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그의 최선이 이루어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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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그의 최선이 이루어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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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그의 최선이 이루어진 순간
2022.09.07.
이렇게 늦은 밤에 마차를 타고 나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훌륭한 기사 하워드 인터필드 경은 말만 잘 타는 게 아니라 마차도 잘 몰았다.
올리비아는 일부러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했다.
애써 흔들림이 거의 없는 하워드의 운전 실력을 생각하면서도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창문에 비치는 에드윈의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드윈의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는 볼 자신이 없었다. 에드윈을 바라보는 순간, 아까 그가 내보였던 얼굴을 떠올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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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올리비아의 방.
제 품에 안긴 에드윈의 떨림이 잦아들던 때였다. 손바닥으로 쿵쿵 뛰는 에드윈의 심장 박동을 다독이면서 올리비아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괜찮으면, 지금 가서 볼래요?”
“그, 래도 될까요?”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에드윈이 지었던 표정은 아마 평생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혼자 남은 아이처럼 절박하게 저를 바라보는 얼굴. 단단하게 저를 잡아 주던 에드윈의 내면이 저를 향해 드러났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의 붉은 눈에 괸 눈물이 눈매 끝을 타고 흘렀다. 눈매와 코끝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에드윈은 마치 제가 구원자라도 되듯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평소 제 심장이 간질거릴 정도로 다정한 시선을 보내거나, 부끄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눈을 마주치는 것과는 달랐다.
에드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아릿해지는 심장의 통증을 삼켰다. 그리고 유리 조각처럼 제 마음에 박힌 저 표정이 평생 빠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 순간 제가 운다면 에드윈은 아픈 속도 뒤로한 채 저를 위로할 것이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에드윈이 제게 그래 주었던 것처럼.
“그럼요. 이제 백수정 광산은 에드윈 거예요. 언제든 에드윈이 원한다면 가서 볼 수 있어요.”
빼앗겼던 어머니의 유품, 그리고 로웰 왕국의 보물.
그 같은 존재가 주는 울림은 올리비아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제게 누군가 엄마의 실 발찌를 준다면 저도 에드윈처럼 멍하게 있다가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니까.
늘 저를 일으켜 세워 주었던 에드윈의 옆에, 지금 이 순간 제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손을 다부지게 잡으며 눈을 맞추었다.
“다음번에는 혼자 가도 좋겠지만. 오늘만 저랑 같이 가요.”
그의 뒤에만이라도 있고 싶었다. 이렇게 애틋한 사람을 이런 날 혼자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덧붙였다.
“에드윈이 광산을 둘러보는 거 절대 방해 안 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저랑 같이 가요.”
올리비아는 조마조마하며 에드윈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드윈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언제 왔는지 모를 하워드가 시뻘게진 눈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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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자마자 공동 소유임을 증명하는 인장을 찍어 달라고 할 거예요. 그러니 조금 쉬고 있어요. 안 쉬면 정말 내일 베서니 안 볼 거예요. 알겠죠?”
그러고 보니 베서니는 잘 누워 있겠지. 탈진하듯 겨우 고개만 끄덕이던 베서니 생각에 올리비아는 잠시 대공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토록 커다란 대공성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광산까지는 얼마나 걸리려나.
올리비아는 처음 비칸데르에 올 때를 떠올리며 거리를 가늠했다. 적막 속에서 의식적으로 에드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올리비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깜짝 놀라며 에드윈 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느슨히 웃으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야, 저를 부를 줄 몰랐으니까요.”
올리비아는 얼떨떨함을 삼키며 속마음을 그대로 대답했다. 에드윈이 낮게 웃었다.
어느새 붉었던 눈가는 흔적 하나 없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잔뜩 젖어 있던 붉은 눈도 요요하게 빛났다.
“미안하지만…….”
에드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건조하게 갈라져 가라앉은 목소리만이 아까까지 혼란스러워하던 에드윈의 상태를 증명하는 잔재였다. 에드윈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 좀 잡아 줄래요? 오늘따라 멀미가 있는 것 같네요.”
그 손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다. 평소처럼 돌아오긴. 저렇게 손을 바들바들 떠는 주제에 멀미라며 손만 잡아 달라는 에드윈의 모습에 한없이 마음 저려서.
올리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악문 이 사이로 평소보다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은 안 되겠어요.”
“역시 그렇죠?”
푸스스 웃으며 괜찮은 척하던 에드윈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늘 에드윈을 애타게 만들었던 달콤한 향기가 바짝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에드윈의 옆에 앉은 올리비아가 에드윈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멀미에는 옆 사람에게 기대어서 눈을 감는 게 제일 좋아요.”
불편한 자세일 텐데.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에드윈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했다. 다른 손으로는 에드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지금은 제가 막무가내여도 이해해요. 도착하면 아무런 방해조차 안 할 테니까.”
단단한 목소리가 아슬아슬하던 에드윈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가슴 한편, 아주 조금 남았던 빈틈이 빠듯할 정도로 벅차게 채워졌다.
온기에 눈을 깜빡이던 에드윈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 * *
“도착했습니다.”
어느 순간,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문 바깥에서 노크를 하며 말하는 하워드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잠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내릴까요?”
완전히 잠긴 목소리가 어색한 듯 에드윈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분위기를 풀어 주는 듯한 행동에 올리비아는 조금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긴장으로 입꼬리만 간신히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올리비아는 야트막한 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백수정 광산은 제가 마지막에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건 여전한 듯, 입구의 나무들은 여전히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스산했다.
광산 안에서는 몸이 차가워질 정도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나면서 올리비아는 무심코 목걸이의 마석을 만지작거렸다.
이 마석만 있다면, 지금처럼 몸이 따스할 것이었다. 에드윈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결되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목 뒤의 걸쇠를 풀려 애썼다.
“잠시……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목걸이를 풀기도 전에, 하워드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하워드의 얼굴 위로 긴장이 역력했다.
“괜찮아.”
에드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못 들어갈 곳을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단히 결심을 한 듯한 에드윈과 하워드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혹시 밤에는 여기를 들어가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나요?”
그게 아니라면 들어가는 것부터 이렇게 굳건한 얼굴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에드윈 대신, 하워드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황제가 백수정 광산을 소유할 당시, 마법사를 통해 이곳에 비칸데르 대공가 일원 전체에 대한 저항 마법을 걸어 두었습니다.”
“저항, 마법이요?”
믿을 수 없었다. 저항 마법이라니. 허락되지 않은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는 저항 마법은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황궁에서도 가장 보안 등급이 높은 금고에나 걸려 있는 마법이 이 광산에 걸려 있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에 올리비아가 광산을 바라보았다. 하워드가 덧붙이듯 말했다.
“예. 베서니 님조차 풀 수 없게 여러 겹으로 마법을 건 터라 그동안 저희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었습니다.”
“내 아가씨로 소유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들어갈 수 있겠죠.”
에드윈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며 광산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저항 마법이라는 단어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
저항 마법이 접근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했다. 언뜻 들은 말이 떠오르면서 순식간에 올리비아는 겁에 질린 채 에드윈 곁으로 뛰어갔다.
설마, 황녀가 이 사실을 알고 저를 함정에 빠트린 건 아닐까. 제발 에드윈이 무사해야 하는데.
간절한 바람과 동시에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잡으며 동굴의 입구를 통과했다. 마주 잡은 단단한 손에 올리비아가 눈을 꼭 감을 때였다.
“……들어, 왔어요, 올리비아.”
에드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대로였다.
들어갈라치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뼛속부터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 백수정 광산에 들어왔는데도, 튕겨 나가기는커녕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을 꼭 감았던 올리비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에드윈이 무사한지 샅샅이 확인한 뒤에서야 화를 냈다.
“그렇게 막 들어가는 게 어딨어요! 저항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사람 막 태워 죽이는 마법이라고 했단,”
그 순간 에드윈이 와락 올리비아를 껴안았다. 에드윈보다 한참이나 작고 부드러운 몸 아래로 씩씩대는 화가 그대로 느껴졌지만, 에드윈은 이 가슴 벅찬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에드윈이 먹먹함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곧잘 내게 이곳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어요. 이 백수정 광산을 아주 귀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늘 이곳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성인을 맞이한 로웰의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이야. 빨리 네게 이 비밀을 알려 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장난스레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던 것도, 잠들락 말락 하던 어린 그를 위해 카나리아같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조심스레 제 머리를 쓸어 주던 다정한 손길도.
열여덟이 빨리 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이곳의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화상을 입는 듯 타들어 가는 고통을 삼키면서도 언젠가는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랐었는데.
에드윈은 잠시 올리비아의 어깨를 제 품에서 떨어뜨렸다. 걱정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초록색 눈이 에드윈을 마주했다.
그 순간, 에드윈은 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가씨가 제게 보내 주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내, 최선이 이루어졌네요.”
- 기사님의 최선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리브 그린 드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에드윈은 다시 한번 말했다.
“올리비아가 내 최선을 이루어 주었어요.”
떨림 가득한 나지막한 목소리. 에드윈의 말에서 언뜻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힘을 주어 에드윈을 단단히 마주 안았다.
뭐가 되었든, 에드윈의 최선이 이루어져서 다행이었다. 나직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더없이 듣기 좋아서, 또 간질거려서.
올리비아는 이 순간이 평생토록 계속됐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