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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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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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2022.10.09.
“……마, 음에 안 드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서야 올리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예뻐서.”
“정말요?”
올리비아가 실 발찌를 받아들며 말하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라고 종알거리며 한숨까지 내쉬는 귀여운 모습에 올리비아는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온기에 놀란 아이는 천사 같은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제가 선물한 발찌가 좋은지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뿌듯해진 아이는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아가씨께서 예쁘다 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엄마가 기뻐하실 거예요. 매번 아가씨께 감사하다고 그러셨거든요.”
“나도 감사하다 전해 주겠니?”
아이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중 누군가 샘내듯 말했다.
“우리 엄마도 만들 수 있어요! 저도 나중에 아가씨께 선물할래요!”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근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들뜬 듯 예니브 거리를 돌아보았다.
“역시 예니브로 오길 잘했어요! 이렇게 아가씨도 뵙고 더 이상 로브도 안 쓰고 낮에 막 놀아도 되고.”
“맞아! 저도요! 이모가 이곳은 믿을 수 있다고 해서 엄청 어렵게 온 거거든요.”
“저는 어떤 할아버지가 계속 여기 이야기해서 왔는데,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도 초록 눈이었던 걸까?
하지만 올리비아가 의아함을 품기도 전에 아이들의 화제는 빠르게 변했다. 재잘대는 목소리를 듣자 올리비아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고였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예니브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웃었다.
같은 초록 눈이라고 해도 아가씨는 엄연히 좋은 것만 사용하는 귀족일 테니 그런 실 발찌 거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귀하게 바라봐 주는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할 때, 올리비아는 다른 생각을 하며 실 발찌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십사 년 전, 유모한테 빼앗긴 뒤로 본 적 없었던 엄마의 유품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제도의 러헤이른 거리부터 수공예 공방까지 뒤졌어도 이 실 발찌와 비슷한 건 본 적 없었다.
초록 눈의 사람들끼리의 공통점이라고는 눈 색깔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실 발찌가 초록 눈의 사람들만 만드는 것이었을 줄이야.
혹시 제 출생이나 초록색 눈을 가진 사람들과 관련된 또 다른 비밀이 더 있지는 않을까. 올리비아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가락에 사락거리며 감기는 실 발찌의 감촉은 아주 어릴 적 제 머리를 쓸어 주던 엄마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꽃처럼 아름다웠던 엄마. 늘 카나리아처럼 고운 노래를 불러 주던 엄마.
올리비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가 부르던 노래의 음정이 어땠더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카나리아처럼 고운 목소리가 작게 음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노래 아냐?”
“저거 하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생경하다는 듯 한마디씩 하던 아이들이 점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경 어린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볼 때였다.
“누구야? 누가 노래를 불!”
갑자기 창문 너머로 누군가 소리쳤다. 눈이 마주쳤을 때, 올리비아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의 눈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올리비아를 본 여자의 얼굴이 회색이 되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가 거리로 나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몇 명 다가왔다. 다들 이 상황이 불편한 듯 연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하신 줄도 모르고.”
“혹시 예니브에서는 노래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냥 저희가 혹시 모를 상황을 예방하던 겁니다. 워낙…….”
말을 하던 사람은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이들이 누군가의 부름에 저만치 멀어졌을 때야 여자가 말을 이었다.
“……저희를 두고 무희의 핏줄이라고 하니까. 되레 저희는 더 노래나 춤을 멀리했거든요. 혹시나 더 안 좋은,”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올리비아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을 받을 수 있으니까.”
여자가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는 올리비아도 익히 짐작이 갔다.
폭력, 욕설, 혹은 그보다 심한 멸시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자는 올리비아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문득 디안이 예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께서는 초록색 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핍박받지 않는 유일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경멸. 무희의 핏줄이라는 편견.
“……겨우 눈 색깔 때문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조차 없었구나.”
올리비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예니브 거리를 바라보았다.
바꾸어야 할 것은 이 거리의 구획뿐이 아니라는 사실이 올리비아의 마음에 파도처럼 강하게 들이쳤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이 거리의 사람들을, 그리고 이제야 눈을 드러내고 뛰어다닌다는 아이들을 낱낱이 살폈다. 그 순간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순간 묘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무희 중에는 분명 초록 눈의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무희가 초록 눈은 아닐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 눈은 이 프란츠 제국 전체에 ‘천한 무희의 핏줄’이라고 낙인찍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안 좋은 시선을 받을까 노래와 춤을 극도로 경계하는 초록 눈의 사람들.
올리비아는 손바닥에 감싸 쥐었던 실 발찌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
.
.
집으로 들어간 여자, 비키는 한숨을 내쉬며 창문 너머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저를 향한 분노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노래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이 거리 사람들이 모두 조용할 때부터 아가씨가 부른 노래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초록 눈이라니.
감탄과 경외가 섞인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던 비키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나이가 드시고서 정신이 온전치 않아 늘 멍한 상태인 할머니가 식탁에서 일어나 여기까지 오다니. 그것도 몇 년 만에 눈에 총기를 띤 채로.
놀라움을 토로할 새도 없이 비키는 할머니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 모양에 집중하던 비키가 할머니의 말을 따라 했다.
“노, 래가 열 수 있다고? 뭘 열어?”
하지만 할머니는 비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처럼 푸근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 *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였지만, 티아제 궁의 집무실에는 늦봄의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책상 위로 쌓인 ‘여름 연회’ 서류들과 참석 답신들. 예산 배정과 콘셉트까지.
해야 할 일을 바라보던 마리아 에텔이 결국 화를 벌컥 냈다.
“뭐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게 많아!”
태자의 약혼녀가 보이기에 부적절한 언행이었다. 미리 시녀들을 내보낸 소프론 남작 부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정말 일을 다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면 소프론 남작 부인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황녀의 여름 연회는 정말 신경 쓸 게 많았으니까.
하지만 마리아 에텔은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연회의 콘셉트조차 잡지 못했다.
적어도 어떤 연회인지 가닥은 잡힌 채로 초대장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건만, 너무 지체되는 바람에 이번만은 예외로 초대장부터 보냈던 터였다.
그런데 참석 답신을 정리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다니.
참고 참던 소프론 남작 부인은 결국 입술을 떼었다.
“……여름 연회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황녀 전하께서 오시면 바로 티 파티까지 준비하셔야 할 텐데. 작년에 치른 여름 연회라도 참고하시는 게……”
“지금 나보고 겨우 작년 연회나 참고하라는 말이에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프론 남작 부인의 말을 잘랐다. 가느다랗게 치켜뜬 눈이 독기를 가득 담고 소프론 남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그동안 이 여름 연회가 누구의 손에서 꾸려진 것인지 다 알게 되었는데.
긍지 높은 에텔의 딸인 제게 감히 그 반쪽짜리의 연회를 참고하라니!
마리아는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것의 손길이 닿은 모든 물건을 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나 이 궁에는 그 반쪽짜리 사생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여름 연회를 제 약혼식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더 명확해졌다. 황궁에 남은 올리비아의 흔적을 싹 지운 채 모든 제국의 귀족들에게 제 자리를 각인시켜야 하는데.
“겨우 이 돈을 가지고 뭘 하란 말이에요!”
마리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일주일간의 연회를 준비하는데 겨우 이 예산이라니.
여름 연회를 준비하기에도, 마지막 날을 제 약혼식으로 만들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고압적인 눈빛에 소프론 남작 부인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든 여름 연회의 평균 예산입니다.”
말하자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그 정도 예산으로 연회를 치렀다는 거였다. 제가 물은 질문에조차 올리비아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모욕감에 휩싸인 마리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다시 연회의 참석자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답신이 오지 않은 사람들을 추리다가 하, 탁한 한숨을 뱉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초대장을 받았는지조차 확인 불가한 사람은 대공과 그 천것 단둘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올리비아 그 천한 반쪽짜리는 무조건 제 연회에 와야 했다.
와서, 누가 더 태자비 자리에 잘 어울리는지 그 천박한 초록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으니까.
마리아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쩍였다.
* * *
마차를 타려다 말고, 레오포드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황제 궁을 돌아보았다.
헤페르티와의 협상을 두고 외무부의 회의에 참석했던 중 만났던 콘라드 마델레이네 소공작의 태도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올리비아와 연락이 안 되는 것을 지적했더니 겨우 확인해 보겠다는 답변밖에 없었다.
앵무새처럼 제 아비와 똑같은 말만 지껄이다니.
하여튼 공작이고 그 아들이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겨우 올리비아 하나조차 회유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쩔쩔매다니.
차라리 귀족파의 수장인 외숙, 엘킨 공작이 더 제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레오포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마차에 올랐다. 상한 기분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데 보좌관인 하지스 백작이 공손하게 말했다.
“바로 티아제 궁으로 향하겠습니다.”
티아제 궁. 순간적으로 그 궁을 지키고 있을 사람을 떠올리던 레오포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모습은 화사한 금발이 아닌, 시린 은발을 지닌 뒷모습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요즘 많이 피곤한 모양이군. 겨우, 그런…….”
레오포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 어딘가 헛헛한 느낌이 그의 가슴속에서 점점 범위를 넓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