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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 (2) (62/151)


#062.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 (2)
2022.10.02.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지는 순간부터 목 부근이 따뜻해졌다.

올리비아는 오른손으로 제 목에 걸린 마석을 만지작거리는 동시에 왼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불꽃처럼 일렁이는 반지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베서니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고르고 골라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이즈가 딱 맞네요.”

올리비아는 자신이 말하고도 조금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맞춘 것처럼 제 손가락 사이즈에 딱 맞는 반지였다.


“그야, 한 사람만을 위한 반지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에드윈이 눈을 휘어 웃었다. 올리비아는 그와 눈을 맞추기 무섭게 시선을 피했다. 뺨 위로 더운 기운이 홧홧하게 올라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저 다정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까.

보기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리고 심박이 커다랗게 뛰게 만드는 붉은 눈을 떠올리다가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눈앞에 에드윈을 두고 또 에드윈 생각이다. 어차피 자주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 텐데.

올리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드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드윈은 반지 없어요? 제가 끼워 줄게요.”

화사하게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반지를 내밀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에드윈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지금 그 말 딱 삼 일만 더 기다렸다가 다시 해 줄 수 있어요?”

“네?”

“그게, 아직 예물용 반지는 세공 중이거든요. 최대한 삼 일 안에 가져오라고 할 테니, 딱 삼 일만 더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그들 뒤에 있는 베서니가 할 말 가득한 얼굴로 에드윈을 쳐다보았지만, 에드윈은 아랑곳 않고 간절한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요?”

청혼용 반지가 결혼 예물용 반지도 되는 제도의 청혼 문화가 자연스러웠던 올리비아의 물음에 에드윈은 빙그레 웃었다.


“이건 말했다시피 청혼용 반지예요. 내가 가장 아끼는 반지라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 반지로 바로 청혼을 하고 싶었거든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올리비아는 잠시 마담 데톤의 부티크에서 저 반지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저 반지가 당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또한.


“되게 늦었는데 아가씨가 원한다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보죠.”

 
저를 마델레이네 공작저로 데려다주던 마차 안에서 에드윈이 다시 한번 반지를 꺼내 주던 때도.


“드디어, 이 반지가 제자리를 찾아갔네요.”

 
그리고 지금.

돌고 돌아온 반지가 겨우 제 손가락에 끼워졌다.

올리비아가 인식하지 못한 채 다른 손으로 반지를 쓸어 보았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짓에 에드윈의 눈이 느른하게 휘어지던 참이었다.

올리비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 반지도 너무 좋지만…….”

우물쭈물하며 시작되는 말에 에드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반지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반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이내 나온 올리비아의 대답에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예물 반지도 끼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올리비아가 에드윈의 왼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 손과 달리 장신구 하나 없는 손은 누가 봐도 미혼이라는 증거였다.

에드윈의 손에 저와 같은 반지를 낀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기에 삼 일이든 삼 주든, 아니 삼 개월도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반지를 끼기 위한 기다림은 오히려 제게 설렘으로 자리 잡을 테니까.

하지만 같은 반지를 낄 수 있다고 해서 이 붉은 보석 반지를 뺄 수는 없었다.


“하하하.”

시원스레 터진 근사한 웃음소리에 올리비아는 짐짓 에드윈을 흘겨보았다.


“왜 웃어요.”

그 새침한 눈매조차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드럽게 휘어졌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그러면 같이 끼우면 되죠.”

“네?”

올리비아의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는 순간,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제 아가씨는 매 순간 저를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른하게 몰려오는 열기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글맞게 웃었다.


“……곧 이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우게 될 참인데,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

“농담이죠?”

“그럴 리가요.”

화사하게 웃으며 딱 잘라 말한 에드윈은 마치 연기라도 하듯 덧붙였다.


“오, 어느덧 밤이네요. 잠자리까지는 내가 에스코트하죠.”

 

.
.
.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문 앞까지 왔을 때, 에드윈은 신사 같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행복한 밤 보내고, 내일 아침에 봐요.”

사려 깊게도 늘 방문 앞까지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에드윈은 언제나 이 방문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 딱 한 번. 백수정 광산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밝혔을 때, 베서니가 제 앞에 엎드렸을 때를 빼면 정말로.

평소라면 이쯤에서 방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베서니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빤히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올리비아의 시선이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왜 안 들어가고 그렇게 보실까?”

나른한 목소리와 달리 진득하게 가라앉은 눈이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묘하게 짙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올리비아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다 멈췄다.

모양 좋은 붉은 입술. 제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자각도 못 한 채로 올리비아는 자꾸만 에드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손바닥과 팔목 안쪽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느낌 가득한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순식간에 동굴에서 손을 맞잡고 밤새 걸었던 게 머릿속에 둥둥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이 손을 밤새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에드윈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계속 그렇게 보다가는 한없이 여기에 있게 될 것 같은데?”

순진하게도 에드윈은 이 방문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올리비아의 뺨 위로 발그레한 물이 들었다.


“어라, 더워요? 뺨이 붉은데.”

의아하다는 듯 묻던 에드윈이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올리비아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스치듯 훑고 지나간 손가락의 열기가 올리비아의 뺨에 고스란히 붙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에드윈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 렇네요. 좀 덥네요. 에드윈도 잘 자요.”

“잊은 게 있으실 텐데.”

지금 당장 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올리비아를 잡은 건 에드윈이었다.

잊은 거라니. 그런 게 기억날 리가.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숨기고 싶은 올리비아는 당혹스러움에 커다란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느긋하게 그 모습을 감상하던 에드윈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올리비아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훅, 청량한 향이 끼치는 동시에 올리비아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에드윈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 이제 잘 자라는 인사 뒤에 가벼운 키스까지는 허락되는 사이잖아요. 그렇죠?”

그 목소리에 귓가의 솜털이 바짝 설 만큼 오싹해지고 등줄기를 타고 긴장감이 훅 내리 떨어졌다. 하지만 에드윈은 순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올리비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댔다. 조금 전까지 바라만 보았던 붉은 입술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올리비아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혹적으로 웃고 있던 붉은 눈이 어딘가 모르게 성마른 느낌으로 번들거렸다. 에드윈이 다가오는 순간, 올리비아는 눈을 꼭 감았다.

제 입술 위로 다가올 것을 기다리던 찰나,

녹아내릴 듯 다정한 입술이 올리비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서 느껴지는 상냥한 입맞춤은 올리비아가 눈을 뜨기도 전에 떨어졌다.


 


“잘 자요.”

말갛게 웃는 에드윈이 문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올리비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이 모든 게 멍하게 느껴지는 사이, 베서니가 문을 닫았다.

에드윈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에서야 올리비아는 얼떨떨하게 제 뺨을 쓸어내렸다. 입술 자국이 남지도 않았을 텐데 에드윈이 입을 맞춘 부분이 홧홧했다.

묘한 아쉬움에 자꾸만 문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순간, 정적을 가르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베서니!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노래하듯 말하는 베서니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창피함에 어쩔 줄 몰랐다. 평소라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일기라도 쓰다가 베서니의 잔소리에 침대로 갔을 텐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무엇을 할 생각도 못 한 채 올리비아는 곧장 침대로 갔다.

새처럼 머리만 숨기면 되는 게 아닌데도 올리비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가씨, 잠옷은요?”

말을 하는 베서니도 올리비아가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을 안 모양이다. 웃음기를 숨기는 대신, 더 이상 올리비아를 부르지 않고 서둘러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가 된 방 안에서, 간신히 감정을 정리한 올리비아는 이불을 얼굴 밑으로 내렸다.

이불 속에 갇혔던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에드윈 탓인지. 뺨에 닿은 온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반지를 낀 손을 그대로 제 심장 위에 가져다 대었다.

방에 흐르는 적막 위로 올리비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얹어졌다.

마음이 충족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이 기분 좋은 느낌.

성큼성큼 걸어와 올리비아를 감싸던 행복이 와락 올리비아한테 뛰어들었다.

제게도 행복이 이렇게 가까이 올 수 있는 거였다. 그것을 만끽하듯 올리비아는 더없이 활짝 웃었다.

* * *

한편 부러 나가는 티를 내며 올리비아의 방을 나선 베서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문 앞에 있는 대공 전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신사답게 아가씨를 에스코트했던 대공은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베서니가 나온 방문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바라보다가는 이 단단한 문도 뚫어지겠다. 역시 아까 식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흐뭇하게 웃던 베서니는 아차 하며 대공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전하. 어떻게 하시려고 반지를 삼 일 뒤에 가져온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직 보석을 캐지도 못했을 텐데.

베서니는 지난번 대공이 광산 책임자인 스톤 남작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내 아가씨께서 낄 반지야. 자작이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를 가져다줄 거라는 걸 난 믿어 의심치 않아.”

 
저렇게까지 다정하게 말을 하는 대공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믿음에 보답하겠다며, 기쁨에 겨워하던 스톤 남작의 배 둘레가 벌써 몇 인치나 줄어들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라. 지난번에 이미 아가씨한테 가장 좋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바쳤던 것을 고려하지 않는 대공의 모습에 베서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베서니의 마음속에도 아가씨는 가장 좋은 보석으로 만든 반지를 끼셔야 할, 아주 귀한 분이었으니까.


“삼 일이 맞아. 오늘 밤 지나면 이틀이겠네.”

“네?”

생각에 빠져 있던 베서니는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런 베서니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이틀이면 반지를 가져오고도 남을 시간 아냐?”

“아직 스톤 남작한테 소식이 들어온 게 없는데요?”

“예물용 반지가 하나일 필요는 없잖아.”

“그야…….”

무심코 대답을 하던 베서니의 입가에 아하, 이해의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그녀도 잠시 아가씨의 방을 바라보았다.

귀하디귀한 아가씨께서는 정말로 열 손가락 가득 화려한 보석 반지를 낄 예정이었다.


“바로 스톤 남작한테 연락해서 세공된 반지를 선별하라 하겠습니다.”

“가져오는 건 디안한테 맡기고.”

“디안한테요?”

늘 일을 맡기는 하워드도 아니고 굳이 아가씨의 호위를 맡고 있는 디안한테?

의아하다는 시선에 대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렸다.


“그 녀석, 생각보다 너무 애교가 많아서 안 되겠어. 나갔다 하면 좀처럼 내 아가씨 곁에서 떨어지질 않아.”

그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훤칠한 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서니의 얼굴에 천천히 흐뭇한 웃음이 고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초상화 속 공주님께 전할 이야기가 아주 많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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