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티아제 궁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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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티아제 궁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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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티아제 궁의 주인은 누구인가
2022.11.23.
태자궁의 복도.
새로운 보고를 들은 하지스 백작은 급하게 태자의 집무실 방향으로 뛰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짧은 허락이 떨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을 연 하지스 백작의 환한 얼굴 위로 잠시 당황이 어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레오포드는 모르고,
“……마델레이네 소공작께서는 어쩐 일로.”
콘라드는 알아챌, 딱 그 정도로.
콘라드는 하지스 백작의 당황을 모르는 척하며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지난번 헤페르티 사절단 초대에 대한 보고를 제게 받으신다 하시기에, 외무대신의 대리로 왔습니다.”
“바쁘시겠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그러는 사이 사절단의 명단을 확인한 레오포드가 성의 없이 펜을 들어 올렸다.
“참, 사절단은 언제 도착한다 했지?”
“예, 전하. 여름 연회의 첫날인 내일모레에 도착한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하루가 늦군.”
무심한 질책이었다.
헤페르티에서 제국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콘라드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무심코 그 얼굴을 바라보던 레오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늘하게 떨어지는 은발, 어딘지 모르게 냉담한 얼굴. 콘라드의 얼굴은 일견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워 버리면 그만이건만, 정체 모를 흐릿한 잔상은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제이드 마델레이네야 형제니 워낙 닮았고, 막내 공녀는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점차 범위를 줄여 가던 레오포드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부옇게 번지던 얼굴이 선명해지자 레오포드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갔다.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올리비아는, 늘 강아지처럼 제게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아닌.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곧 비칸데르 대공비로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부디.”
티아제 궁에서 제게 뒷모습을 돌린 채 사라졌던 올리비아였으니까.
“……그때까지 무탈하시길.”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레오포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아가 소공작과 닮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이었다.
늘 무뚝뚝하기만 한 소공작과 제게 불쌍할 정도로 애정을 바라던 올리비아는 닮을 수 없었다.
레오포드는 생각을 치워 버리듯 결재 커버를 덮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잘생긴 눈매가 콘라드를 향해 까딱했다.
“그러면 사절단 건은 해결되었고…….”
결재 커버를 챙기던 콘라드가 멈칫하는 틈을 타, 레오포드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알아서 어련히 잘 처리할 사절단 핑계까지 대며 콘라드를 부른 진짜 이유.
“공작이 공녀에게 연락을 취한다 한 지가 한참 전이니 당연히 오라비인 소공작은 공녀의 소식을 알고 있겠지?”
의도를 가진 말이 콘라드를 향했다.
하지만 콘라드를 불편하게 한 건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 아닌, 올리비아 이름 그 자체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답을 기다리며 느른히 웃던 레오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송구하다니.
“이번 여름 연회에 오는 것은 확인되었나?”
“……송구합니다.”
“연락이 닿기는 한 건가?”
“……송구합,”
참을 수 없었다.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레오포드는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거친 파열음이 집무실을 울리고, 벽에 던져진 서류 커버가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누군가 헛숨 삼키는 소리가 언뜻 났을 때, 레오포드는 푸스스 웃으며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하긴. 이렇게 묻는 것도 우습군.”
나직한 목소리와 달리 새파랗게 벼려진 바다 빛 눈이 콘라드를 찌를 듯 몰아세웠다.
“안부를 묻는 기별을 하고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소공작이 동생을 걱정했다면. 공녀를 그리 쉽게 비칸데르령으로 보내지도 않았겠지.”
지금 누가 누굴 비난하는 걸까.
태자가 올리비아를 업신여기고 그 자리에 연인을 동행했다는 건 온 제국이 아는 사실인데.
“전하, 께서 그리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콘라드가 잇새로 짓이기듯 읊조렸다.
늘 냉랭하던 자수정 빛 눈에 불꽃이 튀었다.
기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올리비아를 적대시하던 콘라드 마델레이네가 올리비아의 편을 다 들다니.
굳게 다문 레오포드의 입매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사납게 올라간 눈매가 노골적으로 콘라드를 훑어 내렸다. 이내 입술 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소공작이 나를 지탄하는 건가?”
레오포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협적인 분위기가 집무실을 휘감았다.
가당치도 않았다.
황제파이자 누구보다 충성심이 깊은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겨우 올리비아 때문에 제게 빈정거리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에 느른히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킨 레오포드가 순간 멈칫했다. 오늘따라 콘라드에게서 계속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냉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며, 조금 전 저를 탓하는 말까지.
꼭…….
하지만 레오포드는 더 이상 생각을 잇지 않았다.
훤칠한 키의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를 압도하기 위한 날카로운 기운이 팽팽하게 맞설 때였다.
“전하, 전하! 제가, 제가 조금 전에 대공의 마차가 제도 성문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에 잠시 물러나 있던 하지스 백작이 서둘러 말했다. 하지스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직하게 집무실을 채우던 기세가 가셨다.
“올리비아는.”
숨도 쉬지 않고 되묻는 레오포드의 말에 하지스 백작은 보고받은 사실을 그대로 복기했다.
“공녀 역시 제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올리비아가 같은 제도 안에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잔뜩 굳어 있던 레오포드의 미간이 조금씩 풀어졌다.
단단히 응축된 것 같았던 긴장감이 서서히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지금 어디, 아니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함께 올리비아의 행적이 파악되길 기다리던 콘라드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소공작은 나가게.”
예상하고 있던 퇴출 명령에 콘라드는 주춤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마지막까지도 정확하게 예를 갖춘 콘라드가 나간 뒤에야, 레오포드는 마뜩잖은 눈을 돌려 하지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 는 어떠해 보이던가.”
올리비아. 고작 네 음절, 그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공녀에게 올리비아라고 이름을 불러 준 날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그 이름 뒤에 덧붙여 부르고 싶은 단어라도 있는 걸까.
복잡한 마음을 누른 채 레오포드는 묻고 싶은 말을 모두 뭉뚱그려 말했다.
하지만 하지스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아, 송구합니다. 전하. 대공과 같은 마차에 있어 공녀의 현재 건강 상태 등의 확인까지는 어려웠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마차를 탔단 말이야?”
“예.”
쾅-.
갑작스레 책상을 내리치는 주먹 소리에 하지스 백작은 레오포드를 기민하게 살폈다.
레오포드의 가슴속에서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책상을 힘주어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은 아프지 않았다.
같은 마차라니. 마차라고 해 봐야 그 작은 공간에!
그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레오포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올리비아가 대공과 춤을 추었던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저는 상당 부분을 올리비아한테 양보했다. 일 년간의 유예로 그녀의 정절을 묶어 두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베르탱.”
“예. 전하.”
“지금 바로 공녀가 있는 곳으로 가지.”
.
.
.
레오포드가 궁의 현관으로 나가자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시종 한 명이 레오포드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녀의 현 위치는?”
마차에 오르면서 레오포드가 말했다. 하지스 백작은 잠시 무어라 대답을 할지 망설였다. 제도에서 공녀가 갈 곳은 비칸데르 대공저뿐이었다. 하지만 제 감은 공녀의 소재를 대공저라 이르면, 태자가 분노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레오포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찰나의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었다. 동시에 옆에 있던 시종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궁이 왜 이리 시끄럽지?”
레오포드가 성마른 짜증을 내뱉었다. 늘 호젓하고 여유로운 제 궁의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종장이 시선을 알아챘는지 빠르게 다가왔다.
시종장은 마차 옆에 선 시종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전하. 혹시 티아제 궁으로 가십니까?”
“티아제 궁? 거긴 왜?”
순간 시종장의 얼굴 위로 말실수를 했다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올리비아가 티아제 궁으로 온 걸까?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레오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 자존심 없는 올리비아라도 냉큼 티아제 궁으로 오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금세 레오포드의 입매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티아제 궁이라면 끔찍이도 애정을 기울였던 여자다.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레오포드의 머릿속에는 아까 제 기분을 망쳤던 올리비아의 모습 대신 레오포드가 익히 잘 알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으며 하염없이 제 주변을 도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모습.
하지만 곤란한 듯한 시종장이 말을 시작했을 때, 레오포드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뭐? 마리아가 다쳤다고?”
올리비아가 돌아온 게 아니라?
불쑥 치밀어 오른 생각에 레오포드는 스스로 기가 막혔다. 연인인 마리아가 다쳤다는데 올리비아 생각이라니.
찌푸린 얼굴이 연인의 부상에 화가 난 레오포드의 속내라 느꼈는지, 시종장은 황망해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팔에 찻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쏟아져? 그게 무슨 말이야. 제대로 알아듣게 말해.”
“그게.”
그때였다. 우는 소리가 커지더니, 멀리서 푸근한 인상의 부인이 울면서 달려왔다. 그녀를 놓친 시종들이 아차 하는 사이, 부인은 레오포드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이고. 제국의 작은 태양,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아의 유모 아닌가.”
에텔 후작저에 갈 때마다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영광스럽게도 저를 콕 집어 불러 주는 태자의 모습에 유모의 곡소리가 더 커졌다.
“예! 전하! 저희 아가씨가 티아제 궁의 시녀들 때문에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느 안전이라고!”
시종장이 더 펄쩍 뛰며 유모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레오포드는 모든 말을 들은 뒤였다.
“……가만. 시녀들 때문에 화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지독히도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걱정이라고는 하나 없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모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새파란 눈이 유모의 속내를 꿰뚫듯 응시했다. 유모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폈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아까 제 아가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꺄악-!
비명 소리가 터졌을 때, 유모는 냅다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난번 황녀 궁에서 있었던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모의 눈에 펼쳐진 광경은 제 걱정과 달랐다.
“살, 살려 주십시오, 영애.”
티 포트를 들고 있던 앳된 시녀가 달달 떨며 마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녀는 티 포트를 한 번 놓친 듯 앞섶이 잔뜩 젖어 있었다.
반면에 아주 조금, 찻물 몇 방울이 튄 팔을 내려다보던 마리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팔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소프론 남작 부인이 황궁의를 부를 때, 마리아는 둘만 남은 방에서 유모한테 은밀히 말했다.
“유모는 급히 태자 전하께 가. 예전에 돈을 먹였던 시종 기억하지? 편지를 대신 전했던. 맞아. 그 시종한테 어떻게든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전하께 고하라 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유모는 셈을 빠르게 했다.
“그게 안 된다면…….”
“그게 안 된다면, 유모가 어떻게든 태자 전하를 이 티아제 궁으로 모셔 와.”
먼 곳을 응시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마리아가 유모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누구보다도 싸늘하게 가라앉았었다.
그때 아가씨가 뭐라 뇌까렸는지, 유모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 때문에, 이 마리아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레오포드도 아셔야지. 적어도, 이 티아제 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전하께서 확실히 해 주어야지.”
그러니 유모는 할 수 있는 가장 절박하고 슬픈 얼굴로 고할 뿐이었다.
“티아제 궁의 시녀들이 저희 아가씨를 업신여기고 욕보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저희 아가씨가 태자 전하를 위해 꾸민 궁을, 마음대로!”
하지만 고개를 숙인 유모는 몰랐다. 의문에 휩싸이던 레오포드의 얼굴이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차갑게 굳었다는 것을.
“……잠시 티아제 궁을 먼저 들러야겠어.”
목적을 이룬 유모는 그저 기뻐할 따름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티아제 궁의 가장 깊은 침전.
태자비만 출입할 수 있는 태자비의 침실, 그곳의 침대 위에 마리아 에텔이 누워 있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리아 에텔을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사랑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진작 이렇게 해 주었다면, 내가 저 아이의 죄를 물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칼날 같은 눈빛이 복도를 향했다.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앳된 시녀가 덜덜 떨었다.
작위도, 재력도 변변찮은 말단 시녀. 그녀가 티 포트를 가져올 때부터 이 사달은 일어날 일이었다.
오늘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마리아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