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사랑스러운 연인의 자리
2022.11.27.



　


“태자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시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소프론 남작 부인은 황급히 침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 뒤를 따라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태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창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의 투레질 소리가 가까워졌다. 마리아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시녀가 다가와 베개를 편하게 고쳐 주었다. 우물쭈물하는 게 마리아의 눈치를 살피는 티가 났다.

이거였다.

마리아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이 가슴 벅차도록 황홀한 우월감.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랫것한테는 가차 없이 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이렇게나 확실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내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너그러이 대하려던 제가 어리석었다.


“바깥에 있는 시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근신하라고 해요.”

“예.”

고개를 숙인 시녀가 침실 바깥으로 나갔다. 시녀는 더 이상 저를 향해 ‘영애’라 칭하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하게 굴러갔다. 목이 뻣뻣한 소프론 남작 부인도 제게 고개를 숙였다. 공손치 않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금단의 구역이어서 들어올 수 없었던 이 ‘태자비’의 침실도.


“거긴, 마델레이네 공녀도 못 들어갔던,”

　
문득, 제가 이 방을 요구했던 조금 전이 생각났다. 동시에 당황이 역력하던 시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군말 없이 침실로 안내해 주었던 소프론 남작 부인의 딱딱한 얼굴도.

이제 레오포드만 이 상황에 대해 알게 되면 제 할 일은 끝이 났다.

어느새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티아제 궁의 지붕을 물들였다. 제 반짝이는 금발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벌컥, 침실이 열렸다.

이럴 사람은 단연 한 명밖에 없었다. 제가 심장 떨릴 정도로 사랑하는 연인.


“레오포드!”

마리아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반가움과 서러움, 그리고 투정이 교차했다. 얼른 와서 레오포드가 저를 달래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레오포드 쪽으로 몸을 돌린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레오포드의 얼굴이 심상찮았다.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건 처음…….

무심코 생각을 하던 마리아는 기시감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아니, 한 번.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이 궁의 응접실에서. 대공과 올리비아의 여름 연회 참석 소식에 대해 불확실한 보고를 들었던 그때…….


“명분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믿을 수 없게도,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갑게 저를 대하던 레오포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연약한 얼굴 위로 푸르스름한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제 사랑스러운 연인의 불안 따위를 살피는 대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기가 찼다. 이 침실은…….

오만한 눈이 찬찬히 침실을 살폈다. 레오포드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가운데, 태자의 몸짓을 살피는 시녀들은 바짝 긴장했다.

폭풍 전야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기세가 연인의 부상 때문이라면, 오늘 이 티아제 궁에서 시녀 한 명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백작을 제외하고 모두 자리를 물려.”

나지막한 태자의 말에 뒤따르던 시녀들이 재빠르게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야 레오포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눈꼬리를 내렸다.


“저, 저, 아파요. 레오포드.”

사랑스러운 얼굴에 처연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사람 애를 닳게 하는 애처로운 모습에 레오포드가 한 박자 느리게 말했다.

그래도 제 연인이니.


“……많이 다친 거야?”

누그러진 목소리에 그제야 마리아는 다시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팔이 조금 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젖은 수건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네. 화상이에요.”

사납게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불안하게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제가 잘못 본 게 분명했다. 저를 보는 레오포드에게 성가신 기색이라니.

그래. 내가 다쳐서, 너무 걱정되어서 그렇게 바라본 것일 거다. 스스로한테 하는 말이 주문처럼 맴돌았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레오포드를 사랑했고, 레오포드 역시 그럴 테니까.

다가온 레오포드가 마리아의 팔을 힐끗했다. 하지만 젖은 수건이 올려진 가냘픈 팔에서 상처 따위를 발견할 수 없었다.

레오포드의 눈길이 사라질까, 마리아는 얼른 젖은 수건을 치웠다. 이내 수건의 냉기 탓에 발갛게 물든 팔이 드러났다.

이 정도라면 레오포드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


“괜찮아 보이는군.”

마리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상했다. 이건 너무.

눈앞의 이 사람은 무심하다 못해 차가웠다.

레오포드는, 제 연인은 저러지 않았다.

비 한 방울만 맞아도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는 사람이. 저를 심장의 반쪽처럼 여겨 아픈 것도 대신 아파 주겠다고 하는 다정한 연인이. 이럴 리 없었다.

작고 고운 손이 바들바들 떨며 레오포드에게 향했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연인의 불안감을 살펴 주는 대신 등을 돌리며 말했다.


“내 시가.”

하지스 백작이 얼른 시가를 가져온 뒤 성냥 불을 붙였다. 후, 시가 연기를 빨아들인 뒤 나른하게 숨을 내뱉는 모습은 제국의 태자라기에 지나치게 퇴폐적이었다.

언뜻 보면 지친 마음을 다잡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은 제게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기침을 참는 어깨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옅게 젖은 나무 타는 냄새. 은은하다 생각했던 시가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독하게 느껴졌다.

개방된 테라스가 아니어서 그럴까. 그렇다기에는 밀회를 즐기듯 문을 닫은 채 레오포드의 궁에 있을 때에도 제 앞에서 레오포드가 시가를 태운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렇다면, 어지러운 마음 탓일까.

마리아는 간질거리는 기침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시가를 꺼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레,”

하지만 애교 섞인 부탁이 닿기도 전에 레오포드는 아차 하는 얼굴로 황급히 시가를 비벼 껐다.


“창을 열어.”

통한 걸까?

마리아는 희망 어린 얼굴로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채 삼키지 못한 잔기침을 들은 걸지도 몰랐다. 레오포드는 자주 시가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피우는 시가를 도중에 끄지도 않았다.

그만큼 저를…….


“쯧, 여기에서는 안 피우려고 했는데.”

순간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왜, 왜요? 왜 여기서는 안 피우려 하셨어요?”

“냄새 배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는 대답이 떨어졌다. 동시에 마리아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제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가를 피우면서. 고작, 고작 이 태자비 궁에 냄새가 배는 게 싫어서?


“그나저나 마리아.”

“……네, 레오포드.”

마리아는 겨우 대답했다.

제발. 제가 받은 타격을 레오포드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이런 건 귀엽지 않아.”

“네?”

숨을 삼킨 마리아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건 꿈일까? 하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네 유모가 와서 울며 말하더군. 티아제 궁의 시녀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욕보이고 있다고.”

“네, 레오포드, 그게……!”

“티아제 궁을 되돌려 놓는 게 왜 너를 업신여기는 일이지?”

정말 모르겠다는 목소리여서 마리아는 덥석 레오포드의 팔을 붙잡았다. 화상 부위에 올린 수건이 힘없이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걸 전해 들었으면서도. 어떻게 레오포드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한 번 안아 주지 않고, 달래 주지 않고.

마리아가 서러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제가, 제가 레오포드를 위해 꾸민 궁을 시녀들이 마음대로……!”

“그러니까.”

말허리를 싹둑 자른 목소리가 서늘했다.


“마리아 네가 함부로 이 궁을 휘저으려 하는 걸 바로잡은 건데.”

“…….”

“그게 왜 너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변질되었는지 묻는 거야.”

마리아는 믿기지 않았다. 햇살처럼 다정한 연인이.


“그리 어리석은 말이 어딨어.”

어쩌면 저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마리아. 일 년 동안 약혼녀로서 책무만 제대로 하라 했더니. 왜 그리 멍청하게 굴려 해.”

……저를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시킬까.

마리아는 멍한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레오포드의 근사한 얼굴이 점점 흐릿하게 보이는 동시에 심장 아리도록 아팠다.


“하, 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리아는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를 냈다. 절박한 시선은 오롯이 레오포드한테만 닿았다.


“……티아제 궁이, 꼭 저를 닮았다, 그러셨잖아요.”

그래. 레오포드는 늘 그랬다.

올리비아 그 천것만 없었으면, 하고 아쉬워했고. 저를 떳떳한 자리에 올리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이야기했다.


“노을이 물든 날이면, 꼭 제 금발처럼 찬란하다고.”

“그래. 노을이 물든 날.”

떨리는 목소리를 잡아먹듯 태평한 목소리가 이어졌을 때.

마리아는 갑작스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노을.

작은 태양.

곧 제국의 태양 그 자체로 떠오를 존엄한 태자.

퍼즐의 아귀가 착착 맞아 들어갔다. 새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레오포드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내 마리아. 내 사랑스러운 마리아. 이제야 이해한 거야?”

사랑스럽다는 말을 하면서도 눈빛은 냉랭했다. 가볍게 마리아의 금발을 쓸어내린 레오포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 비호와 애정 아래에서, 계속 예쁘게 굴 거지?”

인형처럼 얼어붙은 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처연한 모습에 제법 마음이 동했다. 레오포드가 씩 웃으며 마리아를 안아 주었다.

풍기는 달콤한 향에 머리가 슬쩍 아팠지만, 오늘은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바짝 굳어 있던 마리아가 그제야 녹아내리듯 레오포드의 품에 안겼다.

목덜미에 닿는 더운 호흡에 레오포드는 선심을 쓰듯 제 배려를 일깨워 주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과 시녀들을 물린 걸 봐.”

“…….”

“나는 내 마리아가 더 이상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길 바라. 그게 내 뜻이야.”

늘 사랑했던 연인의 목소리가 타인의 것처럼 멀어졌다. 하지만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레오포드의 손이 그걸 바랐으니까.

이 따뜻한 온기만이 마리아가 매달릴 수 있는 전부였는데. 레오포드가 몸을 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명령했다.


“궁은 이전과 똑같이 만들어 둬. 그게 내 취향이니까.”

취향이라니. 레오포드의 취향은 저인데. 말도 안 된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마리아를 앞에 두고 레오포드는 하나 더 남았다는 듯 운을 떼었다.


“그리고…….”

서늘한 바다 빛 눈이 침대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마리아가 움찔하는 사이, 레오포드가 혀를 찼다.


“마리아가 휴식을 취할 방을 준비해. 여긴 그대로 비워 두고.”

하지스 백작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레오포드는 나갔다. 마리아가 잡을 새도 없이.

닫히는 문소리에 마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마리아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조용한 방 안에 횅하게 남겨진 제 모습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마리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 이 침실. 이 침실은 지고한 태자비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공간……!

확신을 얻기 위해 방을 둘러보던 마리아가 하지스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레 마주친 하지스 백작의 눈 위로 떠오른 건.


“……바로 다른 방을 준비하라 소프론 남작 부인한테 전달하겠습니다.”

동정.

단 한 번도 마리아 에텔한테 향할 거라 생각한 적 없는, 우스운 감정.

황급히 하지스 백작이 침실을 나섰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마리아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허탈하게 웃던 마리아의 뺨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비참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정부가 되고 싶나요?”

　


“아니야!”

짜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부정하듯 소리를 지르며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쨍그랑-. 마구잡이로 휘두른 손 아래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딘가 베인 것처럼 화끈거렸지만 마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레오포드는 제 연인이다.

사랑하는 연인. 저를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

그러니.


“마리아가 휴식을 취할 방을 준비해. 여긴 그대로 비워 두고.”

　
여긴, 제 방이어야 했다. 그의 사랑은 온전히 저만을 향해야 했다.

.
.
.


“태자 전하께서 영애가 휴식을 취할 방을 바꾸라 하셨습니다.”

　
하지스 백작의 말을 떠올리며, 소프론 남작 부인은 여러 번 침실을 노크했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을 때, 참지 못하고 들어온 소프론 남작 부인은 놀란 숨을 삼켰다.


“내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요?”

제가 그토록 소중히 가꾸었던 태자비 침실이 엉망이 되었다. 깨진 도자기 조각이 발밑에 가득한 가운데, 침대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마리아 에텔을 끌어내리라는 초기의 목적을 삼킨 채 아까 찾아온 황녀 궁 시녀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황녀 전하께서 내일 티 파티에 영애를 초대하셨습니다.”

“황녀 전하께는 송구한 말씀을 전달드리게 되었네요. 보시다시피 내 팔이 이래서.”

인형처럼 감정 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 소프론 남작 부인을 향했다. 등 뒤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아, 잊을 뻔했네요. 연회는 걱정하지 마시라 전해 주세요.”

“…….”

“아주 성대한 연회가 될 거니까요.”

눈물로 젖은 뺨이 어여쁘게 올라갔다. 흔들리는 푸른 눈은 이내 단단하게 굳어졌다.

가장 성대한 여름 연회가 될 것이었다.

그 천것이 보는 가운데, 모두가 보는 가운데.

제 연인은 틀림없이 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벼랑 끝에 몰린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 * *

그 시각.

제도의 비칸데르 대공저에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이 당도했다. 끝없이 들어오는 마차들의 행렬, 그 가장 첫 번째 마차가 현관에 멈추었다.

현관에 도열한 사용인들이 기쁨에 찬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것 같았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공이 근사하게 웃으며 마차 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내리는 아가씨를 바라보면서 사용인들은 한마음으로 외쳤다.


“다시 뵈어 기쁩니다.”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모두 다시 만나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