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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3) (63/151)


#063.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3)
2022.10.05.



 
올리비아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깥은 여전히 밤이었다.

단단하게 닫아 둔 창문을 조금 열자 선선한 밤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자 저 멀리 야간 순찰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대공성에서는 저런 식으로 야간 순찰을 도는구나. 마델레이네 공작저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달라서, 올리비아는 신기함을 느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저에서는 종종, 아니 어쩌면 자주 시종들의 야간 순찰을 보곤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혹은 잠들 수 없는 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대공저로 간 뒤, 아니 적어도 비칸데르령으로 온 뒤부터 이렇게 한밤중에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올리비아는 낯선 밤의 생경함 위로 익숙한 것을 찾았다.

제가 조금 전에 일어난 침대, 늘 일기를 쓰는 책상과 차를 마실 때 쓰는 테이블, 기대기 좋은 소파와 부티크처럼 많은 보석과 드레스가 있는 드레스 룸.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이 제게 낯익었다.

온전한 제 것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올리비아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행복들이 커다란 실체로 다가왔을 때, 올리비아의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이 행복이 정말 제 거라면, 지금 제게 온 가장 큰 행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생각을 마치는 동시에 올리비아는 급하게 방문 쪽으로 뛰어갔다. 에드윈의 침실 위치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작정 방문을 열고 나가면 에드윈에게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리비아?”

문을 열기 무섭게 문 옆에서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벽에 기대서 있던 에드윈이 느리게 몸을 세우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벌써 일어났어요?”

에드윈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몽롱하게 들렸다. 이 시간에 에드윈이 제 방 바로 앞에 있다니. 마치 제 바람이 그대로 실현된 것만 같은 이 순간이 혹시 꿈은 아닐까.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에드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끝에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라지지 않네요.”

“사라져야 할까요?”

장난 섞인 에드윈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그제야 아, 하며 허둥지둥 말했다.


“꿈, 이면 어떻게 하나. 아주 조금 걱정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에드윈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꿈일 리가.”

밤공기 위로 고혹적인 목소리가 낮게 웃었다.


“나야말로 꿈일까 봐 어젯밤부터 이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는데.”

맞잡은 손을 아쉽다는 듯 바라보던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걱정은 내게 맡기고, 올리비아는 들어가서 좀 더 자요.”

에드윈에게 밀리듯 방 안으로 들어선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모든 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 * *

아가씨가 말한 건축가가 예니브 거리에 도착했다.

아가씨가 아신다면 분명 기뻐하시리라, 활짝 웃을 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디안에게 날벼락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스톤 남작한테 예물용 반지로 사용할 보석을 받아 오라고요? 진짜요? 제가요?”

몇 번이고 반복되는 질문에 이제 베서니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왜지? 자신은 엄연히 아가씨의 옆을 떠나지 않아야 할 호위 기사인데.

하지만 다시 물을 새도 없이 대공 전하와 아가씨가 마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른 예를 갖추던 디안은 두 사람에게서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원래부터 대공 전하가 아가씨를 귀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가 제 발로 걸을 수 있거든요?”

“닳을까 봐 안 되겠는데요?”

“구두가요?”

“올리비아가요.”

……저 정도로 사람들 앞에서 걸음도 못 옮기게 하시지는 않았다.

디안은 저도 모르게 팔뚝을 쓸어내렸다.

무엇보다 대공 전하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조용히 자리를 떠난 디안 외에도 많은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느껴지는 시선에 부끄러움을 삼키며 올리비아는 짐짓 에드윈을 흘겨보았다.


“계속 그렇게 말해도 오늘은 스젤린 경과 다녀올 거예요, 밤새 거기에 서 있었다면서요. 에드윈은 푹 자고 있어요.”

단호하게 떨어지는 올리비아의 말에 에드윈은 낭패 섞인 탁음을 흘렸다.

디안을 스톤 남작에게 보내고 제가 대신 올리비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필 ‘어젯밤부터 올리비아의 방 앞에 서 있었다’는 말을 해서 강제 휴식을 부여받다니.

토라진 척도 해 보고 애교도 부려 보았지만 올리비아는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에드윈이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뒤에 있던 하워드가 성큼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디안에게 다른 일이 있어서 제가 모시겠습니다. 디안이 말하길,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던 건축가’가 예니브 거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올리비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얼굴에 샘이 났는지 에드윈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올리비아를 졸랐다.


“정말 나를 두고 갈 거예요?”

잠시간 에드윈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에드윈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반지를 구하려면 저를 따라올 시간이 없을 텐데요? 저는 정말 귀한 반지로만 받을 건데, 어젯밤 삼 일 내에 가져온다고 했으니 이제 겨우 이틀 남았잖아요?”

그 말에 에드윈이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마차의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웃던 올리비아가 우아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 * *

예니브 거리 사업을 진행하면서 올리비아가 바라는 건 한 가지였다.

초록 눈의 사람들이 당당하게 이 예니브에서 살 수 있게 안식처의 느낌을 주면서도 사라지지 않을 거리로 변모하는 것.


“……역시 매번 느끼지만 너무 어려운 과제를 주십니다.”

그리고 투덜대듯 말하는 이 중년의 남자는 그걸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맡기는 겁니다, 슈른 카레인 씨.”

올리비아의 진심 어린 말에 슈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엄살을 떨던 걸 지우기라도 하듯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에는 두 번에 나누어 대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으십니까? 십 퍼센트라도…….”

“한 번에 대금을 지급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러겠어요.”

올리비아가 능청스레 말하며 예니브 거리를 쭉 바라보았다. 바뀌고 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풍경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꼭꼭 눈에 담았다.


“이제까지의 상황은 스젤린 경한테 들었으니, 잠시 거리를 둘러보아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인터필드 경.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슈른의 요구에 하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예니브 거리를 안내하기 위해 먼저 앞서 나갔다.

.
.
.



“이야, 정말 보기 드물게 초록 눈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네요.”

슈른 카레인. 특이 사항으로는 황녀의 영지인 트리스탄 곡창 지대에서 수로 공사를 담당했던 건축가. 이번 구획 정리에서는 도로와 집의 배치 계획을 담당할 예정.


“공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런 터를 그대로 두는 건 좋겠네요. 도로도 쭉 뻗어 있는 데다 넓으니.”

진지하게 예니브 거리를 보는 슈른의 모습을 보며 하워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아가씨.”

“아 참, 그랬죠.”

더벅머리를 긁적이던 슈른이 새삼스럽다는 듯 뒤를 돌았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긴, 그런 식으로 대금을 나누어 지급하실 정도의 배포가 있으셨는데, 당연히 잘되시는 게 맞지.”

그 말에 하워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원래 대금은 나누어 지급하는 거 아닙니까?”

선금과 중도금, 마지막 잔금까지 보통 세 번에 나누어 지급하는 게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슈른은 오히려 몰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대금을 나누어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공, 아니 아가씨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금을 나누어 지급하셨어요.”

슈른의 눈앞에 이 년 전의 일이 펼쳐지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런 밀밭이 마음까지 넉넉하게 만들던 가을이었다.

황녀의 풍요로운 영지, 트리스탄 곡창 지대의 수로 공사를 시작하던 날이기도 했다.

성녀 같은 황녀가 진두지휘하는 사업이라는 말에 참여했던 건축가들과 인부들은 은발에 초록 눈을 한 공녀를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깔끔하게 일을 지시하는 공녀의 말에 점차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을 때였다.


“대금을 지급하기에 앞서, 여러분들께 두 가지 지급 방법에 대해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그대로 선금, 중도금, 지급 후 시공이 끝날 시 잔금까지 지급하는 방법이고.”

 
대금 지급 방법이 두 가지나 있다 하니 유심히 듣던 사람들은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첫 번째 방안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와 동시에 공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선금을 먼저 지급 후, 시공이 끝난 후 중도금과 잔금을 한 번에 지급하는 겁니다. 물론 늦게 드리는 만큼 중도금과 잔금을 포함한 금액의 십오 퍼센트를 추가 지급해 드리죠.”

 


“십오 퍼센트나?”

놀란 하워드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슈른이 피식 웃었다. 귀족 나리가 생각해도 놀랄 일이긴 했나 보다. 하긴 자신들 역시 눈을 커다랗게 떴으니까.


“예산이 정해져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냥 1안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저는 2안을 선택해서 진짜 십오 퍼센트를 추가로 더 받았지만요.”

“어떻게…….”

슈른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기사의 얼굴에 으스대듯 말했다.


“저희 사이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햇밀이 수확되었을 때 아가씨께서 인부들에게 지급했어야 할 중도금으로 미처 판매되지 않은 묵은 밀을 전량 값싸게 구매하셨다고 합니다.”

묵은 밀. 그 단어를 듣자마자, 하워드의 머릿속에는 반사적으로 리테일 영지의 춘궁기를 해결한 황녀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춘궁기 때 다른 영지에 판매하면서 거기서 난 이익으로 저희의 대금까지 다 치러 주신 거고요.”

슈른의 말은 하워드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어쩐지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지만 하워드는 분위기에 취해 제가 할 일을 놓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슈른 카레인 씨.”

“네?”

“그 말, 확인 가능한 겁니까?”

어딘가 무거운 음성에 슈른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하워드가 긴장을 삼킬 때였다.


“난 또 뭐라고. 뭘 그렇게 무게 있게 말씀하십니까. 당연하죠. 나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던 설계사며 인부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쾌활하게 답하는 슈른의 모습에 하워드는 가만히 대공성을 바라보았다.

늘 아가씨가 황녀의 선행을 대신 했다는 심증만이 전부였는데, 이렇게 뚜렷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니. 다행인 동시에 한편으로 마음이 쓰였다.

제가 이 정도인데. 이 사실을 듣게 되는 대공 전하께서는 어떤 기분이실지, 그리고 당사자인 아가씨는 어떤 일을 겪어 오셨을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 * *

값비싼 자재들과 넉넉한 인부들. 그리고 언제든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까지.


“이번에는 두 번에 나누어 대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으십니까?”

 
슈른의 말을 들었을 때, 올리비아는 잠시 아주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공사 대금을 지급할 돈이 부족해 어떻게든 꾀를 내었어야 했던 그때로.

올리비아는 옅게 웃었다.

황녀가 주는 돈은 언제나 평균 수준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 생기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아 늘 예산이 부족했다.

다행히 황녀의 영지는 대체로 풍요로웠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장부를 보면서 영리하게 자금을 굴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익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콘라드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배정된 예산 내에서 사용하려면 돈을 돌릴 줄도 알아야지. 멍청하게 그걸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주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흘러 나가는 동안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반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를 두고 갈 거예요?”

 
마지막까지 애처로운 척을 하며 배웅을 하던 에드윈. 그 모습을 떠올리자 올리비아의 기분이 한결 유쾌해졌다. 그가 어서 반지를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아가씨!”

한 무리의 꼬마들이 올리비아를 향해 달려왔다.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더러운 옷을 입지 않았고, 로브로 얼굴을 숨기지도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들이 선망 가득한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이 거리에서 올리비아는 영웅이자 천사 그 자체였다. 모두가 아가씨라 부르며 존경하는 분.

그런 분한테 말을 걸게 된 꼬마 제인은 두근대는 심장을 꾹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저, 아가씨께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올리비아는 몸을 굽히며 아이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몸을 배배 꼬는 아이는 꼭 제게 꽃을 주었던 러헤이른의 갈색 머리 아이처럼 천진하게 저를 바라봐 주었다.

아이가 주는 게 무엇이든 기뻐해야지, 올리비아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올리비아는 차마 그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발찌예요. 엄마가 아가씨께 꼭 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만드셔서 부족해도 예쁘게 봐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이게 소원을 이루어 준대요!”

설렘 가득한 아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올리비아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아이의 손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살이 오르는 작은 손바닥 위, 그 위에 놓인 건 색색의 실을 꼬아 만든 실 발찌였다.


 
독특한 매듭을 이용해 실을 꼬고 엮는 방법은 아주 오래전, 유모한테 빼앗긴 뒤 다신 보지 못한 어머니의 실 발찌와 너무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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