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3. 똑같은 사람들 속 의외의 인물 (83/151)


#083. 똑같은 사람들 속 의외의 인물
2022.12.14.


그럴 리가 없지.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 근래 피곤한 일이 많았다고 해도, 어떻게 감히 마델레이네 공녀를 보고 공주를 떠올릴 수가 있었을까.

고작 저 초록색 눈만 닮았을 뿐인데.

황제는 제 마음을 잘 알았다.

제 바람은 공주를 향해서만 뻗었을 뿐, 그 대용은 필요하지 않았다. 진실로 대용 따위가 필요했다면 얼마든지 그와 닮은 이를 황궁으로 들였을 거다.

선대 비칸데르 대공만 없었더라도 진짜 공주를 궁으로 들였을 텐데.

못내 소화하지 못한 분함과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선대 비칸데르 대공, 그리고 저를 끝까지 외면한 공주를 떠올리던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더욱더 공녀는 태자의 옆으로 와야 했다. 어머니인 공주와 닮은 비칸데르 대공이 저처럼 절절한 허망함을, 그리고 헤어 나올 수 없는 비참함을 느껴야 했기에.

이 모든 것은 제 아들 대에서 정리가 되어야 했다. 그 결혼식이 얼마나 달큼하게 빛날지는 상상만으로도 기꺼웠다.

황제의 눈이 점점 묘하게 번뜩였다.


“참, 폐하. 내일 사절단에서 바친 공물을 함께 보시는 건…….”

옆에서 우아하게 말하던 황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함께 사절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황제는 가만히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는 티 내지 않고 황제의 시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올리비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황후는 잠시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곱게 올라가 있던 입매가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황좌의 팔걸이를 잡은 손이 손톱을 세웠다.

그럴 리 없는데. 공녀의 얼굴 위로 아주 잠깐, 초상화 속 그 여자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려한 금발의 여인이라 올리비아 저 천것과 닮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과거 대공비가 궁으로 왔을 때, 그 서늘하던 초록색 눈이 생각난 걸까.

저와 마주치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교만하고 거만한 여인.

올리비아의 천한 초록색 눈을 보며 황후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황제가 그 여인을 얼마나 애틋하게 바라보았는지는 황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분명 황제도 비슷한…….


“황후.”

황제의 나지막한 부름에 황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예. 폐하.”

“마델레이네 공작이 이번 연회 때 공녀를 단단히 가르칠 예정이니. 황후도 태자에게 이야기해서 공녀가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게.”

그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 담백한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황후는 참았던 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다행히 제가 생각한 만큼 최악의 방향은 아니었다. 따져 생각해 보니 선대 대공비와 닮았다면, 현 대공이 올리비아 저 천것에게 청혼을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어찌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제 어미와 일견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그것도 평범한 이도 아니고, 황궁으로 끌려와 이곳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어미라면 더욱더. 어린 시절의 불행을 제 어미와 비슷한 처지인 듯 보이는 올리비아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산이라면 대공은 악취미를 가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반쪽짜리를 약혼녀로 받아들인답시고 제 소중한 딸인 황녀를 거절한 이유는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정말 가엾은 어미와 그에 대한 결핍일 수도 있고, 혹은 선대에 대한 복……!

긴장이 풀려 아무렇게나 뻗어 가던 상상의 끝에서,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믿기지 않게도, 정답에 접근한 느낌에 황후가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설마, 하는 의구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이내 황후의 아름다운 붉은 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붉은 입술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달싹였다. 이 즐거운 이야기가 아직 가설일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황후는 이 가설을 얼마든 사실처럼 꾸며 낼 수 있었다.


“황녀와 한번 이야기를 해야겠어.”

하지만 그 전에.

황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황후는 짜릿한 속내를 숨긴 채 교태롭게 웃으며 황제의 팔을 쓸어내렸다.

돌아보는 황제의 서늘한 눈을 마주하면서 황후는 시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내 자줏빛 와인이 출렁이는 잔이 바로 앞에 놓였다.

그 잔을 들어 올린 황후가 달콤하게 황제를 향해 속살거렸다.


“……황녀는 나중에 부르시고, 우선 연회를 즐기세요. 폐하. 그동안 늘 제국의 번영과 안녕만을 바라셨는데, 하루 정도는 온전히 폐하만을 위한 행복을 바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가?”

“예, 그럼요. 이 연회의 주인인 황녀가 이리 잘 대처하고, 여차하면 든든한 태자가 올 텐데. 이 행복을 저와 함께 누리세요. 폐하.”

기분 좋은 찬사에 황제의 이맛살이 점점 풀어졌다. 이내 황제가 한 번에 와인을 쭉 들이켰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한 술이었다.

* * *

한편, 연회장 가장자리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하던 황녀는 눈앞의 귀족을 바라보는 척 시선을 멀리 뻗었다.

계속 느껴지던 황제의 시선이 끊겼다 했더니, 이제야 황제께서 연회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 있는 황후가 연신 독한 술을 권하는 게 보였다.

이게 정말 무슨 일이람.

늘 마음 편히 즐겨 왔던 연회에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은커녕, 이리저리 눈치나 보고 있다니.

게다가 제가 잠시 마리아 에텔한테 화가 나서 나가 있던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라버니가 아까처럼 화가 나서 나간 걸까.

아니,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이 연회가 파하지 않는 한은 누구한테도 물을 수 없었다.


“비칸데르령은 현재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 일체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황제의 시선도 겨우 버텼다.

아까 대공이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제가 비칸데르령의 폐광산 조사를 갔다 온 건 기정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아, 초조함이 드러날까 황녀는 평소보다 더 입꼬리를 올렸다.

요정 콘셉트로 꾸민 화려한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환한 웃음이 유난히 어색해 보였지만, 앞에 선 귀족들은 내색 하나 없이 황녀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연회입니다. 이번 연회도 준비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요.”

의례적인 인사말이었지만, 황녀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누가 봐도 이전의 연회 콘셉트와 똑같은 연회인데.

말을 한 귀족도 제 실수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아한 왈츠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잠시 침묵에 휩싸였던 귀족들은 한 번에 어색한 웃음을 토해 내며 빠르게 말을 돌렸다.


“제국의 여름 연회에 대한 소문이 뻗어 나가 이번에 헤페르티에서도 사절단을 보냈다면서요?”

“내일부터 함께 연회를 즐긴다는데. 전쟁 복구로 여념이 없는 헤페르티가 우리를 얼마나 우러러볼지가 기대됩니다.”

“그렇, 겠죠?”

이런 한 번 한 번이 쌓여 후일 제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참기는 쉽지 않았다. 황녀가 불편한 심기를 참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너그럽게 말실수를 한 귀족한테도 미소를 보내자 한 곳에서 “역시, 성녀 같으신 황녀 전하.”라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쯤 하면 됐다.

아무리 이전 연회와 콘셉트가 겹쳐도 이제까지 쌓은 황녀의 명성에 크게 오점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었고, 방금 귀족들의 환심까지 샀다.

이제 올리비아 저 천것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입꼬리에 경련 날 정도로 웃으면서 기회를 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비칸데르의 문양이 찍힌 제복을 입은 기사 두 명은 호위하듯 서늘한 적의를 내뿜고 있었고, 그 사이에 둘러싸인 올리비아는 대공과 춤을 추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연회장 가장자리에 혼자 서 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누구보다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혹하게 만드는 대공의 다정한 에스코트까지.

이 연회의 주인은 황녀 자신이건만, 꼭 주인인 양 행동하는 게 눈꼴사나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저 자리는 제 자리였다.

저를 속이고 폐광산을 앗아간 올리비아 따위의 것이 아니라……!

부아가 끓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화가 나는 것을 애써 참으며 황녀는 올리비아 쪽을 길게 바라보았다. 마뜩잖은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귀족들은 한 마디씩 황녀의 마음에 동조했다.


“그런데, 공녀는 오늘따라 심하게 들뜬 모양입니다.”

“하긴. 파트너가 있으니 저 모양이지요. 여태껏 파트너도 없이 매번 혼자만 왔지 않습니까.”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귀족들의 화법에 비웃음과 비난이 섞였다. 이 정도면 연회의 주인으로서도 경고를 주기에 마땅했다.

공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핑계가 생기자마자 황녀는 기품 있게 대화를 중단했다. 그리고 공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아한테 가서 연회는 즐겁냐는 인사와 함께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귀족들은 모두 제가 엄중한 경고를 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참에 폐광산에 대해 말하며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끼얹는다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착착 끼워 맞춰지는 생각에 걸음이 점점 조급해지던 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건네 온 인사에 황녀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제이드 마델레이네였다. 하필 속이 타고 애가 닳는 지금 나타나다니. 그것도 달갑지도 않은 상대가.

저를 그렇게 응접실에 두고 무례하게 나갔던 게 바로 전인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예를 갖추는 꼴이라니.


“네, 경. 반가워요.”

하지만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둘째 공자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도 올리비아가 저렇게 날뛰느라 마델레이네 모두에게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황녀는 제게 꽂히는 시선들이 배로 늘어난 것을 느끼며 평소처럼 인사를 받았다. 예를 갖췄으면 물러나는 게 기사의 덕목이니 제이드 마델레이네 역시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그런가요? 감사해요. 경. 경도 오늘따라 더 늠름하시네요.”

“연회의 콘셉트는 어떤 식으로 잡으십니까?”

“네?”

황녀는 거칠게 나가려던 말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애써 눈매를 곱게 휘며 응대했다.


“아. 연회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저쪽에 가셔서.”

“송구하오나 황녀 전하께 듣고 싶습니다.”

예법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린 채 말을 거는 모습이 어딘가 수상했다. 마치 제게서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듯, 혹은 시선을 돌리려는 것처럼.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황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엄 있는 황녀의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연신 딱딱한 태도로 말을 붙이는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귀족들이 다가오던 때였다.


“전하께서는 어떤, 아.”

의식적으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던 제이드가 나지막한 신음을 떨궜다. 그리고 황녀를 앞에 둔 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당황한 숨소리를 뱉었다.

황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곧이어 그녀의 붉은 입매에 얄팍한 웃음이 스쳤다 사라졌다.

이제야 확실해졌다.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제 앞을 막아선 이유.

저기 있는 올리비아, 저 천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하지만 지금 마델레이네 공작이 올리비아한테 다가가고 있었다. 한발 늦은 제이드가 황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아무리 봐도 공작이 더 빨랐다.

차라리 잘되었다. 공작이라면 올리비아 저것을 당장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를 쓸 테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녀의 미간이 순간 사납게 구겨졌다.

걸음을 만류하듯 공작의 앞에 끼어든 남자가 있었다.

콘라드 마델레이네.

의외의 인물의 등장이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의 행보를 주시하던 에드윈의 입술 끝이 슬쩍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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