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6.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사람 (56/151)


#056.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사람
2022.09.11.



 


“……무슨 말씀부터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다녀오십시오. 제가 입구 경계를 서고 있겠습니다.”

하워드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성과 달리 고개를 숙인 자세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금 전, 광산 입구를 통과한 에드윈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하워드는 혼란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나 직접 광산 입구 안쪽과 바깥쪽을 오갔다.

한 번 오갈 때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하워드는 끝내 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는 것을 택했다.

그를 지켜보던 올리비아는 당연하게도 제 자리가 하워드의 옆이라고 생각했다.


“에드윈이 광산을 둘러보는 거 절대 방해 안 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저랑 같이 가요.”

 
몇 번이고 에드윈에게 광산을 둘러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니 제 역할은 마석 목걸이를 에드윈에게 전달하는 것까지였다. 기다리는 동안 에드윈 때문에 놀란 심장도 좀 다독이고 말이다.

올리비아가 목걸이를 빼기 위해 다시 한번 손을 올리려던 때였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오른손을 잡았다. 마주 닿는 손바닥 안에서 맥박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이 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지 에드윈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와 달리 다정하게 웃던 에드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면 잠시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예, 전하.”

에드윈은 잠시 하워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덧붙였다.

곁에 있는 올리비아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하워드는 알아들은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꽉 쥐고 있던 하워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린 달빛이 언뜻 하워드의 얼굴을 비췄다. 설핏 본 코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여전히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올리비아는 못 본 척 광산 안쪽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지나가 보았던 시꺼먼 안쪽 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에드윈 혼자 가는 것보다 길을 잘 아는 제가 함께 가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갈까요?”

“같이요?”

“그럼요.”

제 손을 잡은 게 정말 저와 같이 가자는 의도일 줄이야. 내심 생각만 했던 일이 벌어져서 조금 얼떨떨했다.

에드윈이 가볍게 올리비아를 이끌었다. 광산 안쪽으로 걸음을 떼던 올리비아는 하워드 쪽으로 아주 작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인터필드 경. 잘 다녀올게요.”

이건 하워드를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백수정 광산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심지어 이 광산의 바닥 어디가 미끄러운지까지.

잠시 외출을 나가듯, 이제는 어딜 갈 때나 다녀온다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돌아올 곳은 바로 여기, 비칸데르.

마음을 다잡은 올리비아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바람을 타고,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가 올리비아한테 닿았다.


“……예. 아가씨. 잘, 다녀오십시오.”

 

* * *

올리비아는 이 광산 안이 얼마나 스산하고 쌀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토록 싸늘하던 곳이 오늘따라 온기가 몸을 감싸듯 따스하게 느껴졌다.

체온을 유지해 준다는 마석 때문일 거다.

올리비아는 에드윈과 잡지 않은 손으로 목 뒤의 목걸이 걸쇠를 더듬었다. 한 손으로 해서인지 걸쇠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그게 아니라,”

목 뒤를 더듬던 손에 의해 걸쇠가 풀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마석 목걸이가 목에서 풀려 손바닥 안으로 떨어졌는데도 한기가 느껴지기는커녕, 여전히 제 몸은 훈훈했다.


“에드윈 혹시…… 이 광산, 춥지 않나요?”

“추웠어요? 잠시만요.”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에드윈은 올리비아와 마주 잡지 않은 손으로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으려 했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마석 목걸이를 쥔 왼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광산이 원래 좀 추워야…….”

올리비아는 일 년 전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에드윈은 보편적인 광산을 떠올렸는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늘 이랬던 것 같아요. 너무 어린 시절에 온 뒤로 못 오긴 했지만, 다른 광산에서는 다 두꺼운 로브를 입었던 것에 반해 여기는 그냥 들어가곤 했거든요.”

늘?

올리비아는 혼란 가득한 눈으로 백수정 광산 안을 바라보았다.

일 년 전과는 뭔가 달랐다. 이게 무슨 일일까.

올리비아는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에드윈의 손을 잡은 채, 제가 알고 있던 길을 따라 광산 안쪽으로 걸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굳게 주먹을 쥔 올리비아의 왼손 손바닥 안, 마석이 초록빛으로 빛났다.

마치 무언가와 공명하듯 마석의 반짝임이 빨라졌지만, 손바닥으로 가려진 빛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
.
.

광산 안쪽으로 뻗은 길은 총 열세 개의 갱도로 나뉘었다.

갈래로 흩어지는 지점이 나타나기 전까지 돌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어디에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광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입구 쪽에서 달빛이 줄어들다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에 눈이 익어도 광산 안쪽을 능숙하게 걷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당연히 제가 앞장서리라고 생각했다.

일 년 전, 이 백수정 광산을 조사하면서 올리비아는 열세 개의 갱도뿐 아니라 막장(갱도의 막힌 부분)까지 몇 번이고 걸었다. 튀어나온 곳부터 미끄러운 부분까지 눈에 훤하게 보였다.


“발밑을 조심해요, 올리비아. 이 아래는 미끄러우니까.”

하지만 에드윈은 올리비아만큼이나 백수정 광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걸음을 늦추던 에드윈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광산의 울림 탓일까 아니면 시야가 좁혀지며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 탓일까.

에드윈의 웃음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고혹적으로 들렸다. 귓가의 솜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나른한 웃음소리에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긴장했다.

어쩐지 맞잡은 에드윈의 손이 훨씬 더 크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광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요, 에드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잊지 않기 위해서 틈날 때마다 기억을 복기했거든요.”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한 목소리 기저에 깔린 노력이 얼마만큼일지, 올리비아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심성 없는 질문이었다며,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나저나 더 늦기 전에 에드윈에게 제가 황명에 따라 이 광산을 조사했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올리비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 위로 구두 굽 소리가 어우러졌다. 조금만 더 가면 열세 갈래로 나뉘는 갱도의 시작 부분이 보일 예정이었다.

그때였다.


“아.”

무언가 딱딱한 것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에드윈의 몸이 잠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나지막한 에드윈의 침음을 듣고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에드윈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갈래로 나뉘는 갱도가 보이기 조금 전,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나무토막을 바닥에 고정시켜 놓았던 게 문득 떠올랐다.


“조심해요. 이 부근에 나무토막이,”

무심코 말하던 올리비아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에드윈이 잠시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티조차 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올리비아. 이건 미처 몰랐네요.”

에드윈이 발아래 놓인 나무토막을 툭툭 건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에는 저를 향한 애정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지금이 사실을 고백할 적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게 언제예요?”

“아홉 살 때니까, 십 년도 더 되었죠.”

에드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십 년도 더 된 시간.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삼키면서, 올리비아는 떨림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전, 일 년 전이에요. 이 백수정 광산에 왔었던 때가요.”

놀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에드윈은 침착하게 올리비아의 손등을 다독였다.

마치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
.
.



“작년 이맘때, 황녀의 명에 따라 이 백수정 광산을 조사했었어요. 여러 마법사와 학자들과 함께요.”

사방으로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올리비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황녀의 명에 의해 백수정 광산을 조사했다는 것도, 맥이 끊긴 이 폐광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황제한테 바쳤다는 것도.

심지어는 백수정 광산을 조사하느라 한 번 비칸데르령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것까지 모두 다.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털어놓을수록 올리비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드윈은 이야기를 듣기 전과 똑같은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건.”

나지막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더없이 따뜻해서, 올리비아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어수선하고 떨리는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드윈이 하는 말이 저를 울리고 말 거라는 것을.


“……정말 고생 많았겠어요, 올리비아.”

이럴 줄 알았다. 저렇게 다정하게 말하면 울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콧날이 시큰해지는 기분에 올리비아는 부러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애써 괜찮은 척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폐하께 어떤 보고가 갔는지 알아요. 이 광산에는 아무 특이점도 없다고, 제가 그렇게 보고했거든요. 다행이지 뭐예요.”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올리비아 덕분에 황제가 이 백수정 광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못 했겠어요.”

진심으로 감탄하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냥하게 저를 바라보던 에드윈이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정말로 고마워서 그러니, 원한다면 말만 해요.”

“네?”

“황녀의 목을 대령하라면, 이틀 내로 가져다줄게요.”

진심 같은 에드윈의 말에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저를 바라보던 눈이 한순간 시리게 빛났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올리비아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광산 이곳저곳으로 퍼졌을 때, 에드윈이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그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알겠죠?”

에드윈은 잠시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이 용감하고 단단한 아가씨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든 말을 삼킨 채, 에드윈이 제안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을까요?”

“에드윈은 괜찮아요?”

“당연하죠.”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피곤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푹 자고 난 것처럼 개운했다.

* * *

시린 달빛이 통유리창을 비추는 늦은 밤, 대공성 올리비아의 방.

멍하니 누워 있던 베서니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있던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베서니를 만류했다.


“베서니 님, 누워 계세요. 아가씨께서 가만히, 편안하게 누워 계시라고 명하셨잖아요.”

“내 방에 가서 누워야지. 어떻게 아가씨 침대에 눕는 게 편하겠어.”

“그래도…….”

베서니의 말에 잠시 공감하던 시녀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베서니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방에 들어간 채 방문을 잠근 베서니는 침대에 눕는 대신 방 한쪽에 달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응접실 한쪽, 휘장을 걸어 둔 곳으로 걸어갔다.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 베서니는 휘장을 걷었다.

휘장 속 초상화를 바라보던 베서니의 눈에 그리움이 가득 차올랐다.

풍성한 흰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

얼굴은 달빛에 반사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그녀를 향해 베서니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백수정 광산이 다시 비칸데르로 돌아왔습니다.”

대답 없는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베서니는 다시 한번 울먹였다.


“아주 귀한, 보물 같은 아가씨께서 공주님의 보물과 함께 비칸데르로 오셨어요.”

그 순간, 달빛이 여인의 얼굴을 비췄다. 제 도련님과 쏙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인의 눈은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
.
.

그날 밤, 황제궁의 침실.


“……뭐?”

잠자리에 들었던 황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핏기 없이 질린 황제의 얼굴에 시종장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종장을 노려보던 황제가 성큼성큼 침실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황제는 숨을 삼켰다.


“이게, 대체, 왜.”

프란츠 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휘장에 감싸여 있어야 할 초상화가 바닥으로 뚝 떨어져 있었다.

보존 마법까지 걸어 두었던 초상화가 뚝 떨어지다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휘장 아래로 떨어진 초상화 속, 무표정한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 그 차가운 초록색 눈이 일순간 황제를 향해 웃음을 보낸 것만 같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