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8. 하고 싶은 걸 해요. 그게 뭐든 (48/151)


#048. 하고 싶은 걸 해요. 그게 뭐든
2022.08.14.



 
- 작년 춘궁기에 황녀는 르칼르의 목걸이를 구매하기 위해 지하 경매를 다녔습니다. 정보상 위르겐이 황녀의 유모 루하스 남작 부인을 봤다고 확인했습니다.

휘갈겨 쓴 전보 말미에는 제도의 저명한 신문사의 기사가 붙어 있었다. 작년, 춘궁기에 빠진 리테일 영지를 복구하기 위해 황녀가 자애로운 구휼을 펼쳤다는 내용이었다.

성녀처럼 웃는 황녀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에드윈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황녀가 한 게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후 공을 돌렸을까.”

그 말에 하워드의 머릿속에 얼핏 제도의 대공저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서 편지가 왔다며. 또 황제야?”

 
지긋지긋하기도 해라. 하워드는 덤덤한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늘 동조해 주던 소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에 태자, 황녀까지. 입궁하라는 편지가 총 세 통이나 왔다.”


“태자라면 아가씨께 편지를 보낼 법하다지만. 황녀까지? 설마 전하께 입궁을 명한 건 아닐 테고. 아가씨께?”


“그러게. 아주 황실끼리 똘똘 뭉치기라도 했나 봐.”

 
소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들의 대화는 끝났었다.

황녀가 유난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날의 편지가 떠오른 건 하워드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워드가 반사적으로 대공을 바라보았을 때.

에드윈은 이미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칼터 경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마차에 탄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물은 말에 에드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도에서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곧 복귀한다는 소식이었는데요.”

거짓말. 아까 저를 바라보던 에드윈의 표정을 봤는데.

그건 복귀 따위의 일상적인 소식을 들은 표정과는 결이 달랐다. 뭔가 복잡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숨이 막힌 듯 갑갑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복귀한다는 소식이라면 하워드가 제게도 같이 말해 줬을 거다.

에드윈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하긴, 에드윈이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은 둘의 첫 만남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전쟁 영웅이 고작 조무래기 건달들한테 둘러싸인 걸로 눈물까지 흘렸는데 말이다.

분명 제게 감추는 이유가 있겠지. 저만 해도 황녀의 명에 따라 폐광산을 방문했던 것도, 비칸데르령을 들렀던 것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대공인 에드윈은 저보다 더 비밀도 많고 감추는 것도 많을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던 올리비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서운하고 섭섭했다.

빤한 시선이 느껴졌는지 에드윈이 야살스레 눈매를 휘었다.


“왜 그렇게 봐요? 이제야 나를 예뻐해 줄 작정이에요?”

에드윈은 평소처럼 올리비아가 아니라고 얼굴을 붉히며 받아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려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 위로 언뜻 서운함이 비쳤다.


“올리비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에드윈이 조심스레 올리비아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일부러 무시한 채 바깥을 바라보았다. 지금 에드윈을 보았다가는 이 삐죽삐죽한 마음이 에드윈한테 따져 물을 것 같았다.


“……첫 영지 시찰이 끝나서 아쉬워서 그래요. 천천히 영지를 돌아서 갈 수 있나요?”

“그럼요.”

올리비아의 말에 에드윈이 얼른 마부석을 향해 명했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공성으로 향하던 마차가 외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창문 바깥으로 아직 구획 정리가 되지 않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메마르고 황량한 북부의 이미지와 달리 마을의 집들은 알록달록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쉬운 거 말고. 나한테 서운한 건 없죠?”

하여튼 눈치도 빠르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올리비아는 모르는 척했다.


“제가 에드윈한테 서운할 게 뭐가 있겠어요.”

아차. 제가 말하고도 서운한 티가 물씬 풍겼다. 에드윈의 시선이 자꾸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를 향해 말했다.

못났다. 올리비아.

에드윈이 저와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섭섭해하다니.

생각해 보니 새삼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까지 저를 돌아봐 주지 않았던 가족들, 그리고 전 약혼자한테도 이렇게 토라진 티를 낸 적 없었는데.

어느새 이렇게까지 에드윈을 의지하게 된 걸까. 그리고 이렇게까지 믿게 된 걸까.

뾰족하게 돋아났던 서운함은 얼음이 녹는 것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분 위로 간질이는 마음이 부피를 키워 갈 때였다.


“……잠깐만요, 에드윈.”

올리비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에드윈을 돌아보려는 찰나, 창문 너머로 마주친 무언가가 올리비아의 눈길을 끌었다.


“마차를 잠깐만 세워 줄 수 있어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깊숙이 로브를 눌러쓴 아이.

아이의 눈은 저와 비슷한 초록색이었다.

.
.
.

베서니의 말이 맞았다. 이 드레스는 움직이기 편했다.

마차에서 내린 올리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에드윈을 생각하느라 창밖의 풍경이 달라진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군데군데 널빤지를 얼기설기 덧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묘하게 냄새나는 골목들이 이리저리 뻗어 있는 이곳은.

터닝벨, 제가 살았던 부랑자의 거리를 닮았다.

순간 먹먹해지는 기분에 올리비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뒤에서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예니브예요. 비칸데르령에 있는, 떠돌이와 부랑자의 거리죠.”

어쩌면 설명마저도 그렇게 터닝벨과 똑 닮았을까. 동시에 화들짝 놀라던 아까 본 초록 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올리비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엄마를 제외하고 초록색 눈을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 프란츠 제국에서 초록색 눈은 천하디천한 떠돌이 무희의 눈이라고 불렸다.

수치스러운 초록색이라고 불렸지만, 올리비아에게 이 초록색 눈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교계에서 초록색 눈은 저뿐이었고, 그 넓은 제도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올리비아는 초록색 눈은 저 혼자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치듯 마주친 아이의 눈도 분명 초록색이었다.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마음속에 동질감이 몰려들었다. 거리 어귀에 선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재빠르게 사라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람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 아가씨.”

디안이었다.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간을 구기던 디안이 무슨 일인지 먼저 저를 불렀다. 하지만 반갑다는 마음이 드는 것보다는 초록색 눈의 아이가 더 급했다.


“여기는 갑자기 왜.”

디안의 목소리가 어딘지 불안했지만, 올리비아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제 말만 쏟아 냈다.


“내가 누굴 좀 본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새 없어졌네요. 같이 찾아 주겠어요?”

“디안 형이야?”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앳되었다. 설마 하고 내려다본 곳에 초록색 눈이 디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디안은 낭패라는 듯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 * *

와아아-.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제게 퉁명스러운 디안은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충실히 하는 중이었다.

올리비아는 우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열세 명. 꼬질꼬질한 차림새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제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하는 어린아이들의 눈은 대부분 초록색이었다.

제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초록 눈의 아이들이 여기에 있었다.

올리비아는 한 명, 한 명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헐렁한 셔츠 아래로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누런 멍이 보였을 때,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저 정도라면 제법 아팠을 텐데.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오히려 해맑게 웃으며 익숙하게 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놀랐어요?”

“네. 한때 저는 세상에 초록색 눈은 저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얼떨떨한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에드윈이 낮게 웃었다.


“이렇게 많은 초록색 눈을 본 소감은 어때요?”

“……묘해요.”

정말이지 묘한 일이었다. 엄마와 저 말고도 눈 색깔이 초록색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저 사람들은 어떻게 다 이 비칸데르령으로 온 거예요?”

“어떻게 온 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알아요.”

“뭔데요?”

에드윈은 잠시 부끄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에드윈이 말을 하는 순간, 올리비아의 귀가 먹먹하게 번졌다.


“비칸데르에서는 초록색 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눈들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에드윈은 다시 한번 웃으며 비밀을 말하듯 올리비아한테 속삭였다.


“사실 저는 올리비아의 초록색 눈이 아주 특별하게 예쁘다고 생각해요.”

그 음절 하나하나가 올리비아의 마음 깊은 곳에 파동을 일으켰다.

올리비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통제를 상실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천, 하지 않고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가끔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향해 자문했다.

저도 보라색 자수정 빛 눈이었으면 마델레이네 공작가에 잘 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초록색 눈이 아니었더라면 레오포드는 저를 사랑해 주었을까.

초록색 눈이 아니었더라면. 천한 무희의 눈이 아니었더라면.

그러다 종래에는 꼭 고개를 저었다. 이건 엄마가 남겨 준 마지막 흔적이라고. 저라도 제 초록색 눈을 사랑해 줘야 한다고.

주문처럼 외우는 말로 얄팍한 긍지를 내세우며 칼날 같은 시선에 베인 상처를 가렸다.

올리비아의 눈이 울 것처럼 절박해졌을 때,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하게 시선을 맞췄다.


“……천하다니. 이렇게 예쁘게 반짝이는걸요?”

한숨 섞인 그 다정한 목소리가 뭐라고. 올리비아의 해묵은 기억들 위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초록색 눈이라니. 고귀한 마델레이네에 저런 천한 피가 섞일 줄이야.”


“저 눈 좀 보세요. 떠돌이 무희를 닮은 수치스러운 초록색이잖아요.”

 
멸시와 경멸이 담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시선들이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늘 저를 아프게 찌르던 말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제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걸까.


“에드윈.”

“올리비아.”

“안, 울어요. 그러니까 같이 웃어 줘요.”

 

 
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게 웃어야 했다.

올리비아는 씩씩하게 웃었다. 초록색 눈 위로 투명한 눈물이 올라온 게 선연했지만, 에드윈은 모르는 척 웃었다.


“역시 씩씩한 내 아가씨답네요.”

 

.
.
.



“이 예니브 거리를 정비하려는 계획은 세웠는데, 아직까지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에드윈이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사는 거리를 판자촌으로 둘 수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곧은 시선에 불꽃 같은 의지가 튀었다. 에드윈은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그저 상냥하게 웃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혹시 제가 지금부터 큰일을 벌이고 싶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예를 들어, 이 예니브의 구획 정리라든가.”

올리비아가 긴장을 삼키며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대공과 대공비의 재산이 공동이라지만 아직 저는 정식으로 대공비가 된 것도 아니었다. 이 예니브의 구획을 정리한다면 그에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대공저의 돈이어야 했다.

하지만 저는 누구보다 이 예니브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제가 갈 곳이 없었을 때 다시 돌아간 곳이 터닝벨이었던 만큼.

저 아이들의 터전인 이곳을 제대로 바꿔 줄 수 있었다.


“올리비아.”

나지막한 에드윈의 부름에 올리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먼저 말했다.


“……예산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건축과 토목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게 아니라.”

에드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는다. 다정한 웃음. 저를 온전히 믿는다는 웃음에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배포를 키우라는 내 말을 잊은 건 아니죠.”

 


“……뭐, 올리비아의 배포가 더 커진다면 모를까.”

대공저에서 에드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올리비아는 이 대화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어렴풋이 예측되었다.

그 예상에 맞게 에드윈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은 식사도 잘했고, 잠도 잘 잤으니. 올리비아, 그대가 할 일은 하나네요.”

올리비아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 기대대로, 에드윈이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예산은 신경 쓰지 말고.”

에드윈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알겠지만, 올리비아가 해 준 조언 덕분에 안 그래도 부유한 비칸데르가 앞으로 세금까지 절세할 수 있을 예정이거든요.”

 

* * *

한편 같은 시각. 황녀 궁의 응접실.

시녀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적막하게 가라앉은 이 침묵이 태풍의 눈처럼 매섭다는 것을 시녀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다시.”

그리고 황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긋하게 말했다.


“다시 말해 봐요.”

우아한 목소리와 달리 재정 관리관 유블러 백작을 바라보는 황녀의 눈빛이 형형했다. 시녀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유블러 백작이 평소처럼 굴어 달라고.

하지만 평소 황녀의 말에 쩔쩔매던 유블러 백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마법 인장으로 소유권을 넘긴다는 공증까지 마친 백수정 광산을 다시 찾아올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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