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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사랑받는 공녀님의 실체 (52/151)


#052. 사랑받는 공녀님의 실체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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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말했다.

후회와 후련함 사이에서 디안은 막막한 숨을 내뱉었다. 얼굴을 감싼 손바닥 위로 더운 숨이 훅 부딪혔다.

빨간 머리카락에 연두색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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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아니었어도!”

 
디안이 생각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늘 저 말에서 시작되었다. 엄마의 날카로운 고함과 화풀이 같은 폭력. 그리고 누나의 보살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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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디안. 괜찮아.”

 
고작 두 살 많은 누나의 다독임을 들을 때마다 디안은 안심하는 동시에 궁금했다. 왜 엄마는 저만 미워하는지, 그리고 왜 엄마와 누나와 달리 제 눈만 연두색인지.

모둔 의문이 풀린 건 그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집에서 나가는 순간 싸늘한 음성이 비수처럼 디안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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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쯔, 저 애 때문에 나탈리가 자작님께 버림받은 거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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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자작님도, 나탈리도, 데이지도 다 갈색 눈인데 저렇게 천한 연두색 눈이라니.”

 
누나는 늘 제 눈이 예쁘다고 했는데, 세상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보살펴 주는 어른이 없는 연두색 눈의 아이는 괴롭히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그나마 디안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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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를 데려가지.”

 
여느 날처럼 맞던 중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누나는 이곳이 비칸데르령이라고 했다. 대공이 저를 구해 주었다면서 말이다.

은혜를 갚기 위해 디안은 기사가 되었다. 누군가 저를 미워해도 꿋꿋이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비칸데르령은 이상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연두색 눈인 저를 피하지 않았다. 점차 예니브 거리에는 제 눈과 비슷한 사람들까지 가득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안은 렌즈로 제 눈을 가렸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구적인 마법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마음 편히 렌즈를 뺄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작은 미련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 미련도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패악으로 사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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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상념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안은 손을 내린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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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가 마델레이네의 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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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초록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지 못하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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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남 이야기를 하듯 가벼운 목소리에 디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가 올리비아를 쏘아보기도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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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천한 무희의 딸, 사생아, 운이 좋아 태자의 약혼녀가 된 계집. 오만하고 수치를 몰라서 남의 것을 탐내는 여자.”

막힘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욕적인 말에 디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던 올리비아에 대한 저열한 소문들.

올리비아는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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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만큼이나 저 역시 제 소문을 제법 잘 알아요. 바로 면전에서 숱하게 들었으니까요.”

바로 앞에서 들었다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런 말을 지체 높은 공녀님 앞에서…….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디안은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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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

올리비아가 여상하게 말했을 때, 묘한 감각이 디안을 건드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왠지 이 말을 듣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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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의 약혼녀, 황제파 수장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딸, 그리고 경의 말대로 초록 눈을 당당히 들고 다닐 정도로 사랑받는 귀한 공녀님.”

어쩌면 제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가만히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나열하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어 디안을 마주 보았다. 내면을 꿰뚫듯 곧은 시선에 디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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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사랑받는 귀한 공녀님한테.”

밤바람에 잔디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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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난잡한 추문이 붙어 다니는 것을. 정말 단 한 번도.”

달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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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제가 그토록 경멸했던, 사랑받는 공녀님.

초록색 눈을 당당하게 들고 다니는 공녀님.

제게 있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초록 눈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희망에서 그저 공작가의 사랑과 보호를 믿고 날뛰는 황제파의 공녀로 바뀌었다.

하지만.

정말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사랑받는 귀한 공녀님이었을까.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사실을 직시했을 때, 디안은 물속에 처박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먹먹한 귓가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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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물어볼게요, 스젤린 경.”

디안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것처럼 올리비아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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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내가 마델레이네의 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 * *

디안의 눈 위로 고스란히 혼란스러운 감정이 드러났다. 대답하기 어려운 것처럼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보면서, 올리비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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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젤린 경의 말대로, 나는 초록색 눈으로 당당히 다녔죠. 예니브의 아이들처럼 맞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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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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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초록색 눈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귀한 공녀님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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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디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위로 올리비아는 늘 저를 적대시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늘 밀어내는 대로 밀려났었던 제 모습도.

그들에게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우리 서로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아니, 물을 수 있는 용기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디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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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만약, 그런 이유 때문에 저를 미워했다면. 이제는 우리 관계가 바뀔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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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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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순간 디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디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는 디안이 마음을 바꾸기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저는 이미 십사 년이나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다린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삼킨 채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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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제가 예니브를 정리하는 걸 방해하지는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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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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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렇더라고요. 갈 곳이 없으면 돌아가는 곳은 결국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이더군요. 그곳마저 없어지면 정말 갈 곳이 없다고 느껴질 거예요.”

올리비아는 저를 녹녹하게 만드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 더러운 골목 안, 혼자라고 느껴질 때의 막막함. 그때 기적처럼 나타났던 에드윈.

그리고 돌아갈 곳이 생겼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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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예니브 사람들이 이 비칸데르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터전처럼 느끼고 살길 바라요.”

디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 위로 어떠한 변화가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씁쓸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퍼졌다.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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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 볼게요.”

디안의 눈이 절박해졌지만 올리비아는 정중히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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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몸을 돌려 대공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등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돌아보는 대신 저 멀리 정원의 초입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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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기다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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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아가씨의 에스코트는 누가 와도 내 몫이잖아요.”

에스코트가 어마어마한 영광이라도 되듯, 에드윈이 뻐기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단단하고 커다란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다정한 온기와 함께 올리비아는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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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잘 끝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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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화는 잘 끝났는데.”

올리비아의 눈매 끝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에드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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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은 거짓말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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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갑자기 저를 향한 원망에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눈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엄살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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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사람 마음을 잘 열게 한다면서요. 모두한테 통하는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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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잖아요, 올리비아.”

한숨 돌렸다는 듯, 에드윈이 낮게 숨을 고르며 짐짓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는 사이 에드윈은 잠시 정원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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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래도 순 거짓말쟁이는 아닐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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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에드윈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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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았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올리비아는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었다. 그가 당장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 해도. 당분간은 디안 스젤린에게 크게 마음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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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른 아침, 문을 열고 나간 순간 들린 목소리는 올리비아의 생각보다 그녀를 더 기쁘게 했다. 단정하게 정복을 갖춰 입은 디안은 정중히 예를 갖추고 있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듯 디안의 눈 밑이 거뭇했다. 고민이 역력했다는 표시에 올리비아는 벅찬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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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네요, 스젤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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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쑥스러운 듯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올리비아는 환하게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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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렌즈를 벗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번 노력은 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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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누군가는 저를 보고 눈을 드러낼 결심을 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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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오버.”

기분 좋은 상념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차, 생각에 빠져 카드 게임의 턴을 잊었다.

에드윈은 잘 깔려 있던 카드를 뒤섞으면서 입술 끝을 심술궂게 올렸다. 그것을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모르는 척 투정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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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에드윈. 제가 이기고 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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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제한을 둔 건 올리비아가 먼저였잖아요. 그러기에 누가 그렇게 다른 생각 하고 있으래요?”

올리비아의 손에 있는 카드까지 조심스레 빼 간 에드윈이 카드를 탁탁 모았다.

게임에 집중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토라진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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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에드윈이 거짓말쟁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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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었답니다. 올리비아. 말하려거든 어제 디안이 태도를 바꿨을 때 말해 주지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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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제는 바빴는걸요. 스젤린 경이 본격적으로 예니브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으니까.”

변명 같았지만 사실이었다. 태도를 바꾼 디안은 생각보다 유능했고, 예니브 거리 정리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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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거리를 특색 있게 가꾸실 거라면, 비칸데르령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지의 사람들도 오게 될 수 있습니다. 아직 타지 사람들은 초록 눈에 대해서 편견이 있을 텐데,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두신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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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예니브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제게는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디안의 설득 덕분에 거리로 나왔다.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던 제 또래의 초록색 눈의 여인과 마주하는 순간, 올리비아의 가슴에 묘한 기분이 들어찼다.

며칠 더 마주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것 같았다. 넘실대는 기대감에 설레하던 올리비아는 점점 뾰로통해지는 에드윈의 표정에 아차 했다.

그리고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을 돌리기에 가장 적합한 주제가 번쩍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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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칼터 경은 언제 복귀하나요?”

분명 제도에서 복귀한다던 윈스터는 며칠째 오지 않았다. 올 때가 되었을 텐데.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에드윈은 애매하게 웃으며 통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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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아무 일도 없었다면 벌써 왔을 텐데, 아무래도 불청객이 비칸데르 주변을 맴도나 봐요.”

알 수 없는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윈이 눈을 반짝이며 노련한 솜씨로 카드를 섞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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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 더 할까요? 이번에는 집중해서?”

 

* * *

같은 시각, 시끌벅적한 술집 안.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왁자지껄했지만, 제이드는 군청색 로브조차 벗지 않은 채 음식을 삼켰다.

이틀 전, 저택에서 출발한 뒤로 육포 이외에 처음 먹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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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전하께서 올리비아에 대해 궁금해하신다.”

 
매번 스스로를 혹사시키듯 훈련만 했다. 기사로서의 생명을 갉아먹는 짓에 보다 못한 단장은 강제로 휴가를 내렸다. 그래서 저택에 들어갔던 날 저녁 시간에 나왔던 말이었다.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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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답변할 테니, 너희도 알아 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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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아이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드가 대답했다. 사실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다. 태자가 올리비아한테 관심을 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올리비아를 볼 핑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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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무슨 죄책감이라도 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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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본다면, 미안하다고 꼭 말해. 물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느낀다면.”

 
급하게 나올 때, 형과 에셀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이드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상반된 둘의 말이 뒤섞였다.

마주친다면……. 여기까지 왔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제이드조차 몰랐다. 올리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딱 굳어 닫혔다.

제이드가 막막한 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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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마델레이네 경.”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드가 날래게 몸을 돌렸다. 적당히 떨어진 테이블, 그 앞에 앉아 있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호남 형의 갈색 머리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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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터 경.”

윈스터 칼터. 대공의 수족 같은 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뒤라도 밟은 걸까, 하는 불쾌감에 제이드가 미간을 찌푸리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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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윈스터가 사교적으로 웃었다.

제이드는 저렇게 웃는 낯인 놈들을 믿지 않았다. 특히나 윈스터 칼터라면 살육귀라는 대공만큼이나 소문이 좋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 제이드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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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로 돌아가시기 전 좀 더 식사하고 가시죠. 어차피 경은 비칸데르령의 정문조차 못 넘을 텐데, 괜한 힘 빼지 말고요.”

저를 구슬리는 듯한 말에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윈스터를 바라보았다.

이크. 몸을 빼면서도 약 올리듯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며 제이드가 위협하듯 낮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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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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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르셨겠군요. 비칸데르령은 황족과 마델레이네 공작가 일체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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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터는 선심을 쓰듯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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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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