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디안 스젤린의 속마음
(51/151)
051. 디안 스젤린의 속마음
(51/151)
#051. 디안 스젤린의 속마음
2022.08.24.
마차가 느리게 출발했다.
예니브 거리가 멀어졌을 때에서야 올리비아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마차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옆을 따라오는 말 위에는 디안이 앉아 있었다. 늘 올리비아 앞에서 꼿꼿하던 그의 자세가 조금 무너져 있었다.
디안 뒤로 노을이 지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더라면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을 테니까. 그건 올리비아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마 디안도 그렇겠지.
올리비아는 창문에 달린 커튼을 쳤다. 바깥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올리비아는 조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이만 대공성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디안은 렌즈를 끼냐는 제 말에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출발할 수 있게끔 제가 마차에 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잠시 뒤돌았다.
다시 출발하겠다고 말할 때, 디안의 눈은 완벽한 갈색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갈색 눈 아래로 보았던 디안의 연두색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올리비아는 디안의 적의가 단순히 제가 황제파 공녀이기 때문에, 비칸데르를 향한 그의 충성심이 깊어서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고개를 돌리는 몇몇 기사들처럼.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디안은 유별나게 티가 날 정도로 저를 싫어했다.
“……방어 기제 같은 걸까.”
하지만 초록색 눈인 것을 들키기 싫어 유난히 저를 더 미워한다기에는, 예니브 거리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게 내내 걸렸다.
그렇다면 저를 꼭 집어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올리비아는 파르르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저를 싫어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이 정도로 고민을 한다니.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았다.
사생아, 반쪽짜리. 혹은 사랑받지 못하는 태자의 약혼녀. 저를 대표하는 수많은 추문. 그 가운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넘기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만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저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비칸데르의 모두를 사랑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만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자꾸 마음이 기우는 비칸데르, 그리고 비칸데르의 사람들. 그 모두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욕심이라 할지라도 괜찮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그 말은 이미 올리비아에게 주문처럼 각인되었으니까.
.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응접실.
두 사람이 대공저에서 지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칸데르령으로 온 뒤에도 식사 뒤에 함께 따뜻한 차를 하는 순서는 같았다.
평소라면 서로 떨어져 있던 낮 시간 동안 각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할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흥미롭다는 듯 저를 바라보던 에드윈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디안이 들킨 건가요, 아니면 올리비아가 알아차린 건가요?”
“뭘요?”
“디안의 렌즈요.”
순간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디안이 렌즈를 낀 사실이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고 있다는 티를 안 내려고 예니브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부터 구구절절 늘어놓았는데.
놀란 나머지 에드윈에게 묻고 싶은 두 가지 말이 꼬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알고 있었어요?”
“올리비아가 디안의 렌즈를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부터 대답하자면…….”
에드윈은 정확하게 알아들은 표를 내듯 빙그레 웃더니 열린 창문 바깥을 향해 힐끗 눈길을 주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연무장 쪽은 환했다.
우거진 나무 너머로 누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고함 같은 기합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디안의 버릇이거든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렌즈를 들키는 날이면 저렇게 화풀이처럼 훈련을 해요.”
하나의 대답으로 두 번째 질문까지 해결이 되었다. 올리비아는 또 한 가지를 물었다.
“자주 들켰었나요?”
“몇 년 전까지는 거의 매일 그랬죠. 처음에 디안이 이곳에 왔을 때 본 사람들 말고는 아마 다 그런 식으로 알았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렌즈에 익숙하지 않아 했거든요.”
언뜻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렌즈를 낄 때는 눈에 이물감이 느껴져서 어색하다고.
“오죽하면 베서니가 눈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영구적인 마법까지 걸어 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하더니 결국 나중에는 렌즈에 적응하더라고요.”
잠자코 듣고 있던 올리비아의 한쪽 눈썹이 의아한 듯 치켜 올라갔다.
뭔가 이상했다. 들키면 저렇게 화풀이처럼 훈련을 하면서도 마법까지 거절하고 들킬 위험성이 있는 렌즈를 사용했다고?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렌즈에 익숙해진 후로 한동안 안 그랬는데 오늘 저러는 걸 보니 올리비아에게 들켰구나, 했죠. 아마 나 말고도 다들 짐작했을 거예요.”
“……왜 스젤린 경이 렌즈를 고집하는지 아세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면, 어쩌면 디안 스젤린이 왜 저를 적대시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윈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올리비아의 심박수가 빨라지는 순간이었다.
“……그건, 내가 알려 줄 수 없겠는데요?”
조금은 미안하다는 미소였다.
아.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의 힘이 풀어졌다.
분명히 중립을 요구한 건 저였는데 선을 넘을 뻔했다. 올리비아는 실망감을 감추려 애써 빙그레 웃었다.
“그렇네요, 고마워요.”
“대신.”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 속 붉은 눈이 다정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디안의 개인적인 비밀 대신, 대공성의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알려 주는 건 괜찮겠죠?”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 동시에 저만 모르는 사실.
“디안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소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런가요?”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건 크게 놀라운 말이 아니었다. 저를 싫어하기에 딱 좋은 이유였으니까.
“생각만큼 놀라운 일이 아닌가 봐요.”
많이 놀랄 줄 알았는데. 에드윈이 실망스러운 듯 붉은 입술을 톡 내밀었다.
“짐작했던 사실이니까요.”
“그럼 이건 어때요?”
나른하게 퍼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비밀스러웠다. 사람을 홀리듯 바라보는 붉은 눈이 요요히 반짝였을 때.
“이 비칸데르에서 그 소문에 열을 내며 반박하던 게 바로 그 디안이었다면?”
그럴 리가.
올리비아는 단박에 부정했다. 에드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인데. 술집도 꼭 제도의 신문이 들어오는 곳까지 갔다니까요? 올리비아의 소문을 다 꿰면서 날조되었다고 하도 날뛰는 터에 내가 그 술집에 출입 금지를 시킨 적도 있어요.”
놀란 듯 커다래졌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초연해지는 얼굴 위로 많은 생각의 변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흔적들이 쌓이면서 말간 얼굴 위로 단단한 마음이 비쳐 올라왔다.
에드윈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작은 아가씨가 얼마나 심지 굳건한 사람인지. 장장 십사 년이나 매달렸던 가족들을 끊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저, 지금 스젤린 경을 봐야겠어요.”
에드윈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 * *
혼자 남은 연무장.
탕-.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디안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검을 쥐고 있던 손 전체에 강한 충격이 퍼져 나갔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대로 쓰러져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 혹시 렌즈를 낀 건가요?”
아무리 훈련을 해서 몸을 혹사시켜도 저를 향해 묻던 아가씨의 목소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베서니가 마법을 걸어 준다고 할 때 들을걸.”
잇새로 흘러나온 후회에 디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젠장, 젠장!
모두가 제 눈이 연두색인 것을 알았지만 그 고귀하다는 아가씨한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검을 내려놓은 채, 디안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 마지막 남은 미련이 뭐라고 베서니의 마법을 거절했을까!
“훈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디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환청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정도 가까운 거리로 다가올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으로 다가오는 건 분명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였다. 아까 보았던 장밋빛 드레스, 달빛에 시리게 반짝이는 결 고운 은발, 우아한 얼굴. 그리고,
“그렇게 훈련하면 내일 제 호위를 하기는 힘들겠어요, 스젤린 경.”
올곧게 디안을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까지.
“……아가씨를 뵙습니다.”
“잠시 산책을 하고 싶은데. 제 호위를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지금 막 훈련을 마쳐 불쾌한 냄새가 날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신다면 곧 다른 기사를 데려오겠습니다.”
“난 괜찮아요. 그럼 갈까요?”
디안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
.
.
비칸데르의 밤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는 제도의 대공저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면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대공성 쪽을 힐끗하다 디안을 향해 물었다.
“아마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대답하기 싫어 죽겠다는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스젤린 경이 나를 노려보았던 곳이요.”
“……!”
올리비아의 말에 디안은 그제야 제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었다. 대공 전하와 아가씨가 귀환한 첫날. 저 멀리 대공성의 발코니에 있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노려보았던 곳.
“……왜 여기로 오신 겁니까.”
“여기에 와 보면 경이 왜 저를 노려보았는지 알 수 있을까 했는데.”
올리비아는 가만히 대공성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디안을 마주했다.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 직접 알려 주세요. 왜 저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그걸 왜 알고 싶으신 겁니까.”
디안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훈련이 끝났음에도 심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아가씨의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듣고 싶지 않은 건지 스스로도 분간하지 못했을 때였다.
“전 비칸데르의 모두를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거든요.”
봄볕같이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뱃속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참아야 했다. 디안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곧은 시선이 디안을 끌어당겼다.
디안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던 초록 눈이 느리게 깜빡이다가 둥글게 휘어졌다.
“물론 예니브의 사람들도. 스젤린 경도 마찬가지로요.”
“참, 대단하십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나갔다. 디안은 시퍼렇게 날 선 눈으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제 말에 놀라고 상처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 고귀한 아가씨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고요한 얼굴로 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디안은 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둑이 터지는 것처럼 디안은 매섭게 쏘아붙였다.
“왜 남의 것을 탐내고, 티 파티에서 행패를 부리셨습니까? 왜……!”
제도의 신문에 나는 부정적 기사 중 5할이 마델레이네 공녀에 관한 것이었다.
초록 눈의 반쪽짜리 공녀가 어디에서 수치도 모르고 남의 것을 탐했다더라, 어디에서 행패를 부렸다더라. 저열한 수를 써 가며 남을 괴롭힌다더라.
처음에는 그 소문이 날조라고 반박하던 디안조차 결국 지칠 정도로 수많은 가십들이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디안은 한 번만이라도 묻고 싶었다.
“초록색 눈을 당당히 들고 다니실 정도로 그토록 귀하게 사랑받는 공녀님께서 뭐가 부족하셨습니까.”
“…….”
“지금 이렇게 예니브 사람들을 생각하실 아량이 있으시다면. 그때도 조금만 초록 눈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중하실 수는 없으셨습니까?”
“…….”
“……아가씨께서는 초록색 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핍박받지 않는 유일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차마 걸러지지 못한 진득한 감정이 그대로 흘러 나갔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디안은 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물론 비천한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 해도 귀한 공녀님께서는 다른 초록 눈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디안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렌즈를 끼고 눈을 가려야 했든, 영구 마법을 걸어야 했든. 초록 눈 그대로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든.”
고요한 밤하늘 아래로, 체념 섞인 목소리가 선명하게 번졌다.
“……늘 사랑만 받아 오신 아가씨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