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0. 티 나게 적의를 보이는 자가 숨겼던 것 (50/151)


#050. 티 나게 적의를 보이는 자가 숨겼던 것
2022.08.21.



 
화창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대공성의 식당.

아침 식사가 끝날 시간이었지만 벽에 시립한 사용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밤에 잠 잘 잤다니까요?”

먼 곳을 바라보며 변명하듯 말하는 아가씨와,


“……그렇다기에는 늦은 밤에 도서관을 찾았다는 보고를 내가 들었는데요?”

상냥한 목소리와 달리 부드럽게 책망하는 대공 전하의 대화에 말이다.

귀한 아가씨가 비칸데르령으로 온 뒤부터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부분은 아가씨가 화사하게 웃으며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내셨지만 오늘처럼 드물게 대공 전하가 승기를 잡을 때도 있었다. 아가씨의 얼굴에 뜨끔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침에 읽을 책을 가지러 간 거였어요.”

제가 말하고도 궁색한 변명에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었다. 최대한 예쁘게. 에드윈의 엄한 얼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서히 풀어졌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뭐를요?”

“그러면 내가 마음 약해지는 거 다 알고서.”

“당연히 아니까 이러죠.”

올리비아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순간 에드윈의 입매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러면 그것도 알아요?”

“뭘요?”

“올리비아가 그럴 때마다 난 자꾸 잡힌 물고기가 된 것처럼 애정을 갈구하고 싶어지는걸요.”

에드윈이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올리비아의 손목을 눈짓했다.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손목 안쪽이 화상 입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손목에 닿았던 기억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이 식당에서 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당황함에 입술만 뻐끔거리던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문득 저 말이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은근한 밀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비아의 복숭앗빛 뺨 위로 홍조가 올라왔다. 이런 거에 설레면 안 되는데. 올리비아가 부러 에드윈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윈의 눈가에 웃음이 고였다.


“어디 가게요?”

“낮잠 자러 가요.”

낮잠이라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에드윈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토끼처럼 달아나는 아가씨가 또 한 번 흘겨보기라도 한다면 귀여워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올 테니까.

대신 에드윈은 입맛을 다시며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퍼졌다.

어느 순간부터 올리비아의 드레스 색깔은 점점 다채로워졌다. 머리에 꽂는 장식도 점점 다양해졌다. 에드윈은 그 모든 게 베서니가 부린 솜씨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에스코트는?”

“필요 없어요!”

 

.
.
.



“왜 자꾸 심술부리십니까. 그러다 아가씨께서 진짜 토라지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지금 나야말로 토라지기 일보 직전이야.”

하워드의 말에 에드윈이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식탁보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저의 놀림에 매번 저렇게 사랑스럽게 굴면서 도망치는 건 반칙이었다.

에드윈은 올리비아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새침하게 눈을 흘기던 얼굴에 에드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오늘은 머랭 쿠키도 한 조각 드셨네요.”

“그렇지?”

하워드의 말에 에드윈도 올리비아의 접시 위를 바라보았다. 아파서 잠에 취했던 날, 단 것은 살찐다는 그 목소리가 아프게 맺혔었다. 일부러 단 음식을 챙겨 둘 때마다 애써 피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렸는데.

오늘 올리비아의 접시 위 머랭 쿠키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안, 울어요. 그러니까 같이 웃어 줘요.”

 
원래도 씩씩하고 단단한 사람인 걸 알았지만.

이렇게 단시간 내에 활짝 피어날 줄은 몰랐다.

에드윈이 체통 없이 식탁 위에 엎어졌다.

저 순진한 아가씨는 고작 손목에 입을 맞추는 걸로도 얼굴이 붉어지는데.

저는 이렇게 점점 더 올리비아가 갈급해졌다. 그 달콤한 향이,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가, 곧게 바라보는 초록색 눈이.

아니, 올리비아 그 자체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자꾸 새어 나갔다.

하지만 기다릴 것이다. 저는 누구보다 올리비아한테 어울리는 남자이고 싶었으니까.

에드윈은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훈련이나 가자.”

이럴 때는 정신 수양이 최고였다. 무덤덤한 하워드의 얼굴이 아주 조금 흐려졌다.

* * *



“뭐 느끼는 거 없어?”

올리비아가 계단 위를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베서니가 디안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없는데요.”

시큰둥한 척 대답했지만 디안의 갈색 눈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예니브 거리에서부터였다. 이상할 정도로 예니브 거리에 대해 관심을 갖던 아가씨의 모습은 이제껏 디안이 생각하던 모습과 달랐다.

심지어 귀한 아가씨가 비칸데르에서도 가장 낮은 곳인 예니브 거리의 구획 정리까지 담당하려 들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하면서도 어제 보았던 붉게 번진 눈가가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디안은 손으로 벅벅 머리를 헤집었다. 추문을 잔뜩 달고 다니는 오만한 공녀가 뭐라고 저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였다.


“설마, 머릿니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나른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디안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었다. 대공 전하였다. 디안은 바로 예를 갖췄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늘 존경하는 대공 전하였다. 다 스러져 가는 가문을 이토록 융성하고 튼튼하게 재건하다니. 무엇보다도 디안에게는 맞아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디안은 늘 대공의 앞에서 간절하게 눈을 반짝였다. 꼭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것처럼.

하지만 오늘의 디안은 어딘가 불편한 듯 계속 몸을 움츠렸다. 뜨거운 감자를 삼킨 것처럼 속이 불편해 결국 디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감히, 독단적인 판단으로 전하께서 맹세를 바친 아가씨께 불충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어떤 곳보다 서슬 퍼런 질서가 움직이는 곳, 비칸데르에서 제가 대공비가 될 공녀에게 딴지를 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쭉 대공 전하를 피해 다녔는데. 디안이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하께서 내리실 처분을 기다릴 때였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예?”

푹 수그러들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대공이 애매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아가씨가 내게 당부해 두었거든. 비칸데르령으로 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반겨 주는지 반겨 주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

“그러니 지금 지켜보는 중이야. 너를 어떻게 처분하는지는 올리비아의 소관이니까.”

디안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들려오는 소문들은 분명히, 공녀가 오만방자한 아가씨라고 했는데. 대공 전하께 말씀드리면 저 같은 일개 기사 따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저 아가씨는 알려진 추문과, 그리고 제 생각과 계속 다른 행보를 보이는 걸까.


“대신. 훈련은 하러 가자.”

“……예?”

순간 디안의 몸이 기름칠 되지 않은 문처럼 삐걱거렸다. 대공은 그 화사한 미모로 활짝 웃으며 디안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안 그래도 내가 지금 몹시 대련이 고프거든? 잘됐네. 디안이 내 상대를 해 주면 되겠어.”

가볍게 말하는 목소리 아래로 절절 끓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누구든 알 수 있었다. 디안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사용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제 시선을 피했다.

전쟁 영웅. 냉혹한 북부의 군주. 살인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낯과 달리 대공이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는 바로 옆에서 봐 온 디안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대공에게 끌려갔다간 너덜너덜한 채로 공녀를 모시고 예니브 거리까지 가야 했다.

문득 하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도움을 요청하려는 디안에게 하워드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멀리 안 간다.’

 

* * *

방으로 올라온 올리비아는 책상 앞에 앉았다. 달아오른 뺨에 손부채질을 하면서 닫힌 문 쪽으로 곱게 눈을 흘겼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장난이나 치고.”

정확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드윈을 향해.

에드윈의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올리비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이게 다 에드윈의 이름 탓이다.

발음조차 찬란하게 반짝이는 예쁜 이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올리비아는 서랍 속 일기장을 꺼냈다. 대공저에 있을 때 해나가 사다 주었던 일기장이었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첫 장을 넘기기 무섭게 보이는 글씨에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제멋대로 번진 글자를 바라볼 때마다 마델레이네를 지웠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을 상기하면서도 이제 올리비아는 웃을 수 있었다. 새 일기장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 적혀 있었으니까.

- 나는 디안 스젤린 경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수 있다.

- 내 눈은 특별하게 예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나는 예니브 거리를 아이들이 원하는 터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기획안에는 내 이름이 들어간다. 잘할 수 있을 거다.

이제 일기는 더 이상 올리비아를 옥죄는 다짐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향한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기분 좋게 웃던 올리비아의 눈에 완성되지 않은 일기의 한 문장이 박혔다.

- 그리고 나는 에드윈에게 말할 수 있다.

목적어가 빠진 다짐.

올리비아는 가만히 글자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펜촉이 누르고 지나간 종이의 촉감을 느끼다가 조용히 펜을 들어 올렸다.

사각이는 소리가 지나간 곳에는 한 문장이 더 늘어났다.

- 예니브 거리에 대한 계획안을 다 쓴 뒤에 말할 거다.
 


“……해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진심에 올리비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입을 가린 채 올리비아가 방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방을 확인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예니브 거리의 초입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


“굳이 이 예니브 거리만의 특색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나는 디안 스젤린 경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수 있다.

그 문장은 지울까.

퉁명스러운 디안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잠시 제 일기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이 예니브 거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디안은 사사건건 올리비아의 계획에 딴지를 걸었다.


“그러면 경은 예니브 거리가 이대로 남아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물거리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말인 듯싶었다.

결국 올리비아는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곧게 편 채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이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퉁명스러운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경. 경은 정말 티 나게 저를 안 좋아하시네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불편하다면, 우선은 호위 기사를 바꾸도록 하죠. 저는 빨리 이 예니브를 정리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에드윈에게 더 당당히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디안이 열 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왜 귀한 아가씨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예니브에 관심을…… 아!”

그러더니 갑자기 제 오른쪽 눈가를 감싸 쥐었다.

어딘가 아픈 듯한 모습에 그와 대립하고 있던 올리비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경. 혹시 렌즈를 낀 건가요?”

 

 
디안의 갈색 눈 아래로 연두색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한때 제도에서도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눈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컬러 렌즈.

올리비아가 직시한 사실에 디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들킨 듯 참담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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