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닿았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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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닿았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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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닿았다 떨어졌다
2022.11.20.
바짝 얼어붙은 올리비아의 숨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진한 초록 눈이 흔들렸다.
여기까지다.
에드윈은 상냥하게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낸 것처럼 손바닥을 올려보았다.
“……라고, 농담을 한번 해 봤어요. 물론 올리비아 농담만큼은 재미없었던 것 같지만요.”
위험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올리비아는 무척이나 예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유혹적이었다.
이미 에드윈은 저 가느다란 손목 안쪽이 얼마나 달콤한지, 또 제 손목의 맥박 위로 닿았던 붉은 입술이 어찌나 뜨거웠는지를 알고 있었다.
“좋아하고 있어요, 에드윈.”
더위보다 더 아찔한 열기를 내뿜던 고백까지도.
에드윈은 가느다랗게 눈을 휘며 올리비아의 시선을 비스듬히 비꼈다. 화사하게 웃는 낯 아래로 올라온 욕정이 얼마나 진득한지 안다면 올리비아는 저를 보고 저렇게 웃어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달콤한 날 이후로 제 인내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순간순간 치미는 성마른 감정을 삼킬 때마다 초조함이 바스락거렸다.
부디 올리비아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올리비아가 원한다면 에드윈은 얼마든지 상냥한 신사의 모습으로 자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능청을 떠는 그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티 나게 화제를 돌리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불안이 싹튼다는 건 이런 걸까. 선뜩하게 치미는 예리한 감각에 에드윈은 주저하듯 입술을 떼었다.
“올리비, 아?”
그 순간, 매끄럽게 굴러가던 마차가 갑자기 흔들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에드윈은 날래게 올리비아를 잡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가씨. 잠시 돌이 굴러와서…….”
바깥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찰나였다. 에드윈의 오른쪽 입술 끝에 번개처럼 따뜻한 온기가 스치듯 지나갔다.
정말 닿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코끝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는 달콤한 향기에 에드윈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도도히 든 올리비아가 야무진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아, 아무리 아직 우리가 혼인을 하지 않은 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이렇게 반지를 같이 꼈는데.”
손가락에 낀 붉은 보석 반지면 그들의 관계를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대담한 수였다. 하지만 호기롭게 내뱉은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갈수록 아래로 내려갔다.
얼빠진 듯 멍한 붉은 눈에서.
우뚝하게 모양 좋은 코로.
그리고 붉게 번진 입술…….
올리비아는 차마 제가 찍어 누른 입술을 마주 보지 못한 채로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빤하게 저를 향하는 시선이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때를 맞추듯, 바깥에서 목청 좋은 마부가 큰소리로 외쳤다.
“돌을 치웠습니다. 다시 속력 내겠습니다!”
“다, 행이네요.”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에드윈의 어깨를 밀었다.
조금 떨어지기를 바랐을 뿐인데, 손끝에 닿는 어깨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리지 않는 그에 놀라 미는 손이 멈췄다.
“왜 그렇게 놀라요?”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춘 손을 에드윈이 부드럽게 감싸듯 쥐었다. 올리비아가 허둥대며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그냥 앉으시라고. 위험하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알아요. 그러니 그렇게 안 놀라도 괜찮아요. 이미 더 깊게 닿아 놓고서.”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다른 손을 내저었다.
“제, 가요?”
목소리의 음이 유난히 튀었다.
올리비아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흐드러진 장미꽃처럼 어딘가 고혹적인 얼굴 위의 눈매 끝이 얄궂게 휘어졌다.
“아, 너무 짧아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안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에드윈은 말끝을 늘이며 빈손으로 입술 끝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은근하게 올리비아를 살폈다.
제 손안에 갇힌 조그마한 손은 꼼질거림도 잊고 바짝 긴장해 있었다.
딴청을 부리는 둥근 눈이 에드윈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복숭앗빛 뺨이 붉게 번졌다. 부끄러운 듯 달아오르는 눈가가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에드윈은 잠시 머리가 아찔하게 돌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칼터 경은 안 보이네요. 디안도. 둘 다 아까는 분명 있었는데.”
아침에 출발 준비로 바쁜 것은 보았는데.
딴청을 부리는 말에 에드윈은 애가 닳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은 척 본심을 드러냈다.
“어딘가에 있겠죠. 그보다, 나는 조금 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우리 아침 식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정말이지. 내가 못 이기게 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네요.”
에드윈이 앓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올리비아가 배시시 웃었다.
* * *
한편 그 시각.
무사히 비칸데르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마차 행렬을 바라보며 윈스터 칼터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대공령 내에서 배웅하는 행렬이 길어 다행이었다. 까딱하면 마차가 나오기 전까지 제이드 마델레이네를 성문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으로 유인하지 못할 뻔했다.
“……날, 속였군. 올리비아가 있다면서.”
사납게 벼려진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이크. 윈스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슬쩍 옆으로 한 발 빠졌다. 그리고 능청스레 웃어 보였다. 원래 웃는 얼굴에 욕을 내뱉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생각보다 순진하십니다. 마델레이네 경. 역시 도련님이라 그러신가요?”
……물론 저와 제이드 마델레이네 사이에서는 쓸모없는 말일 뿐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떨어뜨렸지만, 제이드 마델레이네는 얼마든지 이 간격을 좁혀 제게 다가올 수 있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사이,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아무리 대공의 맹세를 받았다고 하나, 올리비아는 여전히 내…….”
제이드는 잠시 입술을 뻐끔거렸다. 일그러진 얼굴 위로 묵음으로 삼킨 속내가 어떤 것인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동생.
몇 번을 내쫓아도 끊임없이 아침마다 비칸데르 대공성의 성문을 두드리는 모습에서 후회의 감정이 비쳐 보였지만. 그건 윈스터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이야 피골이 상접하게 마르든, 근처의 여관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노숙을 하게 되든.
대신 윈스터가 관심을 두는 쪽은 따로 있었다.
오늘 새벽, 출발하기 직전 대공 전하로부터 하달받은 명령.
“……소식이 느린 분이니 특별히 알려 드리자면,”
윈스터 칼터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제이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파고드는 손톱의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드는 천생 기사였다. 우위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은 지금 제이드가 굽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가 이러는 건 아가씨께서 대공 전하의 맹세를 받으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더.
반사적으로 내뱉으려던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윈스터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이어졌다.
“저 역시 아가씨께 맹세를 바쳤습니다. 아니, 온 비칸데르가 아가씨께 맹세를 바쳤습니다.”
“…….”
“비칸데르의 맹세는 가볍지 않습니다. 황제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 비칸데르의 기사들은 단 몇 주 만에 아가씨께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기사에게 ‘레이디에 대한 맹세’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는 제이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대공이 올리비아한테 맹세를 바쳤다고 했을 때부터 심장이 철렁했었다.
그런데, 결국. 이 비칸데르 모두가 올리비아한테 맹세를 바쳤다니.
더없이 완벽한 충성이었다.
“경은 누구한테 맹세를 바치셨습니까? 마델레이네 기사들은요?”
동시에 지독한 패배감이었다.
자신은 단 한순간도 올리비아한테 맹세를 바치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 애는…….
올리비아는…….
“아……. 그러고 보니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마델레이네 공녀님께서 아직 데뷔탕트도 못 치르셨다죠? 지금 여기서 이러실 시간이 있으시다는 게 놀랍군요. 참 눈물이 날 정도로 우애 깊은 남매 사이인가 봅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제이드의 얼굴이 가소로웠다. 윈스터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정을 끌어모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했다.
“제가 경이라면, 조금 더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할 겁니다.”
“…….”
“예를 들어. 카탕타 자작령에서 미적거리던 황녀가 어떻게 비칸데르의 폐광산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갔는지.”
“…….”
“그도 아니라면, 우리 아가씨께서 얼마나 비칸데르를 빛나게 만드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린다거나.”
“…….”
“혹은 이 새벽에도 모든 비칸데르의 배웅을 받을 정도로 추앙받는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널리 전해도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던 제이드는 순간 멈칫했다. 이제야 눈치챘냐는 듯 윈스터가 얄밉게 웃었다.
“제도에서 오실 때와는 상황이 판이합니다. 감히 그 누구라도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는 순간 명예롭게 나설 기사들이 수두룩하다는 말이죠.”
“……기왕 쫓아내는 김에, 제도로 갔을 때 올리비아가 한 점 귀찮음 없게 이야기를 퍼트려.”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입을 빌린 소문이라면, 확실할 터였다.
대공 전하의 명을 이렇게 확실히 처리하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서, 윈스터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물론, 대공 전하께서 그 가장 선두에 계시고요.”
“…….”
“마델레이네 공작가와는 달리.”
제이드의 눈이 까맣게 빛을 잃었다. 흔들림 없이 서 있던 수척한 몸이 휘청였다. 그 모습에도 단 한 번 온정을 베풀지 않은 윈스터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디안이 혀를 찼다. 저도 황제파인 마델레이네 공작가라면 치가 떨렸지만, 윈스터는 아주 지독하게 굴었다.
“제이드 마델레이네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윈스터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악연이라니. 이 정도면 양보하고 양보한 태도였다. 아가씨의 두 번째 기사로서, 동시에 제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당연한 말이었다.
* * *
한낮의 티아제 궁.
마리아는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며 궁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태자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경악한 목소리에도 소프론 남작 부인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레오포드가?”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소프론 남작 부인의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하지만 마리아는 지금 티아제 궁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녀를 만난 뒤, 몸살로 궁에 오지 못한 게 단 삼 일이었다. 그러는 시간 동안 제가 심혈을 기울여 가꾼 궁이 다시 이상하게 돌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촌스러운 푸른 수국이라니!
흐드러지는 리시안셔스 대신 협탁과 푸른 수국이 다시 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 수수한 빛깔에 마리아의 기분은 엉망으로 치달았다.
아니, 사실은 이 궁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화가 났다.
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든 소프론 남작 부인도, 저를 깔보듯 이 상황을 관망하는 시녀들도.
무엇보다 이 궁을 바꾸라 명한 레오포드까지.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단 말이야. 아프다는데 편지도 한 번 보내 주지 않고!
“……전하께서 바꾸라 하신다고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바꾸어도 되는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에 뒤에 선 시녀들이 움찔했다.
영롱한 푸른 눈 위로 새파란 분노가 번쩍였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고도 소프론 남작 부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마리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티아제 궁의 시녀장이었다. 예법상 태자비가 없는 상태에서, 그녀가 태자의 명을 듣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
날카롭게 외친 단어에 소프론 남작 부인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하지만 시녀들은 곧이곧대로 마리아의 말에 따랐다. 한 명이 재빠르게 차를 내왔다.
곧 테이블 앞에 펼쳐지는 티 포트 세트를 본 마리아의 심기가 다시 한번 불편해졌다.
“내 티 포트가 아니잖아요!”
거스윈 왕국에서 수입한 초록색 꽃이 양각으로 새겨진 티 포트. 제국에 딱 두 세트만 들어온 이 티 포트는 마리아가 티아제 궁에 출입하는 순간부터 사용하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초록색의 꽃이 촌스러워 꺼렸지만, 레오포드는 유달리 이 티 포트에 차를 마시는 걸 즐겼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도 아꼈던 티 포트였는데.
하지만 소프론 남작 부인은 무심하게 답했다.
“티 포트를 손질하는 김에 모두 손질했습니다.”
“두 세트를 다요?”
“예, 영애.”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듯 묻는 태도가 마리아의 화를 돋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마리아는 이를 악문 채 소프론 남작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 티 포트를 가장 좋아하는 걸 몰랐나요?”
“……며칠간 오시지 않아 그 참에 손질하려 했습니다.”
사실은 마차가 오는 것을 보고 부러 손질을 시작했다. 이건 마델레이네 공녀의 티 포트였으니까.
소프론 남작부인의 무덤덤한 대답은 트집 잡을 거리를 요리조리 피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더 약이 바짝 올랐다. 불꽃이 튀던 푸른 눈이 순간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묘한 기색에 소프론 남작 부인이 멈칫하던 그 순간, 마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곧이어.
“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티아제 궁 전체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