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잡은 물고기에게도 애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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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잡은 물고기에게도 애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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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잡은 물고기에게도 애정을
2022.08.07.
“디안. 훈련 안 해?”
하워드가 디안을 툭 쳤다. 대공 전하와 마델레이네 공녀가 다녀간 후, 훈련이 재개된 연무장은 다시 소란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디안은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섞이는 대신 전하와 ‘공녀’가 사라진 본성 길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디안의 갈색 눈이 멍하니 본성을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디안 스젤린, 대공 전하께 충성을 바친 비칸데르의 기사입니다.”
아침 훈련 시간. 도열한 기사들을 뒤로한 채, 디안은 공녀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공녀의 초록색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어젯밤 눈이 마주친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분노를 누르며 공녀에게 예를 갖춘 보람이 있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황제파의 수장인 마델레이네의 첫째 공녀이자 태자의 약혼녀.
동시에 통제 불능이었던 황궁 제3기사단 부단장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동생.
그리고.
……천한 무희의 상징인 초록 눈으로 오만하게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요사스럽고 막무가내인 사생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디안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 대한 소문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도라면 치를 떨면서도 가끔 술집에 가는 날이면 몰래 제도의 신문을 통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래서 디안은 공녀를 믿을 수 없었다.
태자를 사랑해서 그의 연인까지 묵인하는 공녀가 삽시간에 태도를 바꾸어 대공 전하를 따라 이 비칸데르로 내려오다니. 분명 무슨 음험한 수작을 부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소문대로라면 공녀는 지금 저한테 패악을 부려야 마땅했다.
디안은 부디 공녀가 저를 향해 크게 화를 내 주길 바랐다. 존경하는 대공 전하의 눈에 낀 콩깍지가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젤린 경.”
하지만 공녀가 입술을 떼었을 때, 디안은 일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 기대와 달리 정중하고 예의 바른 인사였다.
이게 아닌데. 디안이 무심코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디안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저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에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눈이 디안을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한다니. 도대체 뭘 말인가. 디안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디안 스젤린이 대공 전하와 베서니, 그리고 누나인 데이지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다니.
뒤늦게 꼴사나운 일이라고 스스로를 욕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전하와 공녀는 이미 본성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제야 디안은 몰려오는 수치심에 하, 숨을 뱉으며 본성을 노려보았다.
요사스럽기 짝이 없다더니!
“와 씨. 뭐 저런, 악!”
말도 끝내기 전에 디안은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무언가 강한 충격이 저를 가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오금을 세차게 걷어차였다.
순식간에 연무장에 나동그라진 디안 위로 묵직한 그림자가 졌다.
“아가씨께 말조심해.”
하워드였다. 디안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를 때려눕힌 사람이 인터필드 경이라고?
하워드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들고 있던 커다란 건틀렛을 휙 하고 던졌다. 누군가 “나이스 캐치!” 하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번에 날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디안이 몸을 낮추고 하워드를 노려보았다.
반사적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는 디안의 모습에 하워드는 입꼬리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전하께서는 눈도 좋으셨다. 전장을 돌면서 쟁쟁한 놈들을 스카우트하며 대공가의 세를 불리시더니 심지어 맞아 죽어 가는 놈을 주운 것도 제법 독기 있는 놈이었다니.
이제 눈높이도, 체격도 하워드와 비등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하워드의 눈에는 디안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선했다.
숨 쉴 때마다 갈비뼈가 부푸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 곳곳에 든 싯누런 멍들. 그리고 가물가물하게 감기던 연두색 눈까지. 디안을 에워쌌던 놈들은 도망치면서도 큰소리였다.
“천한 초록 눈 주제에 어딜 까불어! 네 엄마도 네가 초록 눈이라 널 버리고 간 거라며?”
디안이 낮게 그르렁댔을 때에서야 하워드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디안을 마주 보았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 속 갈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지금 공녀 때,”
“공녀 아니고 아가씨.”
하지만 과거가 안쓰러운 놈이라고 해서 하워드가 봐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것도 놈이 불충을 저지르는 대상이 전하께서 맹세를 바치신 아가씨라면 더욱.
……제가 아가씨께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하워드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동시에 볕에 그은 디안의 얼굴이 빨간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졌다.
순식간에 날 선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분노로 씨근덕거리는 디안의 숨소리와 달리 갈색 눈은 차갑게 식어 갔다.
이내 연무장에 하워드와 디안을 둘러싸고 둥근 원 모양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개중에 누군가는 견습 기사한테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잘 봐 둬. 인터필드 경과 스젤린 경의 맨손 격투는 실전 그 자체니까.”
“설마. 그래도 스젤린 경이 인터필드 경의 수제자라면서요. 그렇게 심하게 하시겠어요?”
견습 기사는 진저리를 치며 상급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죽일 듯 달려드는 스젤린 경을 보면서 견습 기사는 제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전장에서 헤페르티 군을 찢어 죽일 듯 달려들었다는 불같은 디안 스젤린의 성질머리는 그 무서운 하워드 인터필드 경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이다.
* * *
뒤로 두고 온 연무장에서 시끄러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본성의 정원에 들어서며, 올리비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모래 먼지가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는 게 보였다. 열띤 응원 가운데 언뜻 하워드와 디안의 이름이 들렸다.
디안. 디안 스젤린.
올리비아는 입속으로 디안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러다 불쑥 그녀의 눈앞에 에드윈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불과 10cm의 거리. 긴 속눈썹이 팔랑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올리비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에드윈이 아름다운 얼굴을 갸웃거렸다. 순진한 표정과 달리 붉은 눈은 짙게 가라앉은 채 집요하게 올리비아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기사에 관심이 있다면 바로 옆에도 있는데 말이죠, 올리비아.”
귓가를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없이 달큼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을 떠올렸다. 묘하게 열기를 오르게 하는 짙은 시선에 올리비아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 옆의 기사님께서는 제가 자신만만할 만큼 이미 제게 관심이 많으셔서 말이죠.”
능청맞게 대꾸하는 목소리와 달리 복숭앗빛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에드윈은 그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제야 이 의심 많은 아가씨가 은연중에라도 제 마음을 믿는다는 게 드러났다.
에드윈은 웃음을 삼키며 상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 잡은 물고기한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다만 저는 제 물고기가 사는 이 비칸데르의 모두를 사랑하고 싶, 아!”
에드윈의 말을 받아치던 올리비아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심코 내저은 손이 에드윈의 손에 잡혔다.
에스코트 때마다 잡는 손이지만 왠지 처음 잡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난히 에드윈의 손이 덥게 느껴졌다.
술이 덜 깬 건 아닐 텐데. 아침 일찍부터 토마토 수프를 먹었으니까.
자꾸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계속 에드윈의 손이, 그리고 시선이 의식되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올리비아가 헛숨을 삼켰다. 에드윈이 짓궂게 말끝을 늘렸다.
“왜 놀란 토끼 눈이실까?”
“그야 갑자기 잡으시니까.”
“그래서 싫으실까요?”
걱정 가득한 목소리와 동시에 단단하게 저를 잡아 주던 손이 슬며시 힘을 풀었다. 금방이라도 놓을 듯 뒤로 물러나는 손이 안타까워서 올리비아가 와락, 그의 손을 다시 잡은 순간 에드윈의 눈매가 다정하게 휘었다.
“이렇게 쉬이 나를 부릴 줄 알면서.”
쉽게 부리다니.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뛰어 숨이 차는데.
하지만 올리비아는 말하는 대신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비칸데르를 사랑해 주는 건 환영이지만.”
“…….”
“비칸데르령에 신경 써 주시는 만큼, 이 잡힌 물고기한테도 관심을 보여 줘요.”
농밀한 시선이 닿을 때마다 올리비아의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제 손안에서 움찔대는 작은 손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에드윈은 이 토끼 같은 아가씨가 도망갈 것을 알면서도 개수작을 부리기로 했다.
“……내 숫기 없는 아가씨를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손을 제 가까이 끌었다. 놀란 초록색 눈이 커다래졌을 때, 에드윈은 맥박이 톡톡, 빠르게 뛰는 여린 손목에 입을 맞췄다.
피부에 닿는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쩐지 야하게 울리고 나서야 에드윈은 눈을 내리깔며 올리비아를 놓아주었다.
“날 좀 제대로 예뻐해 달라는 말이에요.”
입술 끝에 붉은 유혹 한 조각이 걸렸다. 지독히도 나른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에드윈의 손에서 떨어진 팔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긴 올리비아는 제 손목 안쪽 맥박 위의 여린 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다고 느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올리비아는 뒤를 돌았다. 대공성으로 향하는 공녀다운 우아한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지나치는 하인들과 시녀들이 저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것도 모르고 뛰어가자 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아가씨?”
발코니에 앉아 있던 베서니가 의아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불렀다. 아침을 먹은 뒤 기사들을 보고 오겠다며 나란히 나간 두 사람 중 대공은 어디로 갔는지 새빨개진 얼굴의 아가씨만 돌아왔다.
“네? 아, 베서니.”
희고 예쁜 얼굴이 어딘지 멍하게 들떠 있었다. 이 서늘한 북부에서 더위는 아닐 텐데. 의심하던 베서니는 곧 감을 잡고 은근하게 웃었다. 역시나 저 멀리 에드윈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베서니는 현명한 어른답게 모른 척하며 올리비아의 의자를 빼내 주었다. 의자에 앉은 올리비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더운 티를 냈다.
“호위를 맡길 만한 기사들은 잘 보고 오셨나요?”
“아, 네.”
맞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제가 기사단을 보고 온 이유를 다시금 생각했다.
“영지 시찰도 좋죠. 단, 전담 시녀와 호위 기사는 갖춘 상태에서 나가요.”
아침 식사 때 에드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드윈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뺨에 다시 알 수 없는 열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저를 보는 베서니의 시선이 괜히 묘하게 느껴져서 올리비아는 혼잣말을 했다.
“……북부도 생각만큼 춥지는 않네요.”
“춥지 않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아가씨.”
베서니가 정말 다행이라는 얼굴을 해서 올리비아의 양심이 조금 찔렸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전담 시녀는 어떻게 배정되죠? 아직 제가 대공비가 된 것은 아니니 가신들의 가문에서 영애를 받기에는 애매한 상황이라.”
대공비의 전담 시녀는 보통 대공 가문의 가신 출신인 영애들이 맡아 했다. 하지만 선대 대공이 사망한 전쟁에 대공가 가신 가문들도 참전해 줄줄이 대가 끊겼다는 것을 올리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에둘러 말했으니, 좀 이따 에드윈이 온다면 베서니가 제 편을 들어 줄 것…….
“그러면 제가 전담 시녀도 맡아 하면 되죠!”
활기차게 손뼉을 치는 베서니의 모습에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베서니는 집사이자 북쪽의 마법사이자…….”
아 참, 하나 더 있었지.
“……수예도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베서니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마세요. 저는 원래 선대 대공비 전하의 전담 시녀로 이 비칸데르에 오게 되었답니다.”
선대 대공비 전하라면. 멸망한 공국 로웰의 마지막 공주다.
공국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금기로 취급되었다. 선대 대공이 전쟁터에 나갔던 이유 역시 선대 대공비 때문이라고 들었다.
언뜻 떠오르는 이야기에 올리비아가 침묵을 유지했다. 곧 촉촉하게 젖어 들던 베서니의 눈이 활짝 웃었다.
“……참! 아가씨, 호위 기사는 어떻게 하시게요? 제도에서 윈스터와 그래도 편하게 지내셨다고 들었는데. 그가 오기 전까지 하워드를 전담으로 두실까요?”
올리비아는 구태여 선대 대공비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리움 담뿍 묻어나는 베서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저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서요.”
베서니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와 잘 지내는 방법이 호위 기사를 정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람. 그러다 설마, 하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가 바로 맞추었다는 듯 눈을 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기사만큼은 돌아가면서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좋은 생각인데요. 아가씨?”
“시작은, 스젤린 경부터요.”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연무장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를 노려보던 디안 스젤린을 떠올리는 순간, 저 멀리서 아득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