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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 (1) (61/151)


#061.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소중한 것들 (1)
2022.09.28.


창문에 노을이 넘실대는 저녁 시간.


“……내가 잘못 들은 거죠? 마법 인장을 예약하다니.”

식당에서 올리비아와 마주 앉은 에드윈은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단박에 부정하는 올리비아의 말에 에드윈의 얼굴 위로 미세하게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늘 여유로운 에드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에드윈이 당황하거나 수줍어할 때면 짓궂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백수정 광산이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어머니의 유품이자 로웰의 보물이라면서 저렇게 떨떠름한 반응이라니.

……많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제 광산에 대해 알고 난 뒤 벅찬 얼굴을 했을 때처럼.

올리비아는 애써 서운한 마음을 누르며 말했다.


“정확히 다시 말씀드릴게요. 마법 인장에 예약을 걸어 우리가 혼인을 하는 날, 자동적으로 백수정 광산이 비칸데르 대공 부부의 공동 소유가 되게 하는 거죠. 아주 예전에 왕족끼리 정혼을 하는 것처럼요.”

올리비아가 떠올린 방식은 자신과 에드윈의 결혼을 막는 ‘일 년간의 유예’처럼 고서에 나오던 방식이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베서니를 바라보았다.


“……물론, ‘북쪽의 마법사’ 베서니가 도와줘야 하겠지만요.”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저야 무슨 일이든 환영입니다.”

베서니가 환하게 웃었다. 이게 바로 올리비아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안도감에 올리비아가 조금 웃는 사이, 베서니는 빠르게 에드윈을 향해 눈짓했다.

‘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무엇 하느냐’는 뜻이었지만, 에드윈은 쉽사리 웃을 수 없었다.

푹 자고 오길 바랐다. 대뜸 제게 백수정 광산을 양도한다는 생각 따위는 싹 날려 보내고 좋은 꿈만 꾸길 빌었다.

그런데.

들뜬 얼굴로 백수정 광산을 제게 준다는 이야기부터 하는 올리비아를 보는 순간, 식탁 아래에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속이 아릿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밀어붙이듯 주는 제 선물들에는 마냥 당황했으면서, 예니브 거리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는 올리비아.

전장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 챙겨 보내던,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걱정 많고 정 많은 묘한 후원자 리브 그린.

늘 똑 부러지던 제 아가씨는 이번에는 저를 보면서 기대에 찬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계된 생각들이 점차 하나의 퍼즐을 이루어 갔다. 완성된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에드윈은 숨이 턱 막혔다.

늘 가족들을, 그리고 사람 같지도 않던 태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던 올리비아라서.

에드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나 올리비아를 대하던 제 모습에 부담을 느껴서 제게 더 잘해 주려고 하는 걸까.

에드윈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비아를 살피려 할 때였다.


“실례할게요.”

다정한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바로 앞에 와 있는 올리비아의 얼굴에 에드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에드윈보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조금 더 높았다. 늘 올려다보던 에드윈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생경해서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제가 다가오는 것도 몰라요.”

더불어 뒤에 서 있던 베서니와 인터필드 경, 그리고 사용인까지 물렸는데도 말이다.

선물이 아닌, 슬픈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표정도 어두워지고.

올리비아는 뒷말을 삼켰다. 올리비아를 올려다보는 붉은 눈 위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늘 다정하게, 때로는 탐하듯 저를 바라보는 평소 그의 눈빛과 달리 먹먹하고 무거워서. 올리비아는 가만히 에드윈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에드윈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왜 늘 주려고만 해요.”

“……제가요?”

올리비아는 순간 당황해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드레스에 보석, 돌아갈 곳. 받기만 한 건 도리어 저였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수정 광산은, 올리비아 거예요. 나한테 그렇게 쉽게 양도한다거나, 지금 바로 공동 소유로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하지만 나직한 에드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올리비아는 아주 조금 에드윈의 속내를 엿본 것 같았다.


“……온전한 올리비아 몫이라고요.”

온전한 제 몫.

언제나 에드윈이 제게 주고 싶어 했던 것들.

에드윈이 잠시 말끝을 흐리는 사이,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주체하려 해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벅찼다.

예니브 거리가 완성되는 날, 말하고 싶었는데.

이렇게까지 제가 참을성이 없는 줄 몰랐다.

왈칵 올라온 이 감정을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덥석 에드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에드윈이 조금 놀란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저는 제가…… 에드윈을 닮아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긴장감 탓인지, 아니면 기대 탓인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미리 사람들을 물리길 잘했다.

올리비아는 제가 끌어 잡은 에드윈의 손을 느리게 펴 손바닥을 보이게 했다.

순순히 제 뜻에 따르는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대던 순간.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손바닥 위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 위로 닿는 손바닥이 잘게 떨렸다. 더없이 애틋하고, 지독하게 닿고 싶은 이 손을. 오늘에서야 겨우 마주 잡았다.

부디 제 고백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며 올리비아는 입술을 떼었다.


“……나도 간절히 청하고 있어요.”

“알고, 있었어요?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게 어떤 의미인지?”

손바닥에 하는 키스의 의미.

당신을 간절히 청합니다.

잔뜩 잠긴 에드윈의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여유로운 척 말했다.


“설마 제가 아직도 모를 줄 알았어요? 상당히 순진하시네요, 대공 전하.”

에드윈은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제가 늘 그렇게 도서관을 찾았던 초기의 목적을. 예니브 거리 이전에, 제게 더 중요한 건 에드윈이라는 사실도.

혼란과 기쁨이 뒤섞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에드윈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에드윈의 손목이 드러났을 때, 올리비아는 한 음절, 한 음절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탐하고, 바라고 있어요. 가장 귀한 당신을.”

 


“나는 언제나 탐을 내는 자거든요. 자연히 내게는 가장 마음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귀한 것들이 가득하지 않겠어요?”

 
손목에 하는 키스의 의미.

당신을 욕망합니다.

입술에 닿는 맥박이 더없이 뜨거웠다. 올리비아는 그 맥박 위로 저를 각인시키듯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떼며 자연스레 에드윈의 손에 제 손가락을 겹쳐 잡았다.

마주 보던 에드윈의 붉은 눈이 점점 짙어졌다.

식당 위로 서로의 느린 호흡 소리만 얽혔다.


“……저도 에드윈과 똑같은 마음이에요.”

에드윈의 손안에 감싸진 올리비아의 작고 여린 손이 꼼질대었다. 이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저를 생각해 주었으면 해서. 그래서 더 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제게 잘 보이고 싶다는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에드윈의 심장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뛰었다.

홍조 어린 사랑스러운 얼굴이 저를 마주하며 말했다.


“……가장 귀한 당신이 원하는 바를.”

 


“가장 귀한 당신이 원하는 바를.”

 
올리비아의 말 위로 제가 했던 말이 선연하게 떠오른 순간,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삼켰다.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손도, 시선도 놓지 않는 올리비아.

눈앞에 있는 제 아가씨는 저를 향해 당당히 선언하고 있었다.

제가 올리비아한테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그래서, 이런 제 선물을 거절할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해 줘요.”

에드윈이 쥐어짜듯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이 믿기지 않는 순간이 영원이 되었으면 하는 애원이라 해도 좋았다.

올리비아 역시 저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에드윈.”

부끄러움 가득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떨리는 진심이 그에게 닿았다. 숨을 참았던 에드윈의 온몸에 새로운 호흡이 돌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붉게 번지는 에드윈의 눈을 마주했다. 몸에 닿는 에드윈의 모든 시선이 간지럽고, 또 좋았다.

에드윈은 모르겠지만 이 말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에드윈 덕이었다.

에드윈이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워 주었던 제 기대와 바람이 완연히 자라났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제 마음을 다해서요.”

찬연하게 빛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노라고.


 
그 순간이었다. 맞잡은 손이 확 끌어당겨지더니 이내 더운 몸이 올리비아를 감싸듯 껴안았다. 꼭 맞추어 포개 오는 에드윈의 몸짓이 제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요, 올리비아.”

귓전에 닿는 녹녹하고 근사한 목소리가 저를 향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올리비아는 더 이상 제 기대가 짓밟힐 일은 없으리라는 데 감히 평생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알고 있었음에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힘주어 안았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심장 소리가 서로의 오른쪽 가슴까지 꽉 채워 나갔다.

.
.
.



“마법 인장을 찍기 전에, 먼저 두 분께서 서명을 해 주시면 됩니다.”

어둠이 짙어진 저녁의 응접실.

베서니는 의혹 가득한 눈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옆을 연신 힐끔대면서도 시선이 마주치면 얼굴이 붉어지는 아가씨와 그런 아가씨를 잡아먹을 듯 느른하게 바라보는 대공 전하.


“잠시 모두 자리를 비워 주겠어요.”

 
전하가 생각에 빠진 틈을 타 모두를 물렸던 아가씨의 말대로 정말 잠시 식당을 비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식당 안은 어쩐지 묘하게 달아오른 공기로 가득했다. 자연히 베서니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두 분을 바라보았다.

마주 보고 앉아 있던 게 무색할 만큼, 서로 바투 앉은 둘의 모습은 식당을 나가기 전, 베서니가 기대한 그대로였다.


“……디저트를 내오겠습니다.”

 
베서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꼼꼼히 두 분의 모습을 살폈다. 민망한 듯 연신 먼발치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늘 바르게 다려져 있던 대공 전하의 셔츠 앞자락이 구겨졌는데.

흐뭇해하던 베서니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너무 멀쩡했다. 심지어 아가씨의 입술에 연하게 바른 립스틱조차 번진 기색 하나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보이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던 걸까? 저렇게 혈기 왕성한 나이의 두 분이, 정말로? 아무것도?

그런 베서니의 마음은 하나도 모른 채, 올리비아는 긴장 어린 눈으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자요, 올리비아.”

시원스레 웃는 에드윈의 눈이 오늘따라 다정해서. 올리비아는 서류를 받아 들자마자 에드윈의 이름 옆에 제 이름을 썼다.

- 올리비아.

이제 성이 없는 제 이름을 바라보다가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이름을 힐끗 바라보았다.

- 에드윈 R. 비칸데르.

저 성이 이제 곧 제 이름 뒤에 붙는다고 생각하니 기분 좋은 긴장이 올리비아의 몸을 스쳤다.

에드윈의 필체를 보던 올리비아가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올리비아는 긴장 때문이겠거니 하며 넘겼다.

타이밍 좋게 베서니가 올리비아를 불렀다.


“다 적으셨나요?”

“네.”

잠시간 올리비아의 이름을 바라보던 베서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마법 인장을 찍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로써 두 분께서 결혼식을 올리는 날, 이 백수정 광산 역시 부부의 공동 소유로 자동 이전될 예정입니다.”

엄숙하게 느껴지는 베서니의 말이 꼭 결혼 서약을 알리는 마지막 말처럼 느껴졌다. 별거 아닌 일에도 계속 이렇게 부끄러워지는 건, 조금 전 제가 에드윈에게 고백했기 때문일 거다.


“다 끝났는데, 자러 갈까요?”

어색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가 들어도 딱딱했다.

제게 용기 있게 말하던 모습은 어딜 가고, 이제 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에드윈은 느리게 웃었다.


“이건 가져가야죠.”

그리고 품에서 반지 케이스 하나를 꺼내 열었다. 이상하게도 눈에 익은 케이스가 열리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아, 탄성을 냈다.

저건 마담 데톤의 부티크에서 보았던 에드윈의 반지였다. 그것도 청혼용 반지.

불에 타는 것처럼 일렁이는 붉은 보석 반지를, 에드윈은 자연스레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끌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올리비아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이보리색 드레스, 저와 에드윈의 서명을 동시에 적은 서류,

그리고 청혼용 반지까지.

정말 우습게도. 이게 약혼식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드윈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드디어, 이 반지가 제자리를 찾아갔네요.”

타오르듯 붉은 반지가 일순간 불꽃처럼 반짝였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야 바깥에 있는 올리비아의 마석 목걸이 역시 반짝였다.

마치 서로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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