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2. 모른 척했었던 이야기 (42/151)


#042. 모른 척했었던 이야기
2022.07.24.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공허하게 퍼지는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제이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심장을 때리듯 쿵, 하고 파동을 일으키는 말이 생각날 때마다 제이드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 왔다.

왜.

왜 올리비아는 돌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생각의 끝에 제이드가 화살을 겨눈 건 황후였다.


“언니가 황후 때문에 힘들어한 거 아니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제이드는 그렇게 짐작했었다.

뼛속까지 귀족파인 황후가 황제파에서 온, 그것도 사생아 딱지를 붙인 올리비아를 가만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올리비아의 힘듦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스스로의 화를 누르기도 힘들었으니까.

늘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제 주변을 맴도는 올리비아가 미웠다. 제게서 엄마를 빼앗아 간 주제에 마치 아무것도 모르던 때처럼 저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올리비아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늘 올리비아를 괴롭혔다.

제발 좀 제게서 떨어졌으면 했는데.

침대 아래에 죽은 쥐를 놓아도, 비 오는 날 집 바깥으로 쫓아내도, 심지어 아끼는 책을 찢어 버려도.


“오라버니!”

 
올리비아는 늘 한결같았다. 그 멍청한 애는 늘 웃으면서 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올리비아가 태자의 약혼녀가 되었을 때, 제이드는 한편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그 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 애는 마델레이네 공녀였으니까.


“내 동생들 눈에는 보석이 박혀 있어요. 에셀라한테는 보라색 자수정이, 올리비아한테는 초록색 에메랄드가.”

 
……한때는. 제 동생이었으니까.

자랑스레 말하던 어린 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릴 때마다 제이드는 눈을 감았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 *



“……지금, 뭐라고…….”

그래서 황녀 궁의 응접실에 있는 지금 이 순간 제이드는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너른 벨벳 소파에 앉아 있는 황녀가 고혹적으로 눈웃음을 그렸다.


“경도 그 반쪽짜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걸 내가 잘 알고 있다고요?”

순간 제이드의 숨이 턱 막혔다. 황녀의 말이 사정없이 제이드를 후려쳤다.


“내가 황녀 된 도리로 이제까지 그 천것을 보듬어 주었건만. 그것이 괘씸하게도 나와 결혼이 예정되었던 비칸데르 대공을 유혹했지 뭡니까.”

“…….”

“사람이 난 데를 닮는다 하더니. 천한 무희한테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 어디 안 가고 배기겠습니까.”

안타까운 듯 고아하게 말하는 목소리와 달리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웠다.

천것, 사생아, 반쪽짜리.

저 독한 말들이 지칭하는 게 다름 아닌 올리비아여서. 제이드는 멍하니 황녀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우아한 자태로 황녀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사람을 어떻게 그런 단어로 지칭할 수 있냐고.

묻고 싶은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제이드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새 황녀가 짜랑하게 웃었다.


“경. 설마 경이 그 반쪽짜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건 아니겠죠? 보란 듯 먼저 홀대를 한 건 마델레이네 경이지 않습니까.”

낭랑하게 떨어지는 말이 제이드를 절벽 끝으로 밀었다.

보란 듯 홀대를 했다니.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제이드가 돌연 입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서 쇠 비린내가 올라왔지만 제이드는 힘을 뺄 수 없었다.

홀대했다. 그리고 부정했다.

그 험난한 사교계에서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을 거란 걸 알면서. 올리비아가 수치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길 바랐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올리비아의 데뷔탕트가 떠올랐다. 태자가 다른 영애와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저를 돌아보던 그 얼굴.

무심코 넘겼던 그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초록색 눈에 어린 절박함과 기대가 점점 옅어지고, 희미하던 체념이 짙어지던 것도 떠올랐다.

그리고 결국.


“……저는 끈질기고 독하게 버틴 게 아니에요.”


“언젠가는,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겠지.”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올리비아가 더 이상 마델레이네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기억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제이드를 찔렀다. 그 텅 빈 목소리들이 제이드의 머리를 가득 채웠을 때.

제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우아하게 웃고 있던 황녀가 의아하게 제이드를 바라보았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떠난 게 제 탓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래야 돌아오라고 할 수 있는데.


“……마델레이네 경?”

황녀가 제이드를 불렀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응접실 바깥을 향해 걸었다. 늘 늠름하게 걷던 제이드의 걸음이 아주 조금씩 비틀거렸다.

이 같잖은 죄책감을 덜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
.
.

황녀의 부름에도 제이드 마델레이네는 응접실을 나섰다. 황녀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시녀들조차 황망한 얼굴로 열린 응접실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하.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황녀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뒤늦게 몰려오는 모욕감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반쪽짜리한테서 폐광산을 다시 빼앗을 방도가 있나 슬쩍 물으려고 불렀더니. 저를 이렇게 혼자 두고 허락도 없이 응접실을 나서?

황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순식간에 응접실의 공기가 매섭게 변했다. 시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황궁의 꽃. 누구보다 아름답고 고아한 황녀 레이나 프란츠가 얼마나 대단한 성미를 지녔는지는 이 응접실에 있는 시녀들이 가장 잘 알았다.

곱게 칠한 입술 새로 시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였다.


“감히 황녀 전하께 저런 무엄한 짓을 하다니!”

황녀의 뒤에서 호통을 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하스 남작 부인이었다. 황녀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보필한 남작 부인의 말에 황녀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그 모습을 기민하게 바라본 남작 부인은 과장되게 화를 내었다.


“전하. 마델레이네 경은 신경도 쓰지 마시옵소서.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릴 가치조차 없는 자입니다.”

곁에 앉아 부드러운 빗으로 머리를 빗어 주는 남작 부인의 행동에 황녀의 날카로운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맞아. 제가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남자다. 제이드 마델레이네 말고도 얼마든지 폐광산을 다시 찾아올 수는 있을 거다.

황녀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뒤에 있던 시녀들도 다가와 종알거렸다.


“맞습니다, 전하. 저렇게 무례한 자였다니.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이 아깝네요.”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을 지닌 자들은 다들 무도한 모양이야.”

느릿한 황녀의 말에 시녀들은 조금 안도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날 선 태도는 많이 사라진 터였다.

기세를 몰듯 루하스 남작 부인은 구슬리듯 달콤하게 말했다.


“황녀 전하. 다른 생각을 지우세요. 제가 빨리 유블러 백작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동안 극단의 묘기를 보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극단?”

“예. 여름 궁전에서 즐거이 보시던 극단이 황녀 전하를 위해 대기 중입니다.”

극단이라. 황녀는 문득 유쾌해졌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괴롭히던 폐광산과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무례한 태도는 씻은 듯 날아갔다.

이렇게 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유모 루하스 남작 부인과 시녀들이 있는데. 고작 올리비아 그 반쪽짜리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 폐광산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소유라 해도.

황녀가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 바깥에 있던 극단이 빠르게 들어왔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
.
.

극단의 화려한 묘기가 한창이었다. 황녀의 응접실 한편에서 시녀 중 한 명이 문득 의아하다는 얼굴로 배우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멀찍이 떨어진 단장을 향해 걸어갔다.


“단장,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십시오. 시녀님.”

“배우들 중에 갈색 머리 남자 배우도 있지 않았나? 평범한 듯해도 언뜻 보면 제법 외양이 괜찮던 배우였는데.”

시녀는 덤덤하게 말하며 단장을 향해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귀족 영애인 시녀들이 가끔 극단 배우들을 애인 삼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곰곰이 생각하던 단장이 아! 하며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아, 그자는 정식 배우는 아니고 잠깐 연습을 봐 주던 떠돌이 배우입니다. 여름 궁전에서 잠시 주연 배우가 배탈이 나서 스페어로 출연했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지는 않았고?”

“예. 저희는 감히 지엄한 궁에 그런 뜨내기를 함께 들일 정도로 모자란 극단은 아닙니다.”

은근한 말을 눈치채지 못한 단장이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시녀는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섰다.

단장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쉬운 얼굴로 공연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딱 떨어진 것처럼 가장 필요한 때에 나타났던 뜨내기 배우.


“섭섭해도 어쩔 수 없어. 함께 궁으로 가면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저야, 뭐.”

 
마지막 송별 파티 때 보았던 아쉬운 듯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의 추억에 잠긴 단장의 머릿속에는 황녀가 술에 취해 얼마나 자주 극단을 불렀는지에 대해 말해 준 기억은 씻은 듯 사라졌다.

황녀가 요양을 빙자한 유람 때마다 얼마나 많은 극단이 황녀를 따라다녔는지, 한 번 발탁된 극단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말해 줬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 * *

콘라드는 제 집무실로 들어오는 제이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이드, 너 지금 근무 시간 아니야?”

“……형.”

하지만 제이드가 나지막하게 저를 불렀을 때, 콘라드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햇빛에 그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콘라드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보좌관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콘라드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너 안색이 왜 그래.”

며칠째 공작저에도 들어오지 않던 동생이었다. 안 그래도 저택의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운 지금, 갑작스러운 동생의 이상 반응에 마음이 쓰이던 찰나였다.


“형, 형도 몰랐지.”

“뭘.”

“올리비아. 그 애가 그런, 취급을.”

띄엄띄엄 말하던 제이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올리비아. 요즘 공작저를 날 서게 만드는 이름에 콘라드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기에 그래. 그 애가 뭘 했기에.”

오늘 비칸데르령으로 떠났다고 했는데. 혹시 무언가를 더 터트리고 간 걸까. 하지만 제이드는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녀가, 그 애를 보고 반쪽짜리라고 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형! 황후뿐 아니라 황녀도 그랬다고. 그렇다면 모두가 그랬을 거 아냐! 올리비아를 두고 반쪽짜리라고.”

“그래서, 뭐.”

감정을 토하듯 소리치는 제이드의 목소리 위로 차가운 일갈이 떨어졌다.

콘라드 마델레이네는, 그러니까 제 형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차가우면서도 강직하고, 따뜻한 사람.


“나는, 그러길 바라고 그 애를 혼자 둔 거야.”

그래서 더 믿을 수 없었다. 콘라드가 정말로 모든 걸 알고도 올리비아를 혼자 두었다는 말은,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칼날 같은 사교계에서, 황후와 황녀 앞에서. 올리비아가 그 숱한 모욕을 듣게 만든 장본인이 제 형이라는 게.

콘라드가 느릿하게 웃었다.


“너는 정말 몰랐니?”

그리고 저라는 게.

너무 명확해서.

제이드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모른 척했던 게 이렇게 아프게 돌아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제이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자수정 빛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르는 건 막지 못했다.

그 눈을 보지 못한 콘라드가 피식 입매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올리비아 그 애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워. 너도 그만했으면 이제 다시 집으로 들어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 * *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오랜만에 공작저로 들어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공작저를 휘감았다.

하지만 저녁 식사에조차 나오지 않는 작태에 제이드를 찾아갔던 에셀라는 직감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정복으로 갈아입는 제이드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꼭 언니한테 용서를 빌러 가기 전 휘청이던 저처럼.


“어디 가?”

“……올리비아한테.”

하. 에셀라는 한숨을 삼켰다. 그토록 바랐던 일이 너무 늦게 펼쳐졌다. 에셀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언니는 떠났어.”

“뭐?”

정말 몰랐다는 듯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검게 물든 눈 밑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로. 비칸데르령으로?”

그곳밖에 없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에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알려 줄 거야.”

“에셀라!”

커다랗게 제 이름을 부르는 기백에도 에셀라는 담담하게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어.”

허를 찔린 것처럼 제이드의 눈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니 에셀라는 더 마음이 아릿해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빨랐으면.

아니, 제가 갈 때라도 제이드가 함께 갔더라면.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은 잔상처럼 손에 닿지 않은 채 사라졌다. 에셀라는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언니는 너무 착해서. 그렇게 늦게 찾아간 나도 용서해 줬어.”

“…….”

“그래서. 나는 오라버니한테 못 알려 줘.”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끝낸 뒤, 에셀라는 미련 없이 제이드를 등졌다. 그리고 제이드의 방을 나섰을 때에서야 아픈 속을 달래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드 오라버니에게는 하루만 더 있다가 보여 주자.

에셀라는 올리비아에게서 온 편지를 떠올렸다.


“아가씨. ……편지가 왔습니다.”

 
한낮에 비칸데르 대공저에서 왔다는 편지에 샐리가 가장 먼저 제게 왔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눈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언니가 샐리에게 보낸 편지에는 언니의 애정이 가득했다고 했다.

제게 온 편지도 비슷했다.

비칸데르령으로 가게 되었다고, 편지를 하려거든 먼저 대공저로 보내면 된다는 다정한 말들이 유려한 필체로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샐리의 편지와 다른 건 단 하나였다. 장부를 쓰는 법과 예산 세목, 은행장과의 만남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힌 편지가 한 장 더 있었다는 것.

그 편지 위에는 ‘제이드 마델레이네’에게 전해 달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오라버니가 아닌, 제이드 마델레이네.

그 문장을 본 에셀라는 언니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했다.

고개를 돌리던 에셀라의 시야에 1층 홀에 걸려 있던 가족 초상화가 사라진 자리가 시리게 밟혔다.

무언가 붙였다 떨어진 것처럼 딱 그 자리만 벽 색깔이 유난히 진했다. 딱 그 자리만큼 에셀라의 마음 한편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해졌다.

초상화를 버리라고 명한 아버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 초상화가 에셀라의 방으로 갔다는 것을.

에셀라는 아픈 눈으로 저택을 둘러보았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커튼과 아름다운 꽃 장식, 언제나 말끔하던 창문과 복도.

모두의 탄성을 받던 마델레이네 공작저.

저택의 모든 곳곳에 언니의 손길이 닿던 모습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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