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엇갈리는 마음들
(58/151)
058. 엇갈리는 마음들
(58/151)
#058. 엇갈리는 마음들
2022.09.18.
“왜, 왜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베서니의 대답이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돌아오자마자 공동 재산으로 등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 백수정 광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이제는 저항 마법마저도 없어졌는데.
올리비아는 쉼 없이 생각했다. 그 생각을 끊어 내기라도 하듯 베서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야…… 아직 두 분께서는 부부가 아니시잖아요.”
“네?”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서니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어린 숙녀에게 하듯 조금 더 쉽게 설명했다.
“아무리 비칸데르 대공가의 부부 재산이 공동 소유라 할지라도, 혼인을 계획하기만 한 상태에서 재산을 합치지는 않습니다. 아가씨.”
“몰랐어요? 우리 아직 혼인하지 않은 사이인 거?”
베서니에 이어 에드윈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까지는 공동 재산으로 등록할 수 없다니. 저와 에드윈의 혼인은 ‘일 년간의 유예’에 따라 일 년 뒤에나 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조급한 마음으로 웅얼거리던 올리비아의 눈이 갑자기 커다래졌다.
“근데, 저는 지금 대공가의 재산을 펑펑 쓰고 있는데.”
입으로 내뱉은 말에 올리비아는 제가 더 뜨악했다.
사실이었다. 예니브 거리를 정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올리비아는 이미 자재부터 인부까지 마음껏 계약한 상태였다.
“아가씨, 저는 이 벽돌이 좋아 보이는데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게 완전히 마음을 연 듯 자재를 고를 때마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디안과 함께 말이다.
“아낀다고 했는데도, 제법 많이 썼는데.”
올리비아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에드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올리비아. 그건 그거죠. 그 말이 왜 여기에서 나와요.”
“그야 제가 재산이 공동 소유라는 말을 믿고 마음껏 썼으니까요.”
에드윈은 한숨을 삼켰다.
배포를 좀 키워 달라고 말했는데도, 이 작은 아가씨는 정말 어지간히 제 말을 안 들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말문이 막힌 에드윈 대신 베서니가 말했다.
“아가씨, 그건 원래 비칸데르 대공가에서 진행하려던 일입니다. 아가씨께서 예비 대공비로서 일을 이끌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 예산은 신경 쓰지 마세요. 비칸데르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용인으로서 말씀드리건대, 그 정도 사용하신다고 해도 바닷물 한 컵을 떠 간 것처럼 표도 안 난답니다.”
걸렸다. 자신감 넘치는 베서니의 말에 올리비아가 씩 웃었다.
“그러니까요. 제가 혼인만 안 올렸을 뿐이지 엄연히 예비 대공비인데. 혼인을 계획만 한 게 아니라 날짜까지 잡아 두고 기다리는 건데. 그래도 공동 재산으로 등록할 수가 없어요?”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보면서 베서니의 입이 다물어졌다.
엄연히 법도와 규율이 존재하는데, 저 눈만 바라보면 베서니의 마음은 한없이 약해졌다.
그것도 공주님의 보물인 백수정 광산까지 들고 온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말이었다. 베서니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던 찰나였다.
“아, 아니면 양도는 어때요?”
말하고도 올리비아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제게는 그저 광맥이 말라 별다른 가치가 없는 광산일 뿐이었는데, 에드윈과 비칸데르 대공가에는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면. 의미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대공가의 재산으로 등록되는 게 훨씬 나았다.
히지만 올리비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드윈과 베서니가 심각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불렀다.
“올리비아.”
“아가씨.”
“네?”
거의 동시에 부르는 말에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서부터 지적하면 좋을까. 에드윈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선 한숨 자고 나서 이야기해요.”
“전 안 졸린데.”
“내가 졸려요, 올리비아.”
에드윈이 일부러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졸음에 겨운 에드윈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올리비아도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올리비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윈이 상냥하게 웃으며 올리비아를 에스코트했다.
두 사람의 뒤를 얼른 따라온 베서니가 올리비아의 방문을 열었다.
저만치 있는 침대를 보자 아까 베서니를 보고 놀랐던 것과 저항 마법에 걸리지 않은 에드윈을 보고 놀랐던 게 몰려오며 몸이 노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약속하듯 에드윈한테 말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요”
“얼마든지요. 그러니까 푹 자고 나와요. 알겠죠?”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올리비아.”
뒤에서 부르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한 박자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윈이 잠시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 한 단어에 담긴 무게감이 느껴져서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말씀을요.”
올리비아가 씩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베서니가 올리비아를 따라 들어갔다. 제게 맡기라는 듯한 신호에 에드윈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문이 닫혔을 때, 뒤돌아선 에드윈의 얼굴에는 졸음 한 점 없었다. 벌겋게 눈이 충혈된 하워드가 에드윈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에드윈이 하워드의 눈을 보며 입꼬리 새로 웃음을 흘렸다.
“설마, 운 거야? 울지 말라니까.”
“그럴 리 있겠습니까. 밤새서 눈이 충혈된 겁니다.”
“……확인해. 울지 말고.”
하워드는 광산으로 들어가기 전, 명령에 덧붙인 에드윈의 말을 떠올리며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서 몇 날 며칠을 새도 끄떡없던 하워드를 잘 알고 있었지만, 에드윈은 별말 없이 웃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래서. 황녀가 지금 어디라고?”
“황녀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해.”
울지 말라는 말에 앞서 몸을 기울여 건네던 대공의 명령. 하워드는 준비된 답변을 내밀었다.
“카탕타 자작령이라고 합니다.”
“하, 겨우 거기까지 온 거야?”
“큰 사유는 멀미라고 합니다. 그 외에 따로 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뭐, 정비되지 않은 도로도 이유라면 이유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하워드의 답변이 복도 위로 흩어졌을 때, 살기 어렸던 에드윈의 붉은 눈이 느슨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뭘 하면 좋을까. 하워드?”
“이 사실을 황제가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물론 나는 모른다에 돈을 걸 거야.”
“제가 먼저 걸었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하워드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에드윈의 입매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고였다.
* * *
이른 아침, 마델레이네 공작가.
식당에 앉아 있던 공작은 가만히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시간 내어 아침 식사를 하러 왔건만, 평소라면 옆에서 재잘댈 에셀라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에셀라는.”
“데뷔탕트 때문에 요즘 다이어트를 해서…….”
옆에 있던 콘라드가 대신 대답을 했다.
공작도 콘라드도 그게 에셀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더 깊이 파헤치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가 이렇게 삭막해진 지는 벌써 몇 주가 되었다. 자꾸 에셀라의 빈자리가, 그리고 제이드의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콘라드는 애써 그 옆의 빈자리를 보지 않은 채 식사를 했다.
가신인 모닉 자작 부인이 식사를 점검해서인지 맛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입에 들어간 음식은 모래알처럼 까끌했다. 어쩌면 이 시간 자체가 불편한 걸지도 몰랐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마자 콘라드는 속으로 놀랐다.
냉철하고 공정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의 식사는 콘라드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이 시간이 불편하다고 느껴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공작님,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시종장이 편지를 들고 황급히 다가왔다. 편지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편지를 열어 본 아버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먼저 가야겠구나.”
“예.”
아마 이번 입궁 요청도 올리비아 때문이겠지. 콘라드의 속이 어딘가 불편해졌다.
올리비아의 이름을 떠올리기 무섭게 애써 외면하던 빈자리가 눈에 휑하게 박혔다.
“제이드에게서는 아직 소식 없고?”
“……예,”
아버지의 기대에 충족하는 답변이 아니라서, 콘라드의 목소리가 작았다. 상관없다는 듯 공작이 절제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콘라드가 참았던 숨을 뱉었다. 접시는 처음 음식을 내올 때 그대로였다. 콘라드가 빈 잔을 잡자 시종이 얼른 다가와 물을 따라 주었다.
“……에셀라는.”
“방에서 식사 중이십니다.”
오늘도 똑같은 답변이었다. 콘라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을 마셔도 갑갑한 기분은 가시지 않아서, 콘라드가 걸음을 옮겼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셀라는 순간 긴장했다. 어젯밤 늦게 아버지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마 아버지실까.
에셀라의 굳은 모습에 베로니카가 나서서 문밖을 향해 말했다.
“네.”
“나야. 문 좀 열어 봐.”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콘라드였다. 마주치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여서, 에셀라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냐는 듯 바라보는 베로니카의 눈빛을 보고 나서 에셀라는 겨우 문을 빼꼼 열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 있으세요?”
“한집에 살면서 얼굴 보기 어렵네, 에셀라.”
쓴웃음 가득한 목소리에 에셀라는 시선을 피했다.
콘라드는 제게 있어 누구보다 사랑하는 큰 오라버니였다. 그런 콘라드가 저런 표정을 하는 건 에셀라의 마음 한쪽을 아리게 했다.
“그러게요. 오라버니랑 같이 식사를 하면 계속 먹게 되어서. 아시다시피 저는 데뷔탕트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줄곧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사실은 보고 싶지가 않은 거면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숨기며 에셀라는 웃는 척했다.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아버지도 오셨는데.”
콘라드의 말에 에셀라는 저도 모르게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누구보다 저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동시에.
언니를 데려오고, 황궁에 저 대신 들이밀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에셀라는 속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눈을 가리던 왜곡이 사라진 이후로 자꾸만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삼켰었는데.
“오라버니는 안…….”
불편하세요?
말을 잇기도 전에 콘라드의 얼굴이 에셀라의 눈에 박혔다.
늘 여유롭다는 듯 웃던 콘라드의 얼굴이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여서.
에셀라는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었다. 말이 나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차마 물을 수 없는 말을 삼킨 뒤 에셀라는 부러 티 나게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역력한 행동에 콘라드는 묻고 싶었던 말을 삼키고 모닉 자작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사교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며.”
“네.”
단답형으로 떨어지는 대답에 콘라드는 잠시 침묵했다.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에셀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황급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면서 콘라드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에셀라의 빤한 시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가서.
갑갑하고 불편한 속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