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아버지에 대한 믿음
(84/151)
084. 아버지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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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아버지에 대한 믿음
2022.12.18.
“비칸데르령은 현재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 일체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저거였다.
비칸데르령으로 보낸 인편들이 모조리 허탕으로 돌아온 이유가. 심지어 부관인 헉슬리 경조차 올리비아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연회장 한 편을 바라보았다. 냉기 어린 시선의 끝에 올리비아가 걸렸다.
정확히는, 두 명의 기사와 대공에게 둘러싸인 올리비아가.
저 아이가 제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정상적인 궤도로 흘러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델레이네 저택에 방문하라는 부름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그토록 태자를 사랑하던 저 애가 애칭을 부르는 것조차 거부하다니. 도대체 그 몇 주 사이에 비칸데르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까의 일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애칭을 부르지 말라던 올리비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리고 연회장으로 입장하다 눈이 마주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던 저 애가.
절대로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니었다. 공작은 단언하며 조급증이 올라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는 이미 올리비아를 저택에 들이기로 큰마음을 먹었다.
헤이즐과 에셀라를 위해.
제게 늘 불행을 가져오는 저 애를 아주 조금,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말을 건넨다면 저 애도 다시 대공을 떠나 공작저로 들어올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건넬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수많은 눈들이 저와 올리비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서 말을 붙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공작은 계속해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대공의 이야기를 듣던 올리비아가 잠시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마델레이네 공작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게 즐겁다는 듯, 밝게 웃다니.
……저 애는, 저렇게 웃어서는 안 되었다.
헤이즐을 죽게 만든 것으로 모자라, 에셀라를 제게서 돌아서게 만든 저 애는.
저를 이토록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저렇게 혼자 행복하다는 듯 웃어서는 안 되었다.
분노와 충격, 그리고 원망이 뒤엉켜 공작의 마음을 헤집었다.
냉철하게 사태를 관망하던 눈 위로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 순간,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였다.
티 나지 않게 공작을 힐끔거리던 귀족들의 눈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에게 고정되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팽팽할 때였다.
누군가 공작의 앞을 막아서듯 끼어들었다. 얼굴을 확인한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콘라드.”
나직한 음성 위로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깔렸다. 평생토록 아버지 말을 단 한 번 거스른 적 없는 아들이라면 단박에 비켜서게 만들 정도로.
하지만 콘라드는 물러나지 않았다. 시원스레 잘난 얼굴 위로 그늘이 져 있었다.
“……아버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굳은 결심을 한 듯 콘라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공작은 고개 숙인 콘라드를 바라보는 대신 그 너머를 응시했다.
저를 바라보는 대공의 붉은 눈이 반짝거리는 순간,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그가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게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어서 올리비아를 붙잡아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든, 혼자 행복 속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저 애를 다시 황궁에 데려다 놓아야 하는데.
하지만 간신히 남은 이성은 콘라드를 밀치고 올리비아에게 가는 것을 막았다. 공작은 차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뜨거운 불덩이 같은 날것의 감정이 점점 식어 내리는 사이, 콘라드는 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다.
콘라드는 뒷말을 삼키며 입 안쪽을 깨물었다. 통증이라도 느껴졌으면 했는데, 왼쪽 가슴에 내려앉은 무게감만 더 의식되었다.
올리비아의 일기장을 본 뒤부터 내내 고민했다.
이것을 아버지께도 보여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저만 알고 지나갈 일인지.
하지만 오늘 이 순간, 저 멀리 웃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니 결단이 섰다.
아버지께 보여 드리는 게 맞다.
아버지도 올리비아가 힘들었다는 것을 아신다면, 지금처럼 분노하지만은 않으실 거였다.
그게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본모습일 테니까.
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콘라드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연회장 내로 울리는 부드러운 선율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돌아가자.”
콘라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먼저 돌아선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늘 제가 봐 왔던 아버지의 등이었다.
강인하고, 꼿꼿하고. 그리고 시릴 정도로 공정한 아버지.
콘라드는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버지의 등을 따랐다.
하지만 뒤따르는 콘라드는 모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짧게 떨어진 공작의 대답은 올리비아가 연회장을 나간 뒤에야 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앞서가는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찼다는 것을.
그저 콘라드는 아버지 역시 지금의 이 상황이 어딘가 잘못된 것을 눈치챘을 거라, 그렇게 믿을 뿐이었다.
여태껏, 늘 편리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 * *
그 시각,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에스코트에 따라 연회장을 나섰다. 뒤따르는 하워드와 윈스터의 발걸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복도의 열린 창으로 신선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연회장의 열기를 억누르던 인공적인 시원함 대신, 딱 좋게 서늘한 바람이 더운 뺨을 스쳤다.
올리비아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목걸이의 마석이 온도를 조절해 준다 해도 이 밤공기만큼 기분 좋은 건 없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올리비아.”
“……생각보다 더 즐거운 연회였어요. 물론.”
올리비아의 중얼거림 끝에 단서가 달렸다. 그 조건에 귀를 쫑긋하던 세 남자는 이어지는 말에 빙그레 웃었다.
“비칸데르령에서 했던 연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올리비아는 배시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리 완벽한 연회라 할지라도 비칸데르령에서 있었던 두 번의 연회를 뛰어넘기란 힘들 것이다.
아, 앞으로 있을 혼인 축하연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
“많이 즐거웠나 봐요. 올리비아.”
“그럼요. 춤도 다섯 번이나 췄고, 콘셉트에 어울리는 완벽한 차림에. 심지어.”
올리비아는 말끝을 끌며 찬찬히 에드윈과 하워드, 그리고 윈스터를 바라보았다. 초록 눈 위로 고마운 마음이 물씬 올라왔다.
“아주 늠름한 제 기사님들이 세 분이나 저를 보호해 주셨거든요.”
“어휴. 그걸 또 알아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아가씨.”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윈스터와 하워드의 대답은 정반대였지만, 뿌듯한 티가 나는 얼굴만큼은 똑같았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더 훌륭한 연회긴 했다. 태자와 잠시 말을 섞긴 했어도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황녀나 마델레이네 공작가와는 일체 마주치지 않았다.
저를 향해 다가오려는 공작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지만, 그마저도 콘라드가 막아섰고.
콘라드. 그 세 글자에 올리비아의 눈이 잠시 멍해졌다. 마델레이네 공작을 막아서기 전, 잠시 저를 돌아보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습게도, 한평생 일관된 시선을 보내던 콘라드의 눈빛이 오늘따라 달랐다면 제 착각일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윈스터와 하워드가 있었으니, 콘라드가 막아서지 않았다 해도 마델레이네 공작은 제게 다가올 수 없었을 거다. 그러니, 고마움 따위를 느낄 것도 없었다.
올리비아가 깔끔하게 마음 정리를 마치는 동안, 에드윈이 갑자기 생각난 듯 윈스터와 하워드를 향해 뒤를 돌았다. 붉은 눈 위로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다.
“맞다. 경들, 나와 했던 내기를 잊지 않았지?”
“무슨 내기, 말씀이십니까?”
윈스터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올리비아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올리비아가 이 콘셉트를 말할 때, 나는 바로 맞을 거라고 했는데 경들이 아닐 수도 있다며?”
기세등등한 에드윈의 말에 두 기사의 얼굴이 억울해졌다. 그리고 기사의 모습에 어긋나게 올리비아를 향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가 언제. 그냥 저는 콘셉트가 워낙 많을 테니 정말 그럴지 모르겠다고만 말씀드렸고. ……칼터 경이 그랬습니다.”
“하워드? 지금 무슨 말을?”
하워드가 냉큼 윈스터한테 화살을 돌렸다. 졸지에 아가씨를 의심하게 된 윈스터가 제대로 말도 못 이었다.
에드윈의 심술과 하워드의 순발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졸지에 윈스터는 억울해졌지만, 올리비아는 기꺼이 윈스터를 곤란에 빠뜨리는 쪽에 올라탔다.
“흐음, 그런 내기를 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냥 콘셉트가 뭔지 짐작도 안 가서……!”
윈스터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하워드와 에드윈이 장난스럽게 주고받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라니. 평소의 처세 좋은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순식간에 이곳을 황궁이 아닌 대공저로 만드는 모습에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벌써, 퇴궁하는 건가요? 아직 본격적인 연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마리아 에텔이었다.
마리아는 급하게 따라 나온 듯 숨을 헐떡이면서도 독기 어린 눈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레오포드를 따라 계속 자리를 비웠던 그녀는 이미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막아서려는 에드윈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마리아 에텔 쪽으로 다가갔다.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천천히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제 옷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듯 마리아 에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재밌는 모습이었다. 초대장에 콘셉트도 적지 않았으면서 혼자 ‘요정’처럼 차려입은 건.
그 차림이 이전 연회 때, 황녀의 의상 후보 중 하나였다는 건 이 중 올리비아와 마리아만 아는 일이었다.
“이, 이건.”
“연회 잘 보았어요. 드레스도 참 예쁘네요.”
덤덤한 말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마리아의 얼굴 위로 붉은 수치심이 올라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요.”
마리아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대답하지 않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이제까지 황녀의 연회를 도맡았으니 그 일이 제게 올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혼자 모르는 척 제게 모든 일을 맡기고 가다니!
그러고 보니…….
마리아는 푸른 눈으로 오늘의 연회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콘셉트를 알리지도 않았는데. 설마, 티아제 궁의 시녀들 중 누군가 올리비아한테 콘셉트를 전달하기라도 한 걸까?
순간 마리아의 심장이 툭 떨어졌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아직도 티아제 궁의 시녀들은 저 대신 올리비아를 따르는 걸까?
“어떻게, 콘셉트를…….”
새파래졌다 붉어졌다, 이제는 새하얗게 질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그리고 마리아 에텔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티아제 궁에 보관해 둔 것을 아주 알뜰하게 썼더군요.”
초대장에 적히지 않은 콘셉트를 유추하는 건 생각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황녀는 절대 여름 연회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아 에텔이 주관하게 될 텐데, 소프론 남작 부인이 있음에도 초대장에 콘셉트조차 적지 않을 정도면 모든 걸 마지막까지 다급하게 결정했을 게 자명했다.
그리고 티아제 궁에 남은 연회 물품 중 거의 완벽하게 남은 콘셉트 물품이 바로 ‘요정의 밤’이었고.
하지만 이 사실을 친절하게 말해 줄 의무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마리아 에텔이 가엾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배신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한 듯 푸른 눈 위로 짙은 모욕감이 올라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늘 제게 악의를 가진 건 마리아 에텔 본인이면서 상대할 때면 그녀는 꼭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제 더는 마주할 필요조차 없었다. 올리비아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냐는 듯한 웃음에 올리비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는 오늘 완벽한 연회를 보냈으니까.
“……다른 날은 몰라도 내일은 꼭 참석해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앙칼진 고함이 들려왔다. 올리비아는 뒤로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올리비아의 뒤를 따라왔다.
“아주 재미난 것을 보여드릴 테니! 꼭 참석하시라고요!”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혼자서 처절하게 외친 마리아가 지독한 원망이 담긴 눈으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한발 늦은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하지만 이미 비칸데르의 문양이 찍힌 마차는 출발한 뒤였다.
* * *
그리고 늦은 밤, 마델레이네 공작저의 올리비아 방.
일기장을 넘기는 소리가 싸늘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다 그렇지, 하면서도 콘라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대 위에 있는 토끼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손이 떨리는 것 같다고 느낄 때였다.
“그래서, 뭐를 말하고 싶은 거냐.”
무심하게 퍼지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콘라드는 망연하게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