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불안을 외면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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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불안을 외면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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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불안을 외면하는 사람들
2022.09.14.
“저게 왜 떨어졌냐고 묻지 않는가!”
쾅-.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와 동시에 황제가 노성을 터트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진노에 시종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대답 없는 시종장을 노려보면서 황제가 손가락으로 휘장 쪽을 가리켰다.
늘 무언가를 가리듯 드리워졌던 휘장이 활짝 젖혀진 상태였다.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는데, 보존 마법까지 걸린 초상화가 떨어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시종장!”
그 텅 빈 벽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마치 누구 하나를 잡아 죽일 듯 날카로운 황제의 목소리에 시종장은 무엄하게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하, 아시지 않으십니까. 폐하의 침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시종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말 그대로였다. 그저 시종장은 평소처럼 황제의 침실을 살폈을 뿐이었다.
침실 가장 깊은 곳, 프란츠 제국을 상징하는 휘장 아래로 무언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다 어제와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황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휘장을 젖힌 채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황제 본인이었으니까.
침실을 가득 채우던 황제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내 침실이 조용해졌을 때, 노련한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궁정 마법사를 불러 다시 보존 마법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이내 털썩 의자에 앉는 소리가 났다.
“……고맙네. 오늘은 내가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
“아닙니다, 폐하.”
시종장은 한평생 황제를 모셨다.
황제가 초상화 속 여인한테 얼마나 집착했는지, 또 그 때문에 어떤 일까지 저질렀는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런 여인을 그린 단 하나뿐인 초상화였다. 만약 아무리 황제를 모신 자신이었어도, 황제가 조금 전까지 초상화를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시종장은 저도 모르게 제 목 부근을 쓰다듬었다. 목에 휑한 바람이 분 것처럼 서늘했다.
“……고개를 들게, 시종장.”
“예, 폐하.”
시종장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책상 위에 똑바로 놓인 초상화를 외면하며 말했다.
“황녀는 비칸데르에서 내가 명한 조사를 하고 있는가?”
“……카탕타 자작령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벌써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인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오는군.”
황제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기분을 환기하려 애썼다. 다행히 시종장의 대답은 흡족한 편이었다.
시킨 일에 대해서는 늘 똑 부러지는 결과물을 갖고 오는 황녀였다. 출발이 늦었다고 하더니, 빠르게 조사를 하라는 이 아비의 명을 확실히 따르는 모양이었다.
“그게…….”
황제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시종장은 잠시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골랐다.
“……돌아오시는 길이 아니라, 비칸데르로 가시는,”
“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여운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말이 잘린 시종장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황녀가 아직도 카탕타까지밖에 못 갔다고? 그곳은 여기에서 네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 않는가.”
“예. 송구합니다, 폐하. 황녀 전하의 멀미로 인해 잠시 가는 길이 지체되었다고 합니다.”
“하, 하!”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멀미라니. 겨우 멀미 때문에 아직도 카탕타라니!
황제는 지난번 황녀가 아프다고 했었던 기억을 손쉽게 지운 채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거늘……. 초상화가 떨어진 모습을 보고 나니 백수정 광산에 대해 다시 확인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더해졌다.
황제는 조급한 마음을 누르며 나직이 명했다.
“당장 카탕타로 사람을 보내도록.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이 닷새간의 말미를 준다 황녀에게 전하게.”
제도부터 비칸데르령까지 가는 길만 사흘이 걸렸다. 조사 없이 왕복만으로도 엿새가 걸렸지만, 시종장은 이를 지적하는 대신 그리하겠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 속에 갑갑한 한숨이 가득 찼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요 근래 가장 골머리를 썩이던 것은 비칸데르령으로 간 마델레이네의 첫째 공녀였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내일 알현하라 소식을 보내겠습니다.”
노련한 시종장의 말에 황제는 낮게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한 잔 가져다주게.”
시종장은 고개를 숙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시종장이 침실을 나섰다.
탁,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황제는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었다. 황제는 홀린 것처럼 천천히 책상 위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배경 위, 풍성한 흰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은 무표정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압도하듯 아름다운 얼굴은 제 충실했던 개, 그녀의 아들인 비칸데르 대공과 똑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선명히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뿐이었다.
황제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그 무표정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하긴, 어떻게 그림 따위가 웃을 수 있겠어.”
황제의 혼잣말이 침실을 메웠다가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그림은 말이 없었다.
비칸데르령을 지키기 위해 황궁으로 끌려왔던 이 아름다운 여인처럼.
황제는 비웃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기에 마지막에는 내게 매달렸어야지, 공주. 그랬다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쯤은 내가 너그러이 대해 주었을 텐데.”
잇새로 짓씹듯 나직한 목소리에 황제 본인조차 자각 못 한 미련이 엉겨 붙었다.
고고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림 속 여인을 마주 보는 황제의 눈이 탐욕과 질투로 일그러졌다.
비칸데르의 선대 대공비이자 망국의 공주.
모든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제게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마음 한 자락 허용하지 않았던 여인.
그도 모자라 죽어 갈 때까지도 저를 향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던 여자.
“공주 때문에, 비칸데르는 사라질 거야. 망국 로웰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듯. 에스메릴다,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아서. 너 때문에!”
이 얼굴을 쏙 빼닮은 비칸데르 대공에게는 앞으로 고통스러울 일만 남았다.
저승에 있을 공주가 피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오르자 황제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섞여 들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던 황제가 순간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이건 무슨……?”
말이 안 되게도, 순간 초상화 속 공주의 초록색 눈동자가 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초상화를 바라보았을 때, 공주는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는데. 초상화를 바라보던 황제의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초상화를 뒤집어엎었다.
별거 아니다. 초상화가 떨어진 것도 그렇고, 마음에 들지 않는 황녀의 소식도 그렇고.
오늘따라 조금 예민해졌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살며시 주먹을 쥐어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손 위에 있었는데. 주먹을 꽉 쥐자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제가 그토록 자신하던 제 개. 비칸데르 대공의 목줄이 풀어졌다고 느꼈던 때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늘 똑 부러지는 황녀는 다시 한번 제 명에 충실히 따를 것이고, 마델레이네 공작은 비칸데르 대공을 웃게 만든 첫째 공녀를 다시 태자의 옆에 데려다 둘 것이다.
그리고 태자는 마델레이네 공녀를 비로 삼아 비칸데르 대공에게 절망을 심어 줄 것이었다.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황제는 혼잣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이런 불안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
.
.
그 시각, 시종장은 황제의 명에 따라 카탕타 자작령으로 소식을 보냈다. 멀어져 가는 말과 기사를 바라보면서, 시종장은 뭔지 모를 불안감을 삼켰다.
“……마델레이네 공작이라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와야 할 텐데.”
시종장의 말이 힘없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시종장이 뒤를 돌았을 때, 저 멀리 유난히 어두운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동이 터 갈 무렵이었다.
올리비아와 에드윈은 나란히 마차에 앉은 채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간이었다.
밤을 새웠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몸에 기운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짐 같던 이야기를 털어놓아서일까, 아니면 에드윈과 가까이 앉아서일까.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대공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양손을 꼼질거렸다.
손끝에 닿는 작고 딱딱한 느낌에 그제야 올리비아는 제가 마석 목걸이를 다시 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에드윈이 그 움직임을 따라 올리비아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내가 걸어 줄게요.”
조금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근사했다. 에드윈이 스스럼없이 올리비아의 손에 있는 목걸이를 가져갈 때, 스치듯 맞닿은 손가락에 올리비아의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눈치 빠르게도, 달아오른 뺨을 본 에드윈은 모른 척 천천히 올리비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들어가자마자 한숨 푹 자고, 때늦은 아침을 먹어요. 오늘은 예니브에 가지 말고, 오후 내내 나와 놀아요. 어때요?”
근사한 제안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자마자 인장을 찍어야 했다. 대공 부부의 재산은 공동 재산이니까. 더 확실하게 에드윈의 몫으로도 남기고 싶었다.
물론 베서니가 괜찮아야 하지만.
베서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서 올리비아는 말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견고한 대공성의 성문이 열리고 마차가 대공성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다.
그 단어가 더없이 실감 나서, 올리비아는 괜히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오셨습니까, 전하. 아가씨.”
“베서니!”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현관까지 나오다니!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서니를 불렀다.
어젯밤, 그토록 눈물을 흘리던 베서니는 태연한 얼굴로 현관에 선 채 올리비아와 에드윈을 맞이했다.
깜짝 놀란 올리비아는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얼른 베서니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조금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던 베서니가 이내 푸근하게 올리비아를 안아 주었다.
“참, 아가씨도. 잘 다녀오셨어요?”
“네. 몸은 괜찮아요?”
속삭이듯 한 말에 베서니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이제 망설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베서니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이 백수정 광산을 공동 소유로 옮겨 주세요.”
올리비아는 당연히 베서니가 활짝 웃으며 그러겠다 대답할 줄 알았다. 그렇게 울 정도로 소중한 유산이 돌아왔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감격에 겨워 잠시간 대답을 못 할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올리비아의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아쉽게도, 아가씨. 그건 불가능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대답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드윈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