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방울을 단, 순진한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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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방울을 단, 순진한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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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방울을 단, 순진한 대공 전하
2022.12.07.
그럴 리 없다.
마지막에 티아제 궁에서 봤을 때도 올리비아는 제게 흔들리던 얼굴이었다.
가당치도 않게 티아제 궁으로 대공을 부르더니, 저를 뒤로한 채 나가긴 했어도 질투를 드러내던 말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런데. 애칭을 부르지 말라고?
이 상황을 이해하는 동시에 레오포드는 눈앞의 올리비아가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환상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었다.
늘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던 환한 드레스 차림이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게.
수많은 보석들보다 더 찬란히 반짝일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 무감각한 게.
레오포드는 애써 입술 끝을 올렸다. 그리고 느른하게 어깨를 젖히며 여유롭게 답했다.
“……그럴 수는 없지.”
올리비아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정도, 바람도 없는 눈이 낯선 동시에 마음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예상 밖이긴 했다. 다시 저 눈이 반짝거리면서 애정을 갈구하듯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볼 수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포드는 지금 이 상황이 크게 문제 되는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장장 십일 년이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저를 사랑한 시간이.
그러니 올리비아를 다독이기 위해 제가 다시 티아제 궁을 되돌린 노력을 안다면 올리비아는 쉽사리 제게 넘어올 것이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한테 직접 듣는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면서 레오포드는 느슨히 웃었다.
“잠시간 자리를 비운다 해도 내 옆자리의 주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 비울 때와 똑같은 모습의 태자비 궁이 기다리고 있어.”
유려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티아제 궁을 떠올렸다.
제 것인 줄 알았던. 제 것이 아니었던 궁.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집착적으로 궁을 가꿨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 궁은 제 것이 아니었고, 저는 이제 수많은 것을 가졌으니까.
새삼스레 올리비아는 스스로가 가진 것들을 상기했다. 그러는 사이, 시야 너머로 저를 노려보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에텔 영애가 전하를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담담한 올리비아의 모습은 레오포드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레오포드는 제가 한 말이 올리비아로 하여금 비칸데르령을 떠올리게 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
왈칵 치미는 짜증과 더불어 레오포드는 반사적으로 올리비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차려입은 분홍색 드레스보다 훨씬 더 붉은 얼굴의 마리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양이처럼 날 선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제 마음을 약하게 할 때마다 마리아가 짓던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레오포드는 올리비아를 놓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애가 끓었다. 입이 마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가 저를 칼같이 자르던 올리비아를 향해 다시 입술을 열려 할 때였다.
미처 들리지 않던 귀족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전하께서 공녀한테 거절당하신 건가요?”
“에텔 영애는 저기 뒤에 두시고. 정말 일 년간의 유예 뒤에 공녀가 다시 태자비가 되는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요. 공녀는 지금 반지를 끼고 있는데요? 대공 전하와 똑같은?”
뒤늦게 신경 쓰이는 목소리들 사이로 들린 말에 레오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반지라니.
황급히 바라본 올리비아와 대공의 손에 똑같이 생긴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그 반지를 보자마자 매캐한 연기를 마신 것처럼 속이 울렁이다 못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눈앞이 시뻘겋게 번질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붉은 보석 반지라니.
분명 약혼을 한 건 공녀와 저였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반지를 낀 적 없었던 올리비아가 반지라니!
분노가 뒤섞인 날카로운 기운에 마리아는 얼른 레오포드 쪽으로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태자를 염려하는 듯한 모습에 귀족들은 잠시간 마리아한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레오포드를 걱정하는 얼굴 아래로도 오물이 묻은 것처럼 진득한 모욕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 천것의 애칭을 부른 것으로도 모자라 당신의 옆자리가 올리비아를 기다리고 있다니. 어떻게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수치스러움으로 바들바들 손끝이 떨리는 건 조금 뒤에 진정할 일이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주도해 가라앉힌다면 우스워진 제 꼴을 복원할 수 있었다.
“레오포드, 진정하세요. 어차피 계속 애칭을 부르실 사이도 아니고. 그저 대공을 도발하기 위함이셨잖아요.”
마리아의 속삭임에 간절함이 섞였다. 하지만 레오포드의 온 신경은 이 틈을 타 완벽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는 올리비아와 대공에게 쏠렸다.
감히 제 약혼녀와 팔을 맞댄 채 우월감에 차오른 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뒷모습을 노려보는 순간,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이 마주치고도 냉담한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며 심장 한편이 욱신거렸다.
이건 아니다.
몰아치는 치욕감에 레오포드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 수모를 대갚음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의 화살은, 늘 향했던 올리비아가 아니었다. 걸음을 옮기는 에드윈의 모습이 느리게 그의 시선에 포착된 순간.
대공의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아주 옅게, 음악 선율 사이로 톡 튀는 짤랑대는 방울 소리가 들렸다.
이거였다.
“……이 소리는 뭔가? 설마 이곳에 고양이가 있을 리 만무한데.”
고양이? 어디에선가 방울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귀족들과 달리 올리비아는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레오포드는 탁하게 내뱉었다.
“대공이라는 작위에 비해 하는 짓이 참 하잘것없군. 오른쪽 발목인가, 왼쪽 발목인가.”
잠시간 일그러졌던 얼굴이 근사하게 웃으며 대공을 조롱했다.
그제야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퍼졌다. 눈을 깜빡이는 올리비아와 달리 대공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무심한 모습은 레오포드의 고고한 자존심에 남은 상처를 더욱 벌렸다.
감히. 제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모자라, 아버지인 황제 폐하의 개 주제에 저를 빤히 바라보다니.
“방울 단 고양이처럼 애교라도 떠는 건가? 세상에.”
대공을 고양이라 지칭하다니. 과장되게 혀끝을 쯧쯧, 차는 레오포드의 목소리에 귀족들 사이에서 킥, 비웃음이 터졌다.
다시 분위기는 레오포드 쪽으로 기울었다. 레오포드는 제 팔에 매달린 마리아를 그대로 데리고 올리비아와 대공 쪽으로 걸어갔다.
지고한 태자의 행보를 기대하듯 귀족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중복된 여름 연회의 콘셉트보다는 이쪽이 훨씬 흥미로웠다.
심지어 이 자극적인 연극 주역이 작은 태양인 태자와 전쟁 영웅인 대공이라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귀족들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태자와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느릿하게 올리비아와 대공을 바라보았다. 바투 다가가자 언뜻 코끝 위로 포근하고 아찔한 향이 났다.
그 익숙한 향에 레오포드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가까이 갈수록 물씬 다가오는 저 향은 저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저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초록 눈은 불안스레 떨리는 대신 다시 반짝여야 했다. 그래서 레오포드는 딱 대공과 올리비아 사이에서만 들릴 정도로 낮게 비웃었다.
“……꼭 창부나 할 법한 일이군.”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켜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가 바라던 대로가 아니었다. 모욕감에 얼굴을 붉혀야 할 대공은 멀쩡했고, 올리비아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꼭 창부나 할 법한 일이군.”
레오포드의 말이 에드윈과 제 사이로 쏟아진 순간, 올리비아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태자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열했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올리비아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제가 만들어 준 실 발찌가 에드윈을 공격하는 도구가 될 줄 몰랐다.
저를 향한 모욕이야 익숙했지만, 에드윈한테까지 그 모욕이 번져서는 안 되었다. 선을 넘은 태자의 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단단하게 만들걸. 아니면 방울 안에 밀랍을 더 넣을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에드윈이 지금 어떤 표정일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예쁨받으려 아양을 떨긴 했는데.”
단단하게 제 손을 지탱해 주던 에드윈의 팔이 드러난 어깨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긴장을 풀어 주는 다정한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 아가씨께서도 눈치채지 못한 걸 전하가 먼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올리비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 아니, 오히려 즐겁다는 듯 에드윈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올리비아가 천천히 긴장을 풀어 가는 것을 확인하며 그녀를 끈기 있게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태자를 향했다.
“그리고.”
에드윈은 입꼬리를 시리게 올렸다.
“방울을 단 이가 고양이인지, 호랑이인지 구분조차 못 할 자가 이 연회장 내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나직하게 퍼지는 목소리 위로 서늘한 위압감이 쏟아졌다. 마치 일그러지는 태자의 얼굴을 농락하듯 어깨를 으쓱인 대공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태자와 눈을 마주친 채 빙그레 웃었다.
“……제가 이곳을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입니다. 전하.”
고혹적으로 올라간 눈매가 이내 사르르 접혔다.
그 뒤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기사 두엇이 보였다.
제복 위로 비칸데르의 문양이 찍힌 놈들.
“……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전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갑니다. 세상에, 창부들이 발목에 방울을 달다니. 전혀 몰랐는데.”
그 한마디에 귀족들은 태자가 몸을 기울였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대공은 그들이 수군거릴 틈조차 주지 않고 덧붙였다.
“내가 워낙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만 돌아서,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을 듣긴 합니다.”
거짓말.
귀족들은 잠시 멍하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순진하다는 말과 대척점에 있을 법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대공은 다시 한순간에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래서 내가 명예를 바친 아가씨께서 대공령에 도착하자마자 이런저런 큰일을 도맡고 계시죠.”
나긋하게 퍼지는 음성에 귀족들은 사교계로 스며들던 소문을 떠올렸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지지부진하게 끌던 비칸데르의 부랑자 거리를 싹 정리했다더라.
그 어떤 레이디에게도 맹세를 바치지 않는 콧대 높은 비칸데르의 기사들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게 명예를 바쳤다더라.
그녀가 나갈 때마다 산이 떠나갈 듯 환호가 퍼진다더라 등.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비칸데르령의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귀족들은 이 엄청난 소문들 뒤로 따라붙던 묘한 소문을 하나 더 떠올렸다.
비칸데르령으로 떠났다던 황녀가 비칸데르령에 당도하기는커녕…….
알음알음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는 사이, 에드윈은 태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멍한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소문이 많이 느린 편인가 봅니다, 전하. 하긴, 몰랐으니 그리 귀찮게 굴었겠죠.”
한마디 했다고 금세 사납게 치켜뜨는 눈매가 우스웠다. 모르는 것도 많은 태자. 가장 빛나는 귀한 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이.
에드윈은 없는 자비를 끌어내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태자가 했던 것처럼 태자와 마리아 에텔 사이로 몸을 숙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에드윈은 그 둘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러니, 바쁘고 존경받는 내 아가씨 귀찮게 편지 보내는 일은. 더는 없는 겁니다. 순진하지 않은, 전하?”
“대공!”
“이게 무슨 소란이야!”
레오포드의 목소리 위로 쩌렁쩌렁한 노성이 울려 퍼졌다. 그제야 귀족들은 당황해하며 무작정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 드십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시종의 뒤늦은 고함이 이 상황을 더욱 우습게 만들었다.
연회의 즐거운 분위기가 단번에 깨졌다.
단 한 명,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대공만이 아름다운 얼굴로 태연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초대받아서 온 연회에 이 무슨…….”
남 일 대하듯 혀를 차는 가벼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대공의 붉은 눈 위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