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2. 소문이 느린 아비와 아들 (82/151)


#082. 소문이 느린 아비와 아들
2022.12.11.


공녀가 연회장에 나타났다는 보고에 황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황후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비칸데르의 백수정 광산을 꼼꼼히 확인한 황녀는 늘 그렇듯 이번 여름 연회도 성공적으로 끝낼 것이었다.

또한 마델레이네 공작가와 태자는 빠른 시일 내로 다시 공녀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모든 게 완벽했다.

……연회장으로 가는 복도로 들어서던 때,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오는 황녀를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나오던 황녀 역시 깜짝 놀란 듯 황제와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사르르 웃으며 예를 갖췄다. 낭랑한 인사말이 복도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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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를 뵙습니다. 아름다운 밤에 연회를 통해 두 폐하를 뵐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황제는 인사를 받는 대신 주변을 훑어보았다. 연회가 시작된 터라, 멀찍이 보이는 연회장 문 앞에 선 이들은 귀족이 아닌 시종들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웃는 입매를 유지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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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를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 황녀. 그런데 어찌 연회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있어.”

얼핏 듣기로는 황녀의 사교 생활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녀는 황제의 눈이 웃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등 뒤로 한기가 몰려왔다. 눈썰미 좋은 황제는 연회장에 입장하는 순간, 연회의 콘셉트가 지난번과 동일하다는 것을 파악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진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황녀는 내색하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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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하신 두 폐하께서 오시지 않아 잠시 제가 나와 보았습니다. 모든 이가 연회의 주인인 저만큼이나 두 폐하의 등장을 바라고 있는 터라 제가 그 마음만 헤아리다 보니 생각이 짧았습니다.”

매끄러운 말에 황제는 잠시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나오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행동과 말이 다른 모습에 스멀스멀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내 옆에 있던 황후가 나긋하게 황제의 팔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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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황녀가 저리 말하는데, 어서 입장하셔야지요. 모든 귀족들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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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선 들어가야지.”

찜찜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황제는 황후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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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연회장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사납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황제는 고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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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소란이야!”

연회장 한가운데.

귀족들이 원을 그리듯 둘러싼 곳에 태자와 마리아 에텔. 그리고 공녀와 대공이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태자의 얼굴과 달리 대공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제 개를 상대로 태자가 품위를 잃고 성을 내다니. 그것도 여유롭게 웃는 제 개 앞에서.

찬물을 끼얹은 듯, 귀족들이 어수선하게 황제와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찌할 바 모르는 시종이 황제와 황후의 입장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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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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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과 달께 경배를.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번잡하게 이곳저곳에서 예를 갖추는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뻣뻣한 몸짓들이 마치 저잣거리의 평민들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페르티와 타국의 사절단들이 내일부터 연회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말없이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당혹스러워하며 허둥대는 이곳에서 태연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영웅 전쟁이자 황제가 목줄을 쥔 개는 놀랍게도 아름다운 얼굴로 태연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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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입니다. 초대받아서 온 연회에 이 무슨…….”

제 개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황제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공녀의 얼굴 또한 단단해 보였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날 선 태도의 태자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마리아 에텔과는 정반대로.

비칸데르령에 있던 수십 일의 시간 동안 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태자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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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잠시 의견이 갈려 입장에 소란을 끼쳤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완벽히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잇새로 나오는 말이 거칠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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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오겠습니다.”

고개를 든 레오포드가 성큼성큼 테라스 쪽으로 향하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리아 에텔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연회에서 첫 춤을 시작해야 할 태자가 나가다니.

감히 누구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았다. 우아하던 선율마저 뚝 끊긴 연회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이번 연회의 첫 춤을 시작하는 이도 대공이 되는 것일까.

귀족들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그때야 전쟁 영웅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대공과 황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황녀 역시 제가 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

태자가 나간 이상, 서열상 첫 춤을 시작해야 할 이는 황녀였다. 하지만 미혼이자 연회의 주인인 황녀는 고정 파트너 없이 연회에 왔다.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그림은 황녀가 대공과 첫 춤을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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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의 주인인 황녀가 첫 춤을 시작하지. 대공이 함께해 주게. 안 그래도 이번에 황녀의 방문을 맞이하며 수고로웠을 텐데. 돈독했던 지난날의 정이 있으니 춤 한 곡 정도의 해후는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황제가 위엄 있게 말했다. 목소리에 마뜩잖은 감정이 묻어났지만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는 은근히 대공과 황녀를 엮어 이야기했다. 황족과 대공은 언제나 끈끈한 사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계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녀가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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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하오나…….”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화가 치미는데 기름까지 붓는 대공의 말에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대공이 유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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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전하의 말에 따르면, 제가 방울 단 고양이만큼이나 귀염을 떨고 있는 중이라. 주인의 눈 바깥에 날 짓은 하질 않습니다.”

방울을 단 고양이와 주인이라니.

황제는 대번에 대공이 지칭하는 주인이 공녀라는 것을 알아챘다. 표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미는 화에 황제는 입매를 굳혔다.

감히, 대공이. 제 개가 태자의 약혼녀를 주인으로 말하다니. 백수정 광산이 황녀에게 속한 한, 비칸데르령과 대공은 제 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황녀의 입지가 우스워지게 된다. 황제가 불쾌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대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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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황녀 전하가 언제 비칸데르령에 방문하셨다는 말씀이신지. 제가 곡해한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비칸데르령은 현재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 일체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의뭉스러운 목소리와 동시에 황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출입을 금한다는 말에서 이미 노기로 가득했던 황제는 그 기색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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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조심하게 대공! 이 제국에서 황족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란 말인가. 특히나 황녀가 다녀온 곳은 황녀의 소유지인데!”

발칵 성을 내는 황제는 문득 목덜미가 스산해졌다. 빤히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이 느슨하게 휘어졌다.

아하.

듣기 좋은 음색이 구태여 표시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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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황제가 모르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황제가 그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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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델레이네 소공작과 첫 춤을 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폐하.”

황녀가 몸을 굽혔다. 사색이 된 황녀의 얼굴에 황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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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이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의 허가에 황녀는 빠른 걸음으로 콘라드 마델레이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억지로 끌고 가 연회장의 한가운데에 섰다.

한 박자 늦게 춤곡이 시작했다. 제대로 춤을 시작하지 못한 귀족들은 선율과 맞지 않는 춤을 이어 나갔다.

이토록 엉망인 연회라니.

그 와중에서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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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느린 건 아비나 아들이나 다 똑같나 봐요. 올리비아.”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는 에드윈의 모습에도 올리비아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갑자기 터진 일에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여러 정보들에 혼란스러웠다.

황제까지 황녀의 백수정 광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라든지, 비칸데르령이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출입을 금한다는 이야기라든지.

하지만 해사한 에드윈은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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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연회가 즐거울 줄이야. 오지 않았으면 아쉬울 뻔했어요.”

아이처럼 들뜬 모습에 올리비아는 머릿속에 고여 있던 생각들을 털어 버렸다. 그래. 여기는 연회였다. 아무리 생각해 봤자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은 저택에 가서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에드윈은 연회장을 나서 둘만의 데이트를 가고 싶다는 아까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즐겁다니 되었다.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따라 웃는 사이, 다정한 눈이 휘어지며 올리비아를 향해 격식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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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내민 손에 올리비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초록 눈 위로 언뜻 짓궂은 장난기가 스쳐 간다고 느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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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곡이요?”

순간 에드윈은 눈을 깜빡였다. 의례적인 춤 신청이었지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승전 연회 당시 윈스터에게 투덜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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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곡은 도대체 왜 시간이 정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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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를 바꿔야 하니까요.”

 
지금 올리비아의 말은 그 의례적인 예법을 전복시켰다.

누구보다도 예법에 충실한 올리비아가.

멍한 에드윈을 눈짓하며, 올리비아는 새침하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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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청하시는 태도가 심히 아쉽네요. 제게 배포를 키우라 말씀하셨던 분답지 않아요.”

올리비아의 눈이 도발적으로 반짝이자, 에드윈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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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올리비아의 배포에 맞춰서.”

늘 갑갑한 갈증 위로 달콤한 유혹 한 방울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진심으로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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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회의 모든 곡의 춤을 미리 청해 두어도 되겠습니까, 올리비아.”

다시 내민 손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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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라면. 제 첫 곡부터 함께하시기에 충분하시네요.”

 

* * *

마리아가 테라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복도 가득하게 아름다운 선율이 울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연회장에서 중심이 되는 건 저와 레오포드여야 했는데.

첫 춤곡을 이렇게 놓쳐 버리다니.

하지만 다시 테라스 안으로 들어가 레오포드를 조를 수도 없었다.

조금 전 테라스에서 묻어나온 독한 시가 연기가 흩어졌다. 동시에 레오포드와의 대화가 사라지지 않고 엉망이 된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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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요, 레오포드. 대공이 저 연회를 차지하게 두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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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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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레오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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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니. 좀 나가겠어? 그따위 춤이 뭐 그리 대수라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대화에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혼자 돌아간다면 연회장의 비웃음은 모두 제 차지가 될 것이었다. 아무 응접실에나 들어가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 처지라니.

비참한 마음에 응접실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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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에텔 영애는 뭐가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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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새처럼 굴 때부터 알아봤어. 태자 전하께서는 공녀를 바라보시는데, 뭘.”

복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모습을 숨겼다. 당장 지금이라도 함부로 지껄이는 이들의 위로 뜨거운 찻물이라도 붓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참아 내야 했다.

지금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정식으로 발표된 약혼녀이기만 했어도.

역시 오늘 제 약혼식을 치렀어야 했는데. 모두의 앞에서 제 자리를 공고히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드레스 완성이 버거워서 날을 넉넉히 잡은 게 한이었다.

지금이라도 일정을 당겨야겠다. 태자의 하나뿐인 약혼녀 자리. 그 자리가 이 마리아 에텔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의 앞에서 공표해야 했다.

푸른 눈 위로 위태로운 치기가 아른거렸다. 절대로 놓지 못할 탐욕들이 가득 차올랐다.

* * *

그리고 그 시각, 성대한 연회장.

황제는 날카로운 눈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늘 귀족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분위기를 휘어잡던 황녀는 오늘따라 어수선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바다 빛 눈동자는 황제의 눈치를 보는 동시에 다른 곳을 바쁘게 오갔다.

황제는 황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 있는 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는 걸까.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언뜻 황제와 마주쳤을 때.

믿을 수 없게도.

지금 공녀의 모습은 제가 그토록 바랐던, 로웰의 공주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놀란 황제가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닮은 모습이라고는 초록 눈이 전부인, 황제가 알던 공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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