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0. 허락하지 않은 이름 (80/151)


#080. 허락하지 않은 이름
2022.12.04.


어둑한 저녁의 황궁.

연회장 앞에 마차가 멈추었다. 올리비아는 숨을 흡 하고 참았다가 소리 죽여 내쉬었다. 제도에 도착했을 때도 묘하게 긴장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울렁거리지는 않았다.


“많이 긴장돼요?”

최대한 티를 안 내고 싶었는데. 다정한 걱정을 부인하려던 올리비아의 시선에 에드윈의 눈이 맞닿았다. 버릇처럼 아니라고 하려던 말이 멎었다.

기다리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늘따라 환한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

한쪽으로 넘긴 머리카락이 멋지고 또 심장 아릴 정도로 설레어서.

올리비아는 멍하니 이어진 시선을 놓지 못했다. 그때, 어디에선가 딸랑-. 방울 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침을 떼며 웃었다.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아요.”

가만히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이 흐음, 작게 탁음을 흘렸다. 검지로 턱선을 쓸어내린 에드윈은 연회장을 향해 무심한 눈길을 주었다. 그러다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짐짓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어차피 헤페르티 사절단도 내일부터 연회에 참석한다 하던데. 어때요? 지금이라도 나와 다른 곳으로 데이트를 가는 건?”

달콤한 권유였다. 아주 조금 혹할 만큼.


“음……. 상당히 끌리지만 안 되겠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올리비아는 보았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시다시피, 오늘 저는 이 연회 참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꾸몄거든요.”

깨끗한 창문 위로 올리비아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뻐기는 듯한 말이었지만, 에드윈은 진지한 얼굴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쑥스러웠지만, 올리비아는 말을 거두지 않았다.


“아가씨. 진짜로 요정 같으세요. 아니, 요정들의 여왕이요.”

 
불쑥 해나의 감탄이 떠올랐다. 자신은 어제부터, 아니 비칸데르에서 수도에 온 순간부터 저를 꾸미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 이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은 금물이었다.


“그리고 에드윈은 연회에 참석해야죠. 아무리 사절단이 내일부터라 해도 귀족 회의에서 볼 귀족들과도 한 번씩 안면을 익히면 더 좋고요.”

……물론 조금 부끄러운 마음에 빠르게 말을 돌리긴 해도 말이다.

올리비아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에드윈은 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할 수도 있겠는데요?”

“잠시, 잖아요.”

똑 부러지게도 말한다. 눈을 둥글게 휜 채 웃는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저렇게 저를 향해 믿음 가득한 눈을 할 때마다, 에드윈은 그 믿음이 고마우면서도 가슴 안쪽에 불덩이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이 연회장 안에 있을 놈들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올리비아한테 밝히지 않은 선대의 이야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올리비아의 말대로예요. 떨어져 있어도 아주 잠시일 거예요.”

에드윈이 빙그레 웃으며 올리비아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딸랑-. 방울 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그 잠시 후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곧 올리비아 곁으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

고혹적인 목소리는 마치 주문 같았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결이 다른 이유로 인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시종이 올리비아와 에드윈을 바라보며 허겁지겁 인사했다.


“전, 전쟁 영웅이신 비칸데르 대공 전하, 그리고 마델레이네 공녀님을 뵙습니다.”

마델레이네 공녀.

시종이 허리를 깊게 굽힌 사이, 올리비아는 잠시 저를 명명한 호칭을 곱씹었다.

비칸데르령에 있는 동안 듣지 못해서일까. 십사 년을 들어 왔던 단어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제가 아닌 타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그제야 올리비아는 제가 이질감을 느낀 부분을 알아챘다. 그러는 사이, 시종이 몸을 편 채 빠르게 말했다.


“바로 안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마델레이네 공녀 말고.”

우아한 목소리가 힘 있게 뻗어 나왔다.

서두르던 시종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운 목소리 기저에 깔린 위압감에 압도당한 그가 뒤를 돌아보며 제가 들은 것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마델레이네 공녀로 지칭되던 올리비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확언했다.


“‘올리비아’로. 그렇게 알려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델레이네 성을 떼 버린다고.

처음 있는 일에 시종은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이내 시종은 초록 눈에 담긴 묘한 기운에 이끌리듯 열린 문을 향해 외쳤다.

언뜻 본 대공의 입매에 고였던 붉은 웃음이 아주 짙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외친 다음에야 생각이 났다.

* * *



“전쟁 영웅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대공 전하, 그리고 올리비아 마델, 아니 올리비아 아가씨 입장하십니다!”

쩌렁하게 퍼지는 시종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문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 시끄럽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악에 빠져들어 연주를 하던 연주자들도 이상하게 바뀐 분위기에 하나둘 주변을 살폈다. 풍성하던 선율이 하나둘 빠지더니 이내 연회장은 적막해졌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전부인 곳에서.

귀족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연회장을 걸어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흰 얼굴과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 눈의 색채 대비가 뚜렷한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압도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의 위압감에도 결코 눌리지 않는 여자가 그 바로 옆에 있었다.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 모두의 시선을 휘어잡았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때의 아름다움은 우연이었겠지, 라며 공녀에 대한 찬사를 깎아내리던 사람들은 입술에 아교를 바른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공의 옆에 선 공녀는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초연하고 사라질 듯 아슬아슬한 청초함이 있던 지난번과 달리 지금 눈앞에 선 공녀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굵게 땋아 올린 머리 아래로 희게 드러난 가냘픈 목덜미. 느슨하게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린 은발은 아슬아슬하게 쇄골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목에 건 반짝이는 백수정 목걸이와 단정한 보석들은 고혹적인 요정들의 여왕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려하고 우아한 얼굴 속 신비로운 초록 눈이 깜빡거렸다.

그제야 귀족들은 잊었던 호흡을 내쉬며 공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연회장을 장악한 공녀의 등장은 귀족들의 머릿속에 진정한 연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각인시켰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지만 모두가 알아챈.

연회의 주인.

.
.
.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올리비아는 연회장을 훑어보았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얼굴들이 있었다.

테라스 근처에 있는 마델레이네 공작과 콘라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제이드.

그리고 경악하듯 저를 노려보는 마리아 에텔과 태자.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잔불처럼 올라왔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마차에서 걱정하던 것만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남이었으니까.

대신 올리비아는 이 조용한 연회장 속 제게 쏠리는 이목들을 느꼈다. 적의로 가득 찼던 예전과 달리 어딘가 묘한 시선들이었다.

올리비아는 에드윈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다들 제가 ‘올리비아’로 소개되어 놀랐나 봐요.”

마차에서 이야기한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하지만 에드윈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여상한 투로 그녀의 말을 넘겼다.


“공식적인 자리이니, 놀랐을 수도 있겠네요. 괜찮겠어요? 모두가 올리비아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려 할 텐데.”

물론 그렇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에드윈은 속내를 감추며 물었다.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연회장에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 화사하던 얼굴이 날카롭게 웃었다.


“……저는. 오늘 이 연회장에서 보는 이들에게 제 이름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요.”

이곳에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줄 친근한 상대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올리비아는 다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혹시나 제가 비칸데르를 대신해서 사교 활동을 해야 한다면, 그건 1년 뒤에.”

립스틱을 완벽하게 칠한 입술이 잠시 달싹였다.


“……혼인을 한 뒤, 대공비가 되어서 할게요.”

그때라면, 비칸데르 대공비. 혹은 대공비 전하라는 호칭이 저를 대신할 테니까. 올리비아는 입속으로 대공비, 세 글자를 중얼거렸다.

아직은 낯설었지만 묘하게 닿고 싶은 단어였다.


“……알면서 그러죠?”

“뭘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피하는 얼굴이 미치도록 예뻤다. 아까도 더 예쁠 수 없을 만큼 예뻤는데. 이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만 같이 아찔해졌다.

에드윈은 한숨을 삼키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이라도 비칸데르령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제 공간에 단둘이 존재하고 싶었다.

진심을 토해 낸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올리비아가 조금 웃었다.

어차피 에드윈은 모든 순간의 올리비아를 이길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훌륭히 에스코트해 내는 것이었다.

대공과 올리비아가 걸을 때마다 희미하게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새로 연주를 시작한 연주자들이 만든 선율 아래로 묻혔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움튼 봄처럼 하나둘 올리비아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큼성큼 달려오듯 걷는 이가 눈에 띄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잘생긴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올리비아, 리브!”

올리비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연회장의 누구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가장 불리고 싶지 않은 이에 의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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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레오포드는 전신에 희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떼는 게 아쉬울 정도로 달큼한 시선이 떨어지고 그는 아쉬움과 동시에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진작 저러고 다녔으면 좋았을 것을.

올리비아가 이 연회에 참석을 했다는 것은 다시 제게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받지 않은 연락 때문에 짜증스러웠지만, 오늘 저 모습에 레오포드는 너그러이 용서해 줄 마음이 들었다.


“레오,”

순간 제 팔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레오포드는 감흥 없이 마리아 에텔을 뿌리쳤다. 뒤통수에 상처받은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마리아야 나중에 달콤한 말로 달래 주면 그만이었다.

모든 게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레오포드는 이 연회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 리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건 제게만 주어진 권한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자그마한 얼굴이 레오포드를 바라본 순간, 예민한 본능이 그의 신경을 묘하게 건드렸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유려한 인사말에 레오포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간식 받은 강아지처럼 웃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여전히 딱딱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마지막 인사가 이상했어도, 오랜만에 만나는 약혼자한테 보일 법한 태도는 아니었다.

이 이상한 기분이 거리감을 두듯 인사를 하는 올리비아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를 지키듯 바로 옆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대공 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덜컥 레오포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그 순간, 올리비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송구하지만 앞으로 저를 부르실 때 애칭은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올라가 있던 레오포드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레오포드는 가만히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향한 곧은 시선이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의 새파란 눈동자 위로 거대한 일렁임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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