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솔직한 비칸데르와 닮아 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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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솔직한 비칸데르와 닮아 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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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솔직한 비칸데르와 닮아 가는 아가씨
2022.10.26.
선선한 오후의 예니브 거리.
디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를 기점으로 예니브 거리에 살던 초록 눈의 사람들은 번화가인 소네어 거리의 여관으로 모두 거처를 옮겼다. 거리에는 늘 뛰어다니던 아이들 대신 곳곳에 건축 자재와 설비가 정렬되어 있었다.
‘시작’을 외치기만 한다면 바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저 멀리서 건축가 슈른이 인부들을 이끌고 다녔다. 조금 전 아가씨와 함께 마지막 확인을 마쳤던 그는 커다란 조감도를 펼치며 내일 시작될 작업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는 듯싶었다.
그 모습을 보며 디안은 벅찬 기분을 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거리를 떠난 지금, 사람의 기척이 있는 곳은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판잣집뿐이었다.
때마침 판잣집의 열린 창문으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힐끗 창문 안을 확인하는 디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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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아가씨. 실 발찌 만드시는 건 처음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색색의 고운 실이 흐트러진 작은 테이블. 그 주변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 발찌를 만드는 건 정말 처음이에요.”
황녀의 심부름으로 여러 장식들은 많이 만들어 봤지만. 옛 생각에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처음이시라니. 저는 처음 하나 만들 때 일주일은 걸렸었습니다.”
“맞아요. 이거 엮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데, 바로 하시다니. 솜씨가 뛰어나세요.”
여자들의 말에 올리비아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었다. 다분히 호의 섞인 말들이라 정말 제 솜씨가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실 발찌가 만들어졌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실이 교차로 엮인 실 발찌.
이음매를 초록색으로 쓴 건 제 고집이었다.
색깔들의 조화가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성품으로 보니 퍽 근사했다.
처음 에드윈한테 실 발찌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는 진짜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렇게 만들고 나니 내심 실 발찌를 받아 들 에드윈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좋아할까, 그렇지 않을까.
에드윈을 떠올리기 무섭게 올리비아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입꼬리마저 부드럽게 올라갔다.
반짝이는 은발과 아름다운 얼굴. 특유의 우아하고 서늘한 분위기의 아가씨가 머금은 은은한 미소.
사람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에 앞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감히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귀한 아가씨와 이렇게 마주 앉아 실 발찌를 만들다니.
이 모든 건 이틀 전, 예니브 거리를 떠날 준비를 할 때 찾아온 아가씨의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실 발찌를 만들고 싶은데, 내게 방법을 알려 줄래요?”
꼬마 제인이 아가씨한테 실 발찌를 선물했다는 건 이미 예니브 거리에 파다한 화제였다. 하지만 선물을 드린다는 거에 만족했지, 아가씨가 진짜 발찌를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잘 착용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거리의 모두가 기함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는지, 아가씨는 기사를 물린 뒤 여자들 앞에서 슬쩍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고운 발목에 걸린 건 분명 꼬마 제인이 선물한 실 발찌였다.
그 실 발찌를 만든 꼬마 제인의 엄마부터 편찮으신 할머니와 함께 사는 비키까지 모두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엎드려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터져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예니브 거리를 정리할 뿐 아니라 저희의 선물을 불결하다 하지 않고 착용하다니.
난감해하던 아가씨는 그들이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고, 여자들은 한마음으로 모두가 실 발찌 만드는 법을 알려 준다고 외쳤다.
실 발찌를 함께 만들다 보면,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한 감사를 아가씨께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실 발찌 만드는 법을 터득할 줄은 몰랐다.
여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할 타이밍을 재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판잣집 바깥에 있던 디안이 창문 너머로 얼굴을 보였다.
“아가씨.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갈 시간이라니. 이제야 겨우 하나를 완성했는데.
아쉬운 눈으로 실 발찌를 바라보던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문득 베서니의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 오늘 저녁 연회는 잊지 않으셨죠? 일찍 오셔야 해요!”
예니브 구획 정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자는 말에 열렬히 반대했던 올리비아는 영토 경계의 짐승 토벌을 나갔던 기사들의 복귀 연회이기도 하다는 에드윈의 말에 두 손을 들었다.
본성에서 연회를 한다는 말이 퍼져 나가면서 번화가인 소네어 거리를 중심으로 비칸데르령에서도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고 했다.
초록 눈의 사람들을 위한 도시 사업을 기념하는 축제라니.
이제부터 한창일 텐데. 앞에 있는 여자들도 그 축제에 참여하고 싶을 터였다.
이제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웃이 될 비칸데르령의 사람들과 함께.
“저,”
여자들 중 누군가 급하게 말을 꺼냈다. 더 할 말이라도 있나? 올리비아가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사이, 여자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지난번 제가 노래를 불렀던 일로 안면을 텄던 비키가 입을 떼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었다.
제게 낯을 가리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다가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올리비아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아가씨 덕분에 계속 예니브 거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일 없이 이 비칸데르령에 정착한 느낌이에요.”
“진작부터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겨우 말씀드려요.”
비키가 물꼬를 트자 여자들이 줄줄이 말을 이었다. 마주 잡은 손을 꼼질거리면서도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연두색 눈들에는 고마움이 선연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 비칸데르는 정말 이상한 곳이다.
저는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정받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제도와 달리, 이곳은 제가 무엇을 하든 저를 좋게 바라봐 주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저를 믿고, 제게 고마움을 표현해 주다니.
그 진심 어린 목소리들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에 무게가 점점 더해지듯 올리비아의 마음이 녹녹하게 젖어 들었다.
“……나도 고마워요.”
“네?”
구슬처럼 고운 목소리에 여자들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요정 같은 아가씨가 화사하게 웃었다.
“……즐거운 축제 되기를 바란다고요. 모두 여러분들을 위한 거잖아요.”
올리비아가 씩 웃은 뒤 돌아섰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손에 들린 실 발찌의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지금의 올리비아는 몰랐다.
뒤에 선 여자들이 얼마나 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올리비아한테 작은 이벤트 같았던 오늘의 일이 축제를 기점으로 대단한 미담이 되어 어디까지 번져 갈지도 말이다.
제도의 사람들도 이 일을 알게 되리라고, 이때의 올리비아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 * *
이제 내일이면 예니브 거리 구획 정리의 첫 삽을 뜨는 날이었다.
마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음에도, 멀어지는 예니브 거리를 보자 괜히 안타까웠다. 창문에 바짝 붙어 있자 옆에 있던 디안이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보시고도 계속 보십니까?”
“그러게요.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요.”
괜히 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에 올리비아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번화가인 소네어 거리로 접어들었다. 황량한 예니브 거리와 달리 소네어 거리 곳곳에는 알록달록한 꽃 장식과 색종이들이 날리고 있었다.
가게마다 잔뜩 쌓아 둔 빵과 고기에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풍겼다. 넉넉한 표정의 사람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커다란 풍선을 들고 있었다. 그 활기찬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슈른 씨와 함께 온 인부들은 어때요?”
하여튼 예니브 생각을 지우시질 못한다.
디안은 웃음을 삼키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소네어 거리의 여관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식사량이 많은 편이라 여관 주인이 크게 기뻐한다고 합니다.”
외지인의 유입이라고는 거의 없던 이 폐쇄적인 비칸데르령을 찾은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사람들도 슈른의 넉살과 인부들의 능력에 감탄하며 친근감을 표했다.
만족스럽지 않으시냐는 눈빛에도 올리비아는 가만히 디안을 마주할 뿐이었다. 이건 올리비아가 원하는 대답의 겨우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디안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예니브 사람들이 묵는 곳에는 저희 기사들이 늘 상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예니브 거리에서 나온 초록 눈의 사람들이 외지인과 마찰을 빚지 않게 할 것. 더불어 비칸데르 영지민들과 외지인들과의 갈등도 없게끔 관리할 것.
자신의 요구에 완벽하게 충족되는 답변에 그제야 올리비아가 활짝 웃었다.
디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렇게까지 영지민들을 생각하는 영주가 또 있을까. 물론 대공 전하는 제외다. 부부는 한 쌍이시라니까.
“그런데 경.”
“예.”
평소라면 ‘디안’이라고 불렀을 아가씨였다. 무심코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던 디안은 순간 아차 했다. 아가씨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 인터필드 경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맞나요?”
디안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토록 사이좋던 하워드와 디안이 며칠 전부터 옥신각신한다는 건 본성에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심지어 올리비아는 그 다툼을 목격하기도 했다.
“제가 먼저 할 겁니다. 이건 아무리 인터필드 경께서 말씀하셔도 양보 못 합니다.”
“순서 지켜, 디안. 그분은 내가 먼저 뵀…….”
이내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얼른 말을 멈추지만 않았더라도 다툼의 원인을 알아냈을 텐데.
올리비아의 웃음에 디안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하하. 그러고 보니 요즘 칠면조 고기를 안 먹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하필 눈에 띈 곳이 이 음식점이라니.
처음 아가씨가 비칸데르에 오셨을 때 칠면조 고기를 맛보았던 음식점, <바람이 스치는 곳>이었다.
제 속내를 가늠하듯, 아가씨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칠면조 이야기를 꺼내자 자연스레 전장에서 먹었던 칠면조가 떠올랐다.
“물론 저기도 맛있지만, 전장에 나가 있을 때 친애하는 후원자님이 보내 주신 칠면조 고기가 정말 맛있었죠.”
“후원자가 칠면조를요?”
어쩐지 되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평소라면 기민하게 알아챘을 디안은 지금 대화 화제가 달라진 것에 기뻐하기에 급급했다.
“예, 리브 그린 님이시라고. 저희가 헤페르티와 전쟁을 할 때 기사들을 늘 후원해 주시던 아주 좋은 분이셨습니다. 어찌나 저희가 필요한 것들을 쏙쏙 골라 구호품으로 보내 주시던지, 저는 전장에서 칠면조를 먹으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디안의 들뜬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올리비아는 제 양손을 마주 잡았다.
설마 했는데.
제가 제이드를 위해 후원을 보냈던 곳에 디안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당연히 에드윈도 함께 있었겠지.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신기함과 동시에 올리비아는 오랜만에 제 편지 상대인 ‘이름 모를 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도 이 비칸데르령에 있는 걸까? 혹시나 디안이 그인 것은 아닐까?
생각도 못 한 일에 올리비아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예?”
“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것 같아서.”
“아니에요, 디안.”
올리비아는 웃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다행히 각도상 디안은 볼 수 없는 위치였다. 디안이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비칸데르 전체의 마음을 얻기 전까지는 제가 ‘리브 그린’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름 모를 기사’를 만나고 싶기는 했다. 막막한 기분에 올리비아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때였다. 멀어지던 소리 사이로 ‘대공 전하’라는 단어가 꽂히듯이 들렸다. 어느새 주변에 환호성이 가득했다. 동시에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반사적으로 올리비아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 왔는지 에드윈이 냉큼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름다운 얼굴에 반갑다는 듯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올리비아가 너무 안 와서 마중을 나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거짓말.”
능청스러운 에드윈의 얼굴을 마주하며 올리비아는 곱게 눈을 흘겼다. 에드윈이 과장되게 눈을 깜빡였다.
“티 났어요?”
“조금요?”
“사실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예고도 없이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달콤한 말을 해 놓고서 에드윈은 웃기만 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며칠 전, 볼에 입을 맞췄던 게 무색하리만큼 아교를 바른 것처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도요.”
입술 사이를 비집고 저도 모르게 나간 말. 그 한마디에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마음 한구석부터 느리게 퍼지는 이상한 용기의 원천을 깨달았다.
“그래서 에드윈이 와 준 게 기뻐요.”
아, 이 솔직한 비칸데르.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저는 이 비칸데르를 점점 닮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