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제 약혼식에 제국을 넘어서 대륙 전체가 찬사를 보낼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황태자비, 그 고귀한 자리에 오르실 테고요.”
황태자비. 꿈 같은 일이 마리아의 앞에 눈부시게 펼쳐졌다. 마리아는 이제 그 길로 가는 카펫을 사뿐사뿐 밟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