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3. 비칸데르령과 한 뼘 더 길어진 기대 (43/151)


#043. 비칸데르령과 한 뼘 더 길어진 기대
2022.07.27.



16589275195465.jpg

“배 안 고파요? 난 배 너무 고픈데.”

 
비칸데르 대공령으로 떠나는 마차 안에서 에드윈이 배가 고프다고 했을 때, 올리비아는 식사 메뉴로 당연하게 빵을 떠올렸다.

햄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면 좋을 텐데. 대공저에서 주방장 마사가 만들어 주던 샌드위치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생각을 접었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식사를 한다면 잼 바른 빵이 가장 편하다는 걸 올리비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녀의 명에 따라 여러 지역을 전전할 때마다 얻은 경험 때문에 말이다.

.
.
.

그래서 올리비아는 지금 이 상황이 낯설었다.

드넓은 평야의 한적한 길에 마차가 서 있고, 기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펼치고 앉은 채 예쁜 바구니에 든 샌드위치를 꺼내 드는 이 상황이.

16589275195465.jpg

“올리비아. 어떤 게 좋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를 만난 것처럼 에드윈은 네 개의 샌드위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16589275195465.jpg

“녹인 치즈에 햄도 좋고, 치킨 스테이크에 루꼴라와 그린 올리브를 넣은 것도 좋고, 토마토와 절인 송아지도 좋고. 아, 연어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별로 안 당기네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듯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투과된 햇빛이 에드윈의 얼굴 위로 반짝거렸다.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바람과 언뜻 스치는 풀 냄새, 엉거주춤하게 자리 위에 앉은 제 자세까지.

이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와닿았다.

올리비아는 생경한 느낌을 삼키며 에드윈한테 물었다.

16589275195482.jpg

“……이렇게 가도 괜찮은가요?”

16589275195465.jpg

“뭐가요?”

16589275195482.jpg

“바쁘잖아요. 비칸데르령까지 삼 일이 걸리는데, 이건 꼭.”

올리비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새파란 하늘과 눈이 아릴 정도로 광활한 푸른 평야, 적당히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기사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까지.

16589275195482.jpg

“……꼭 소풍 같잖아요.”

 

16589275195499.jpg

“공녀. 소풍이라고 착각한 건 아니겠죠? 일을 하러 가면 빠르게 끝내고 돌아와야지. 왜 천천히 유람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죠?”

 
문득 황녀의 명에 따라 처음 타지로 다녀왔을 때가 떠올랐다.

가던 길에 샐리가 챙겨 준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던 이야기를 두고 황녀는 크게 힐난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이건 소풍이 아닌데. 목적지인 비칸데르령으로 빨리 가야 하는데.

16589275195465.jpg

“소풍 같은 게 아니라 소풍이죠.”

순간 올리비아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명쾌하게 올리비아의 말을 정정한 에드윈은 기민하게 올리비아를 살폈다.

드레스 자락에 파묻힌 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흰 손등은 손톱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뒤 에드윈은 근사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16589275195465.jpg

“바쁠 게 뭐 있어요. 어차피 삼 일이 걸리든 며칠이 걸리든 목적지는 똑같은데.”

나른한 에드윈의 목소리는 올리비아 안에 깊숙이 자리했던 황녀의 말을 순식간에 깨부쉈다.

바쁠 건 없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까.

이 짧은 말은 커다란 파동처럼 올리비아를 쿵 때렸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었다.

소풍이라니.

말간 얼굴 위로 다채로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기쁨과 설렘, 약간의 걱정이 사라진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하게 돌아온 얼굴과 달리 귀 끝은 조금씩 붉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드윈이 장난스레 말했다.

16589275195465.jpg

“마사가 샌드위치는 최대한 빨리 먹으라고 했는데. 지금 모든 기사들이 다 올리비아만 보고 있는 거 알아요?”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약간 가시고 현실을 자각했다. 에드윈 말대로 샌드위치를 들고 있는 기사들은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손에서 아무 샌드위치나 집어 들었다.

16589275195482.jpg

“에드윈, 왜 안 먹었어요.”

16589275195465.jpg

“올리비아가 그렇게 재밌는 표정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먼저 먹어요. 천천히 먹어요.”

짓궂게 천천히 먹으라는 말을 하면서도 에드윈은 올리비아가 든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겨 주었다. 녹은 치즈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코끝으로 훅 끼쳤다.

순식간에 식욕이 당겼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는 맛이었다. 햄과 치즈를 잔뜩 넣은, 마사표 샌드위치가 맛있다는 걸 원래 잘 알고 있었는데도.

16589275195482.jpg

“맛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공저에서 먹는 샌드위치와 똑같을 텐데도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16589275195465.jpg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올리비아. 소풍을 와서 먹는 샌드위치가 남다르긴 하죠?”

16589275195482.jpg

“네. 다르네요. 정말.”

16589275195465.jpg

“한 번 더 할까요. 소풍?”

능청스레 권유한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반응을 살폈다. 바로 대답할 줄 알았는데 올리비아는 입술을 움찔거리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16589275195482.jpg

“……두 번도 되나요?”

진지한 목소리에 에드윈이 폭소를 터트렸다.

쾌활하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16589275200543.jpg

 

* * *


16589275200548.jpg

“그런데 웬 소풍입니까? 조금만 더 가면 마을도 있는데. 아가씨께서는 제대로 된 식당이 더 편하시지 않으십니까?”

그 많던 샌드위치가 동이 날 무렵, 견습 기사 중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워드는 대답 대신 힐끗 제 주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아래, 옅은 베이지색 넓은 자리를 깔고 앉은 대공 전하와 아가씨의 모습은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 두 분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자연스레 아가씨의 앞에 주스며 과일을 놓아두는 대공 전하의 모습 위로 의원 브랜든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16589275200548.jpg

“가시는 길에 최대한 마차를 천천히 운행하십시오. 아시겠지만 아가씨께서는 워낙 잘 참으시는 타입이라 속이 안 좋아도 말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16589275195465.jpg

“또 주의할 점은?”

16589275200548.jpg

“햇빛을 많이 쐬시면 좋습니다. 워낙 정적인 분이라 햇빛을 쐬는 일이 거의 없으시더라고요. 이건 처방드리기도 뭐해서.”

 
열심히 새겨듣던 대공 전하가 붉은 입술에 근사한 웃음을 베어 물던 것도 떠올랐다.


16589275195465.jpg

“다행이야. 그건 이미 준비를 해 두어서.”

 
마사한테 수백 개의 샌드위치를 싸라고 할 때부터 에드윈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하워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16589275200548.jpg

“……뭐. 날이 좋으니까.”

견습 기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 * *

우거진 녹음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 햇살을 받으면 짙은 초록색 나뭇잎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느다란 가지들이 흔들리는 게 퍽 재미있었다.

살랑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목덜미가 간질거렸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머리를 정리하지 않았다.

모든 게 좋았다. 멀리서 들리는 기사들의 목소리도, 바람에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풀을 보는 것도, 그 사이를 투과하는 눈부신 햇빛도.

16589275195465.jpg

“춥진 않아요? 늦봄이라도 바람 부는데.”

그리고 제게 담요를 건네주는 에드윈도.

웃음을 머금은 붉은 눈을 마주하면서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지금이. 이 여유가.

올리비아는 딱 지금이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16589275195482.jpg

“부탁이 있어요. 에드윈.”

에드윈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올리비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16589275195482.jpg

“비칸데르령으로 가면 그곳의 사람들이 저를 반겨 주는지, 반겨 주지 않는지 제가 확인할 수 있게 기다려 줄래요?”

 

.
.
.


16589275200548.jpg

“……비칸데르의 모두는 정성을 다해 아가씨를 보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대공저를 떠나오기 전이었다. 올리비아의 질문에 대한 소벨의 대답은 현명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나직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16589275195482.jpg

“나는 충성을 물어본 거예요. 정성스러운 보필이 아니라.”

 
늘 무덤덤하면서도 능청맞게 대답하던 소벨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공저에 오고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이곳의 모두에게서 황제와 황가에 대한 적의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저와 말할 때야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은연중에 황제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썼다.

에드윈만 해도 그랬으니까. 황제한테 ‘폐하’를 붙이지 않는 귀족은 처음 보았다.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는 내색하지 않고 제가 갖고 있던 비칸데르 대공가의 정보를 떠올렸다.

제국에 퍼져 있는 이야기는 ‘황제와 선대 대공 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으나 선대 대공이 졌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전쟁에 나갔던 선대 대공이 사망한 후 현재 대공인 에드윈이 황제의 수족처럼 전쟁터를 돌더니 세력을 찾았다는 것’까지였다.

그런 면에서 대공가가 황제에게 보이는 적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비칸데르령의 모두를 바라볼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고 입을 떼지 못하는 소벨을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그 대답을 찾았다.

그래서 더욱 에드윈한테 꼭 말하고 싶었다.

저를 지켜봐 달라고.

.
.
.


16589275195482.jpg

“비칸데르령으로 가면 그곳의 사람들이 저를 반겨 주는지, 반겨 주지 않는지 제가 확인할 수 있게 기다려 줄래요?”

말을 하고 나서도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기색을 살폈다.

이상하게 목이 마른 기분이었다.

혹시나 제 말이 비칸데르령 사람들을 괜히 편견 어린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걱정도 되던 찰나였다.

16589275195465.jpg

“그럴게요.”

에드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생각도 못 했다. 너무 쉽게 제 말에 동조하는 에드윈의 모습에 오히려 올리비아가 당황했다.

그 모습에 에드윈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짓궂은 기색이 서렸다.

16589275195465.jpg

“왜요. 바라던 바가 아니에요?”

16589275195482.jpg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쉽게 동의해 줄 줄 몰랐거든요.”

16589275195465.jpg

“나야 올리비아 말을 잘 들으니까. 그리고 이미 올리비아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윈스터를 올리비아 편으로 만들었잖아요.”

16589275195482.jpg

“네?”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윈스터야 늘 웃고 있는 사람인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6589275195465.jpg

“윈스터가 잘 웃어도 생각보다 사람을 잘 파악해요. 그렇게 사람을 가리는 놈이 올리비아 편에 섰다는 건, 올리비아가 가진 힘이죠. 사람 마음을 잘 열게 하는 힘.”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드레스 아래 발들이 서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맞부딪혔다. 손가락이 자꾸만 서로 꼬아졌다.

뱃속 아래부터 간질거리는 이 느낌은 도무지 적응 안 될 것처럼 어색하고,

또 좋아서.

16589275195465.jpg

“비칸데르령에서도 아가씨가 잘할 텐데. 내가 뭘 걱정해요. 나야 아가씨가 안 놀아 주면 어쩌나, 내 걱정이나 해야지.”

엄살을 부리는 에드윈의 눈 위로 올리비아를 향한 신뢰가 가득해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기분이 너무 달았다. 그새 올리비아의 기대가 한 뼘 더 자라났다.

* * *


16589275200548.jpg

“말도 안 돼요! 전하께서 선택하신 아가씨가 마델레이네 공녀라니!”

비칸데르령 대공저의 응접실,

쾅- 거칠게 식탁을 내려치는 소리에 베서니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 눈을 깨달은 붉은 머리의 기사는 갈색 눈을 움찔하며 바로 제 태도를 반성했다.

16589275200548.jpg

“죄송합니다. 베서니,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황제파의 공녀랑! 심지어 태자의 약혼녀였다면서요!”

16589275200548.jpg

“그게 뭐. 전하께서 맹세를 마치신 아가씨야. 네가 왜 난리야. 심지어 눈도 초록색이시라는데.”

베서니가 별거 아니라는 듯 주름진 눈매를 가느다랗게 접었다. 예상대로 ‘초록색 눈’이라는 말에 붉은 머리 기사, 디안 스젤린은 움찔했다. 그 모습을 숨기려는 듯 디안이 더 과장되게 말했다.

16589275200548.jpg

“……그래도요! 황제파 마델레이네가의 공녀잖아요! 무슨 꿍꿍이를 가진 줄 알고. 소문을 몰고 다니는 것도 싫어요. 전하께는 완벽한 아가씨가 어울리신단 말, 아.”

불같이 화를 내던 디안이 별안간 눈을 감싸 안았다. 왼쪽 눈이 아픈 듯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베서니는 서늘하던 태도도 버린 채 쯔쯔, 혀를 찼다.

16589275200548.jpg

“그러기에 렌즈를 빼라니까. 비칸데르령에서 렌즈는 별로 필요도 없다고 그렇게 말해도. 차라리 마법을 걸어 줄게.”

16589275200548.jpg

“감사합니다만 이게 편해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저 방으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디안의 말에 베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깍듯이 고개를 숙인 디안이 응접실을 나섰을 때, 베서니가 혀를 끌끌 찼다.

16589275200548.jpg

“애는 착한데.”

마치 경계심 많은 작은 강아지를 보듯 디안을 바라본 베서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휘장을 드리운 초상화를 바라보는 베서니의 눈이 촉촉해졌다.

.
.
.

화장실 앞.

디안은 세면대에 손을 얹은 채 심호흡을 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16589275200548.jpg

“돌아갔네.”

씁쓸하다는 듯 내뱉은 디안의 목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 디안은 어딘가 상처받은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갈색으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렌즈, 그 아래로 연두색 눈동자가 보였다.

16589275200543.jpg

1658927521912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