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독기 어린 준비와 손쉬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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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독기 어린 준비와 손쉬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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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독기 어린 준비와 손쉬운 선택
2022.09.21.
에셀라는 닫힌 문가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문 너머로 기척이 느껴질 리 없었지만 어쩐지 콘라드가 계속 제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얼른 와서 식사하세요.”
뒤에서 베로니카가 저를 불렀지만 에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주방장에게는 미안하지만, 저 가벼운 샐러드와 수프조차도 비울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불편했다.
둘 다 알지만, 둘 다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이야기.
어쩌다 콘라드와 이렇게 거북한 사이가 된 걸까. 가장 사랑했고 완벽했던 제 가족이.
아니, ‘완벽했던’은 빼자. 에셀라는 씁쓰레한 기분을 삼키며 벽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들어올 수 없는 제 방의 벽면에 걸린 초상화는 거실에 있던 가족 초상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제는 저 초상화 속 언니가 긴장과 어색함으로 웃지 않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언니를 위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에셀라는 부러 가벼운 숨을 뱉으며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베로니카, 어디까지 했지?”
“찻잔 잡는 법까지였지만……. 아가씨께서는 이미 사교계 매너는 다 꿰차고 있으시잖아요.”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가신 가문 영애인 베로니카는 에셀라와 달리 제법 사교계에 익숙했다. 하지만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에셀라도 베로니카가 익힌 매너 정도는 이미 노련하게 해낼 수 있었다.
베로니카가 주저하듯 말했다.
“그것보다 소공작님께서 아가씨가 사교계에 나가신다는 것을 다 아신 모양인데, 정말 앞으로는 공식적으로 티 파티에 참석하시게요?”
에셀라는 피식 웃으며 책상 위를 눈짓했다.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편지들은 모두 다 티 파티 초대장이었다.
“오라버니가 알았으니 더 당당하게 가야지. 수업을 통해 배운 것과 실전은 다를 수 있으니까 가벼운 티 파티부터 참석해 보려고.”
에셀라는 지금도 황녀를 만났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대화들. 순간적으로 저만 소외되는 분위기와 신경을 거스르는 웃음소리.
그리고 마구잡이로 제게 쏟아지던 말들까지.
제게도 그렇게 했는데 당사자인 언니한테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만 해도 피가 차게 식어서, 에셀라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베로니카가 이야기했잖아. 사교계는 여왕이 휘어잡는 대로 흘러간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사교계는 분위기를 장악하는 레이디의 입맛대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셀라가 말한 것도 틀린 것은 아니라 베로니카는 듣고만 있었다.
에셀라는 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다 도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사교계의 여왕이었으니, 당연히 그다음 자리도 내 것이어야지. 앞으로 열릴 티 파티부터 연회까지 전부 다.”
마치 당연하게 자리를 이어받도록 예정된 듯한 선언이었다. 언니한테 모욕을 주었던 황녀와 대치하는 건 저여야만 했다.
데뷔탕트도 일 년이나 남은 아가씨가 하기에는 퍽 오만한 말이었지만 베로니카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곧 황궁의 여름 연회네요. 이번에도 황녀 전하께서 주도적으로 준비하시겠죠?”
베로니카의 말에 에셀라가 가볍게 웃었다.
이 년 전부터 여름 연회의 호스트는 황녀였다.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첫 여름 연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황녀는 단숨에 사교계의 꽃으로 등극했다.
깐깐한 귀부인들의 안목마저도 만족시킬 정도로 우아하고 화려했던 여름 연회는 그해 사교계의 가십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아직 본 연회에는 참석 못 하시잖아요. 데뷔탕트도 내년이시면서.”
베로니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에셀라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에셀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본 연회야 참석을 못 해도 황녀 전하의 여름 연회 준비 티 파티에는 참석해야지. 엄연히 마델레이네 공녀인데.”
아하, 베로니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는 여름 연회를 준비할 때면 늘 티 파티를 열곤 했다. 명분이야 연회의 아이디어를 제공받는 자리라지만, 실상은 사교계의 주축을 이루는 영애들이 참석한다는 ‘특별한 티 파티’.
제 아가씨는 아마 그것을 노린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문 바깥에서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또 콘라드일까 곤두섰던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들어와.”
들어오라는 말에 바로 문이 열리고 샐리가 들어왔다. 오늘따라 자리를 비웠던 샐리의 얼굴이 환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커다란 서류 봉투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 다녀온 거야? 그건 뭐고?”
“저희 올리비아 아가씨 심부름이요! 아가씨께서 저한테 떠나기 전에 말씀하신 게 있었거든요!”
언니의 이야기에 에셀라는 관심을 기울였다. 잔뜩 궁금하다는 에셀라의 얼굴에 샐리가 기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술술 말했다.
“아가씨께 올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가 오면 꼭 대공저로 전달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왜 바로 안 보내고?”
“저도 아가씨께 보낼 편지가 있어서요. 설마 정말로 편지가 와 있을 줄 모르고 놓고 가서 같이 전달하려고 가지러 왔어요. 아가씨께서도 보내실 편지가 있으시다면 제게 주시겠어요?”
샐리의 권유를 듣자마자, 의아해하던 에셀라의 얼굴 위로 감동이 스쳤다. 이내 에셀라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만, 편지는 바로 쓸게!”
그러는 사이, 샐리는 기쁨에 찬 얼굴로 서류 봉투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총 여덟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가씨가 비칸데르령으로 떠난 뒤, 샐리는 꾸준히 아가씨를 대신해서 사서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반년 넘게 끊어졌던 편지가 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세상에! 편지가 왔다. 그것도 한 번에 여덟 통이나!
샐리는 흐뭇한 눈으로 편지 위의 글씨를 읽었다.
편지 봉투에는 우아하고 힘 있는 필체로 ‘리브 그린 님께 감사를 담아’라고 적혀 있었다.
* * *
한편 그 시각.
황녀의 방문으로 정신없던 카탕타 자작저에 황궁의 기사가 방문했다.
황제의 인이 찍힌 편지를 들고 왔다는 기사의 말에 자작 부부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란 얼굴이었다.
‘세상에, 폐하께서 우리 영지에 친히 편지를 보내시다니!’
“……고생 많았어요, 경. 휴식을 하다 돌아가세요. 자작, 황제 폐하의 명으로 먼 길을 온 기사님께 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빌려주겠어요?”
우아한 축객령에 자작은 아쉬운 얼굴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저 편지에 대한 답장에 카탕타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좋을 텐데.
하지만 황녀는 미련 뚝뚝 떨어지는 자작을 돌아보지 않았다. 자작이 한껏 미적대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외람되오나, 황녀 전하.”
앳된 얼굴의 기사가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는 앞으로 닷새 간 황녀 전하께서 궁으로 복귀하실 때까지 전하를 보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경?”
황녀는 제가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기사의 말대로라면 아버지가 제게 감시병을 붙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사의 대답은 일관되었다.
“그 외에 따로 지시받은 것은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오셨다더니 벌써 황궁으로 복귀하시나요, 전하? 이거 참, 아쉬워서 어떻게 합니까.”
“자작님도 참. 곧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여름 연회가 시작되잖아요. 저희야 그렇게 커다란 연회에 초청받지 못했지만, 주최자인 전하께서야 속히 돌아가셔야죠.”
기사의 말 뒤로 자작과 자작 부인이 말을 보탰다. 안 그래도 불안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세 사람의 말이 뒤섞이자 황녀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했다.
“모두 그만!”
순식간에 황녀의 방이 조용해졌다. 황녀는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모인 루하스 남작 부인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자작 부부와 기사의 얼굴을 살폈다.
늘 성녀 같은 황녀의 모습만 보았던 자작 부부는 물론이고, 기사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두통이 있어서. 목소리를 낮춰 주면 고맙겠어요.”
황녀가 평소처럼 나긋하게 웃었다. 그제야 자작 부부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께서 편지도 보셔야 하는데. 저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기사님도 잠시 나가 준다면 감사하겠어요. 전하께서 편지를 읽으신 뒤 잠시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루하스 남작 부인의 말에 기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가기 전, 황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 저 기사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
.
.
- 닷새의 말미를 주겠다. 속히 백수정 광산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복귀하거라.
편지를 읽는 순간, 황제인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황녀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황제가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폐광산에 대해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버지라면 이번에는 제 보고를 더 꼼꼼히 읽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딴 길을 어떻게 다시 가.”
“전하!”
황녀가 거칠게 내뱉은 말에 루하스 남작 부인이 아연한 얼굴로 더 크게 말했다.
누군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유모는 애가 바짝 탔다.
하지만 황녀는 유모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끔찍한 비포장도로로 다시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폐광산을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녀는 날 선 눈으로 폐광산 ‘서류’를 바라보았다.
- ……선대 비칸데르 대공비이자 망국 로웰의 마지막 공주인 에스메릴다 로웰 비칸데르의 소유였던 백수정 광산은 선대 비칸데르 대공이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황가로 복속되었다. ……마법사들과 학자들의 조사 끝에 광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황녀를 놀라게 만든 건 다음 문장이었다.
- 하나 망국 로웰이 쇠퇴하기 전, 마법에 능한 그들이 무언가를 숨겨 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불어 비칸데르 대공이 이 광산에 집착과도 같은 관심을 기울이니 대대로 물려주며 그들이 숨긴 게 무엇인지 찾을 것을 명한다.
무언가를 숨겨 두다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문장에 황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지도 않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노려보았다.
만약 정말로 그 반쪽짜리가 광산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한 뒤 의도적으로 보고서에서 누락시켰고, 저를 구슬려 백수정 광산을 가져간 거라면?
“……아닐 거야. 그 멍청한 건 인장을 찍을 때까지 망설였으니까. 아직 아무것도 못 찾았을 거야.”
황녀는 불안함을 억누르듯 중얼거렸다. 그 반쪽짜리가 맹랑하게도 지참금을 요구했을 때, 폐광산을 권한 건 저였으니까. ……원망스럽게도.
서류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망설이던 걸 보면 그 천한 피도 광산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보았지만, 비칸데르 대공이 집착을 보이던 광산을 제 손으로 그에게 돌려줄 위기에 처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황녀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칠 때였다. 유모가 조심스레 말했다.
“닷새 동안 다녀오는 건 불가능할 텐데. 진즉 공녀의 보고서를 손봐 고치기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그 말에 황녀가 화를 벌컥 냈다.
“유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미 이 자작저의 모두가 내가 비칸데르에 안 간 걸 아는데!”
황녀의 말에 유모가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유모의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황녀가 사정없이 유모를 몰아세웠다.
“안 그래도 마리아가 내 연회를 준비한다는 것도 걱정되는데. 정말이지 올리비아 그 천것은 도움이 안……!”
짜증을 내뱉던 황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작 부인의 아쉬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작님도 참. 곧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여름 연회가 시작되잖아요. 저희야 그렇게 커다란 연회에 초청받지 못했지만. 주최자인 전하께서야 속히 돌아가셔야죠.”
노골적으로 연회 참석을 바라는 자작 부부와 제게 향했던 기사의 눈빛!
어차피 올리비아 그 반쪽짜리는 대공의 약혼자로서 연회에 참석할 테니 황궁에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폐광산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하니. 그렇다면 저는 굳이 비칸데르까지 가지 않고 이 순간만 넘기면 되는 것 아닌가?
제가 왜 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까?
황녀의 입매에 웃음이 고이기 시작했다.
“유모! 당장 자작 부부와 기사를, 아니 기사 먼저 들어오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