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처음 보는 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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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처음 보는 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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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처음 보는 연인의 모습
2022.10.12.
티아제 궁의 식당.
“……래서요. 오늘 하루 종일 서류만 보다가.”
들뜬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읊는 마리아 에텔과 달리 태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벽에 시립한 소프론 남작 부인은 숨소리조차 삼갔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레오포드의 잘생긴 눈매 끝이 점점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런데, 레오포드. 오늘따라 왜 그리 안 드세요.”
마리아 에텔도 태자의 상태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소프론 남작 부인은 조금 안도했다.
태자는 제 연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는 무른 면이 있었으니까. 저 찌푸려진 미간이 금세 펴질 거라 생각했다.
“……냄새가 나는군.”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졌을 때, 식당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지고한 태자가 먹을 요리에 냄새라니.
소프론 남작 부인은 물론 시립한 모두의 등이 싸늘하게 식었다.
“전하의 음식에 이게 무슨……!”
“송구합니다, 전하.”
마리아가 쨍하게 소리치는 동시에 소프론 남작 부인이 황급히 달려와 사죄했다. 줄줄이 무릎을 꿇는 시종들의 모습이 레오포드의 눈에는 느리게 보였다.
레오포드는 무감각하게 그들을 응시하다 다시 식탁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빠르게 요리가 담겨 있던 접시를 가져간 모양이었다. 먹음직스럽게 올라오던 냄새가 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독하게 단 냄새가 남아 있었다.
어디에서 나는 냄새일까. 사납게 주변을 살펴보아도 온갖 곳에서 다 단내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레오포드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시나무 떨듯 저를 바라보는 눈들에 대고 레오포드가 건조하게 말했다.
“……오늘따라 머리가 아파서인지도 모르겠군. 피곤하네. 들어가야겠어.”
“레오포드……!”
마리아는 애가 탔다. 오늘이야말로 여름 연회 일정에 약혼식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부족한 예산도 어떻게든 오늘 내로 승부를 봐야 했다.
간절한 부름 탓인지 레오포드가 잠시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차는 어떠세요? 달콤한 다과와 함께 드신다면 두통이 조금 가실 거예요.”
마리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권했다. 레오포드는 잠시간 마리아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단내를 피하고자 일어섰는데 달콤한 다과라니.
당연히 거절하려던 레오포드의 머릿속에 문득 정돈된 티아제 궁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수채화처럼 먹먹하게 번지는 단아한 풍경. 먹구름처럼 갑갑하던 머릿속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레오포드가 마리아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럼 그렇지. 마리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레오포드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띤 채 은근하게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제가 레오포드의 피로를 풀어 드리면 더 좋고요.”
레오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양양해진 마리아는 거보란 듯 시녀들을 내려다보았다.
태자 전하께서 저를 보고 한 수 접어 주셨다. 그러니 이 궁의 주인은 당연히 사랑받는 이 마리아 에텔이다.
모든 시녀들이 그 뜻을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덕분에 모두가 어딘지 공허한 레오포드의 눈을 놓치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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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와 마리아가 식당을 나선 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방장들이 허겁지겁 식당으로 뛰어왔다.
“주방장님.”
원망 어린 시종들의 눈초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주방장들은 서둘러 트롤리에 숨겨 둔 요리부터 확인했다.
한참을 냄새 맡고 먹어 보던 주방장들이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냄새만 나는데?”
“정말. 고기 비린내나 이런 것도 하나도 없어요. 과일 퓌레 당도도 적당하고.”
“무슨 냄새를 말씀하시는 거지?”
“근데 어디선가 조금 단내가 나지 않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주방장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말에 시녀가 얼른 답했다.
“아! 아마 에텔 영애의 향수 냄새일 겁니다. 새로 쓰시는 향을 온 궁에 뿌리라 하셔서.”
“그렇다면 그건 아니겠고. 설마 태자 전하께서 온종일 함께하시는 영애의 향수 냄새를 맡고 그러실 리가 없으시잖아.”
* * *
“자, 아 하세요.”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레오포드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마리아가 교태로운 몸짓으로 레오포드의 입에 달콤한 크림 과자를 하나 넣었다.
파삭하게 부서지는 크림 과자가 제법 입맛에 맞았다. 더불어 말끔히 단맛을 지우는 쌉싸름한 차향까지도 딱 제 취향이었다.
레오포드는 너그럽게 웃으며 마리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내 마리아. 그대의 말을 듣길 잘했어. 한결 기분이 좋아졌어.”
“두통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마리아는 유순하게 웃었다. 크림 과자와 레오포드가 좋아하는 차. 모두 마리아가 이 궁에 출입하기 전부터 늘 준비되어 있었던 거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 멍청한 것은 자신이 준비한 것을 이 마리아가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짜릿한 승리감에 취한 마리아가 돌연 부끄러운 척 얼굴을 숙였다.
“그런데 응접실이 너무 지저분했죠. 아까 너무 창피했어요.”
아까 전의 마리아는 충분히 그래 보였다. 서류가 이리저리 놓인 응접실을 보고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서류를 주워 올렸다.
서툴게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 그리고 제 눈치를 보듯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쳤을 때 애교스럽게 웃는 얼굴.
그래, 레오포드는 그런 마리아 에텔을 사랑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때로는 깜찍하게도 제게 무언가를 보여 주려 티를 내는 모습들까지.
“내 마리아가 약혼녀의 직무를 착실히 수행하는 모양이야. 이리도 열심히 하다니.”
“열심히 준비하고는 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앙큼하게도 마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예산 배정에서 아주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예산이?”
레오포드의 반응은 평소와 같았다. 자신감에 찬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네. 그래도 제가 여는 첫 연회인데…….”
“마리아.”
“네?”
제 말을 뚝 끊고 들어온 레오포드의 목소리에 마리아는 어리둥절했다. 상냥하게 웃는 레오포드의 얼굴이 어딘가 서늘하다 느끼던 찰나였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 마리아는 그 어떤 연회도 열지 않잖아, 그렇지?”
아차, 말실수다. 이건 약혼녀의 책무이자 동시에 황녀가 주관하는 여름 연회였다.
마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포드가 웃으며 마리아의 머리카락을 잡아 입을 맞췄다.
“예산이 부족하다니. 이전에는 한 번도 부족한 적 없었는데.”
순간 마리아의 심장이 훅 떨어졌다. 어디까지 준비되었냐는 말에도 선뜩했는데, 덧붙이는 저 말이 마리아를 아프게 후벼 팠다.
어떻게, 시녀들과 하지스 백작까지 시립한 이 공간에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하지만 레오포드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이 말이다.
“……는 이런 일 없었는데.”
주먹을 꽉 쥐어도 사라지지 않는 모습에 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새 레오포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연회를 하려고…….”
권태롭게 말하던 레오포드가 잠시 눈을 번뜩였다.
“……비칸데르 대공은 참석한다고 해?”
“네?”
“연회 말이야. 참석 의사는 도착했을 거 아냐.”
“그게…….”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레오포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올리비아는.”
덤덤하게 떨어진 이름에 마리아의 눈이 없이 커다래졌다. 이내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 마리아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게, 왜.”
“그 두 사람은 당연히 와야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레오포드가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니, 무엇이 당연할까. 머리가 새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물론 마리아도 올리비아가 연회에 오길 바랐다.
그 천한 눈이 저와 레오포드가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절망으로 물들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었다.
마리아가 대답하지 못하자 레오포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참석 여부에 대해 바로 답변이 나오지 않다니.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제가 마리아의 참석 여부에 대해 물을 때에도 늘 태연하게 대답했는데.
레오포드는 바로 소프론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참석 여부에 대한 답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송구합니다.”
승전 연회 전까지는 대공이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노련한 소프론 남작 부인조차 초대장을 보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공한테 초대장이 가긴 한 거야?”
“……송구합니다. 비칸데르령으로 간 전령의 소식이 끊어져 우선 대공저로 다시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대공저의 집사가 수신한 것까지는 확인되었습니다.”
“저, 태자 전하. 비칸데르령으로 간 전령의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의 대답 위로 하지스 백작의 보고가 겹쳐 떠올랐다.
레오포드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공이 초대장을 받지 못한다면 올리비아도 당연히 여름 연회에 오지 못할 터. 저와 올리비아를 끊어 놓으려는 듯 저열한 수였다.
그래 봤자 올리비아는 다시 제 옆으로 올 텐데. 당연한 결과를 두고도 뻔한 수를 부리는 모습에 레오포드는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애써 눌렀다.
“……대공이 참석을 안 한다면, 대공저의 집사한테 책임을 물어야겠군. 지금 가서 집사를 잡아 오는 게 나을까?”
“……전하. 대공의 참석을 강권할 명분이 없습니다.”
난처하다는 듯 말하는 하지스 백작의 말에 레오포드의 양미간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쾅-!
결국 레오포드가 거칠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조용해졌다.
“명분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날카로운 일갈이 응접실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놀란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오포드는 매서운 기세 그대로 성큼성큼 응접실을 나섰다. 하지스 백작이 그 뒤를 따른 다음에야 소프론 남작 부인은 고개를 들어 마리아 에텔을 바라보았다.
늘 사랑만 받던 영애는 토끼처럼 놀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이내 새파란 눈 위로 충격이 일렁였다. 마리아 에텔은 아마 처음 보는 모습일 거다.
태자 전하께서는 늘 마리아를 볼 때마다 다정한 모습이었으니까.
소프론 남작 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마디 했다.
“……성정 자체만으로도 제왕의 핏줄을 타고나신 분이십니다.”
곱게 돌려 말했지만 본뜻은 이랬다. 천하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분. 원래 그런 성정을 가진 분이 이제까지 마리아에게만은 상냥했다는 뜻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리아에게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한테는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는데.”
중얼거림을 들으며 소프론 남작 부인은 서둘러 태자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채 뛰기도 전에 부인은 저 멀리 서 있는 태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태자가 선 곳은 동편 복도였다. 원래라면 협탁과 푸른 수국이 있었을 곳.
하지만 지금 태자의 앞에 있는 건 화려한 화병과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색 리시안셔스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리시안셔스를 내려다보던 레오포드의 얼굴이 한순간 흐려졌다.
분명히, 이 티아제 궁에 오면…….
“……편안했던 것 같은데.”
흘리듯 나온 태자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무언가를 추억하듯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 찰나의 시간에 소프론 남작 부인은 얄궂게도 아주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 마델레이네 공녀가 이 협탁 위에 푸른 수국을 가져다 놓았을 때를 말이다.
“태자 전하께서 이 꽃을 보시면 눈이 편안하다 하셨거든요.”
“하지만, 이 꽃의 꽃말은.”
그때 소프론 남작 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한들 해맑게 웃는 공녀의 얼굴에 대고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무정, 이라죠.”
“아시면서.”
“하지만 그것도 아시죠? 이 수국은 토양에 따라 얼마든 색이 변할 수 있는 거. 그래서 남부 산성이 강한 곳에서는 이 푸른 수국을 보고 ‘기적’이라고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대 가득한 공녀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소프론 남작 부인이 눈을 깜빡였다. 어딘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태자가 다시 평소처럼 날카롭게 눈을 떴다.
그 순간, 소프론 남작 부인은 허망한 기적이 아주 뒤늦게서야 움트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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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위에 얹은 두 손이 덜덜 떨리는 동안,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늘 저런 시선을 받는 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몫이었다. 저는 그저 레오포드의 옆자리를 지키며 굳어지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표정을 구경할 뿐이었는데.
하지만 마리아 에텔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생각이 저를 집어삼키기 전에 마리아는 얼른 다른 수를 생각해야 했다.
지금 레오포드가 저러는 건 올리비아한테 지금 저와 레오포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대공과 올리비아한테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레오포드도 다시 저를 귀히 사랑할 것이었다.
부족한 예산이야 얼마든지 채울 수 있었다.
에텔 후작가는 아주 부유했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저를 사랑해 주셨으니까.
아버지한테 간다면, 부족한 예산을 채우는 것은 물론 좋은 방법을 생각해 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저만큼이나, 제가 확실한 태자비의 자리에 오르길 바라시니까.
“……오늘은 이만 가야겠어요. 마차를 준비해 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없는 귀족 영애처럼 그렁그렁하던 눈이 새파랗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에텔 후작가의 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화려하게 꾸민 정원으로 들어서는 마차에는 귀족파 수장인 엘킨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