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4. 어긋남의 시작 (44/151)


#044. 어긋남의 시작
2022.07.31.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의 집무실. 한낮의 햇살이 둥근 유리창을 투과했다.

슬금슬금 책상 위로 올라오는 햇살에 헉슬리 경은 아차 하며 얼른 커튼을 쳤다.

다행히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집무실을 메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마델레이네 공작을 보필해 온 조지 헉슬리 경은 지금 공작의 상태가 폭풍 전야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헉슬리 경은 보좌관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헉슬리 경은 소리를 죽인 채 집무실을 나섰다. 가볍게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지오반니 마델레이네는 탁한 숨을 내뱉었다.

형형하게 날 선 자수정 빛 눈동자가 서류를 노려보았다. 글자가 이지러지며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난 귀족 회의 때 본 비칸데르 대공의 얼굴만 선명해졌다.


“거기까지라고. 내가 친절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공작.”

 
귀족 회의가 끝나고, 지오반니가 이를 악물고 올리비아를 찾을 때였다.

행적도 보이지 않는 올리비아 대신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나른한 목소리가 지오반니를 향했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대공이 서 있었다.


“여기서 더 다가오려는 건 내 적이 되겠다고 선포하는 건가?”


“……아비가 딸을 보려고 하는 게 위협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전하.”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입에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껄끄러웠다. 동시에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퍽 우습다는 듯 씩 웃는 눈매가 서늘했다.

그러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이며 지오반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세상에. 어떤 아비가 딸이 혼자 웅크려 있는 것을 가만히 둔단 말인가.”

 
딸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겠지.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허를 찔린 지오반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바랐다는 듯 대공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운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도, 거기까지만 하라는 말도 듣지 않았으니. 부디 오늘의 경고만은 새겨듣길 바라네.”

 
며칠이 지났는데도 뇌리에 남은 목소리가 선뜩했다. 집무실의 익숙한 책상을 노려보던 지오반니가 별안간 크게 심호흡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그따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이십일 년 전, 돈이면 다 되는 무희인 그 애의 어미는 술에 취한 저와 함께 있었다. 귀족파인 엘킨 공작과 독대가 있었던 밤, 평소보다 아찔하게 취한 그날 밤이 제 인생 최대의 후회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호흡이 빨라졌다. 요즘 들어 목덜미가 당기고 두통이 오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의원을 만난 지 제법 되었던 것 같은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차가 식어 새로 가져왔습니다.”

은은한 향과 함께 헉슬리 경이 새로운 티 포트와 찻잔을 내밀었다. 투명하게 우러난 갈색 차의 향이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고맙네.”

지오반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딱 그의 취향에 맞게 따끈한 차였다.

차를 마시는 공작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것을 본 헉슬리 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공작의 화를 식혀 주는 저 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첫째 공녀한테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이거는 심혈관에 좋은 차인데, 가끔 아버지가 찾으시더라고요. 참, 찻잔의 온도는 손목에 대었을 때 뜨거울 정도여야 해요. 그래야 잡고 드시기에 적당히 따끈한 정도로 생각하시더라고요.”

 
불현듯 보좌관으로 임관했을 당시, 다구를 싸 왔던 첫째 공녀가 떠올랐다.

직접 차를 내갈 생각도 안 하면서 제게 차를 우리는 방법을 알려 주었던 첫째 공녀는 기대를 품은 초록색 눈으로 이 집무실을 바라보곤 했다.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못 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 * *

그날 늦은 저녁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응접실.

콘라드는 한숨을 삼켰다.

급한 일이라는 집사의 말대로였다. 장부에 적힌 어음과 대금 처리는 한눈에 봐도 맞지 않았다.

그가 순간 굳어진 기색을 앞에 있는 에셀라라고 눈치를 못 채지는 않았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제가 몇 번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잔뜩 주눅 든 막냇동생의 얼굴에 콘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분기별 대금 장부라서 바로 알아채기는 어려웠을 거야.”

“소공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에셀라 아가씨. 아가씨 나이대에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데 잘하신 겁니다.”

집사가 거들듯 말하며 에셀라의 기를 살리려 애썼다. 그래도 시무룩한 기색이 가시질 않자 재차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제이드 도련님께서 하실 일까지 에셀라 아가씨께서 도맡아 하시느라 힘드셨을 겁니다.”

하지만…….

콘라드는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에셀라를 다독였다.


“처음 해 보는 일이니까 괜찮아. 고생했어. 이건 내가 처리할 테니 지금처럼 공부 열심히 하고.”

다정한 목소리에야 에셀라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제야 콘라드는 콧잔등을 지그시 눌렀다.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왔다. 헤페르티와의 협약이 점점 다가오는 지금, 외무대신 보좌관인 그의 일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그 와중에 집안일까지 살펴야 하다니.

잠시 휴식을 하러 온 저택에서 새로운 일을 맡은 셈이 되었다. 콘라드는 나지막한 숨을 뱉으며 장부를 확인했다.

분기별 어음 결제 장부 말고도 예산 세목에 대한 검토와 마델레이네 영지의 현황까지.

제이드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던 콘라드는 이내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제3기사단의 부단장인 마델레이네 경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대련에 매진한다는 소문이 궁 내에 파다했다.

며칠 전 희게 질린 얼굴로 찾아온 일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콘라드는 구태여 제이드를 불러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해서라도 고민이 해결된다면 그걸로 되는 일이었다.

콘라드가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번 최종 결재를 한 기록을 찾았다. 얼룩덜룩 기록된 눈앞의 장부와 달리 최종 결재를 마친 앞부분 장부는 한눈에 봐도 명확했다.

이렇게 확연히 눈에 들어오도록 정리가 되어 있는 장부에 사인만 하면 좋을 텐데.

식재료가 들어오는 상단이며 에셀라의 부티크, 여러 상단들과의 거래를 보던 콘라드가 얼음처럼 굳은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언제부터 집안 장부를 신경 쓰지 않았던 걸까.

공작인 아버지는 나랏일만으로도 다망했다. 그러던 차에 소공작인 콘라드가 집안의 일을 맡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당연한 수순이 바뀌게 된 것은.


“저, 저도 이제는 장부 잘 볼 수 있어요. 오라버니!”

 
5년 전. 그러니까 제가 스무 살, 갓 보좌관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 올리비아는.


“……열다섯.”

잇새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맞다, 열다섯. 처음에는 엉망이던 올리비아의 장부는 점점 나아졌다.

한 달에 한 번 최종 확인을 하던 게 분기별로 최종 검토만 하면 될 정도로.

콘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런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고작 사람 하나가 잠시 나간 거다. 황제는 여전히 올리비아와 에셀라를 간 보고 있으니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올리비아를 태자의 옆자리로 다시 밀어 넣으실 거다.

그때쯤이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올 거다.

그러니 되었다.

뭐가 되었다는 건지도 모르면서 콘라드는 애써 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못 본 척 넘기기로 했다.

봄이 끝나 갈 무렵인데도 화병에 꽂혀 있는 늘 똑같은 꽃들을.

어쩐지 조금씩 제 취향을 벗어나는 식사를.

겨울처럼 우중충한 저택의 분위기를.

복도 너머에서 늘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진 것도.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콘라드는 이를 악물고 장부의 숫자를 노려보았다.

눈에 익은 우아한 글씨체를 외면하며 콘라드가 새로운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어딘가 헛헛하게 비어 가는 마음 또한 외면하면서 말이다.

* * *

마차의 창문 너머로 올리비아의 눈에 어딘가 낯익은 길이 보였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과 소담한 키의 꽃들. 올리비아는 스쳐 지나간 길을 보다가 아, 작게 소리쳤다.

폐광산으로 갈 때 보았던 길이었다. 그때 어쩐지 떠나오는 길이 아쉬워 마차 창문으로 계속 뒤돌아봤었는데.

한 번 기억이 나기 시작하니 그때 보았던 나무들과 꽃들, 그리고 외진 길을 따라 들어가 보았던 폐광산이 눈앞에 그린 것처럼 선명해졌다.

올리비아는 창문 옆에 바짝 앉았지만 이미 폐광산으로 가는 길은 지나간 지 오래였다. 올리비아의 눈에 미련이 뚝뚝 맺혔다.

저기로 가면 제 소유의 광산을 에드윈에게 보여 줄 수 있는데. 올리비아는 잠시 갈등했다.

폐광산을 활용할 방법을 찾고서 말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할까.

올리비아가 제 짐 꾸러미 속 폐광산 문서를 떠올리던 찰나였다.


“올리비아. 어디 불편해요?”

걱정 어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에드윈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손부터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어제 침구가 생각보다 딱딱하던데. 혹시 배기거나 그러면 바로 이야기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에드윈이 당부하듯 말했다. 지금껏 대공령으로 가는 길목마다 그랬듯 말이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대공령으로 가는 길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소풍 같은 점심에는 따뜻한 수프와 샐러드, 신선한 과일 등 새로운 음식이 갖추어졌고 밤마다 묵었던 마을의 호텔도 좋았다.

숙소에 대해 안절부절못하는 건 에드윈과 하워드 인터필드 경이었다.

둘이 보기에 저는 아직도 공작저의 좋은 침구에서만 잠을 잔 것 같은 귀한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짚으로 만든 침대에서 잤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황녀의 명에 따라 다른 지역을 다니며 여러 숙소를 경험해 봤는데 말이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를 정말 귀한 아가씨처럼 대해 주는 그 태도가 낯간지러우면서도 좋았다. 자신의 과거를 그들에게 말한다 한들 호들갑을 떨며 저를 위해 주는 태도가 변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 것이 된 이 행복을 쭉 누리고 싶었다.

.
.
.



“아무래도 불편한 게 틀림없어요.”

에드윈이 단정 짓듯 말했을 때, 올리비아는 아까처럼 손을 내저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손끝을 서로 매만졌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지만, 대공령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는 것을 누를 수는 없었다.


“……아니면. 긴장되는 건가?”

어쩐지 에드윈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불쑥 샘솟는 심술에 입술을 비죽 내밀려던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지금 에드윈은 어쩐지 더 반짝거리게 웃고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활력의 원인을 찾고자 유심히 그를 들여다보던 올리비아는 설마 하며 말했다.


“설마. 에드윈도 지금 긴장하고 있어요?”

“그럼요. 오랜만에 돌아가는 거니까.”

쉽게 나온 에드윈의 대답에 올리비아는 아차, 하며 제 무신경함을 탓했다.

전쟁만 전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 또한 긴 시간 동안 비칸데르령을 떠나 있었을 거라는 것은 생각 못 했을까.

올리비아는 새삼스레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에드윈은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묘한 동질감과 동시에 저만 적응할 생각을 하느라 에드윈을 살펴 주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졌다.

올리비아는 마음을 내려놓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에드윈은 정복 위로 로브를 둘렀다. 고급 수예점의 솜씨는 분명히 아닌, 저 엉성하고 화려한 무늬의 로브는.

에드윈을 처음 봤을 때 입고 있었던 로브였다.


“특별한 로브예요?”

“안 입으면 잔소리를 획득하니, 특별하긴 특별하죠?”

잔소리라니. 소벨도 없는 이곳에서 누가 에드윈에게 잔소리를 할까 싶어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웅장하고 견고하던 성벽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성벽 바깥에 걸린 화려한 꽃목걸이들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복귀하는 대공을 맞이하는 비칸데르령의 활기찬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철문이 열리고, 마차가 비칸데르령에 진입했다.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는 동시에 우렁한 함성이 마차를 향해 쏟아졌다.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마차 바깥을 바라보았다. 성문부터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행렬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다.

이런 환영의 행렬은 처음이었다. 얼떨떨하던 올리비아는 이내 에드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영웅이 승전식도 못한 마당이다. 제 영지에서 이 정도의 행렬이야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빨리 바깥으로 손 흔들어 줘요.”

올리비아는 샐리를 떠올리며 에드윈한테 말했다.

전쟁 영웅을 보고 싶다던 샐리만큼이나 저기 서 있는 사람들도 에드윈을 보고 싶어 한 게 틀림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차 말고 말을 타라고 할 걸 그랬다.

진하게 몰려오는 아쉬움에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재촉할 때였다.


“전하의 맹세를 받으신 아가씨! 비칸데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깥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에드윈이 짓궂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해요. 바깥으로 손 안 흔들고.”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고 되묻기도 전에 펑- 소리와 함께 맑은 하늘 위로 폭죽이 터졌다. 예쁘게 반짝이는 폭죽이 수놓는 글씨는.

- 예비 대공비 전하를 환영합니다.

폭죽으로 저렇게 글씨를 만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올리비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글씨를 바라보았다. 에드윈이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여튼. 베서니 솜씨는 여전하네.”

“……에드윈을 위한 행렬 아니에요?”

“딱 봐도 올리비아를 위한 행렬인데?”

“아무리 봐도 승전식인 거 같은데.”

“이미 비칸데르의 사람들은 열 번도 넘게 승전식을 했어요. 그러니 빨리 손 흔들어요.”

 

 
이런 환대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사이,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창문을 열고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치 따라 하라는 듯한 몸짓에 올리비아가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와- 환호성이 한층 높아졌다.

긴장으로 가득 찼던 비칸데르와의 시작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차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