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비칸데르령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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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비칸데르령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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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비칸데르령으로 향하는 길
2022.07.20.
올리비아와 에드윈이 탄 마차를 시작으로 긴 행렬이 비칸데르 대공저 대문을 나섰다.
대공저 앞에서 손을 흔들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올리비아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연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높고 견고한 담벼락을 지나고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에서야 올리비아는 먹먹한 한숨을 내뱉었다.
고작 몇 주 안 되는 새에 이 대공저에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있다가 떠나자고 할걸.
때늦은 미련에 올리비아의 어깨가 축 떨어졌다.
수요일. 늘 기다리던 기억 위로 새로운 시작을 그리기 위해 비칸데르령으로 떠나는 날을 오늘로 잡은 건 올리비아 저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눈가가 붉어요, 올리비아. 그렇게 슬퍼요?”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에드윈이 다정하게 말했다. 상냥한 목소리 속에 숨겨진 장난기에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울어요. 누가 들으면 제가 되게 울보인 줄 알겠어요.”
“울보까지는 아니어도 잘 울긴 하죠. 요즘은 아닌가?”
“그럼요. 사실 원래 제가 잘 우는 타입은 아니에요. 에드윈은 정말 아주 아주 귀한 걸 본 거라고요.”
“그거참 다행이네요.”
에드윈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레 웃었다. 느슨하게 휘어진 입꼬리가 어딘지 심술궂다고 생각될 때였다.
“그래서. 잘 울지는 않지만 정 많은 내 아가씨는 나 빼고 모두한테 카드를 남겼나 봐요?”
섭섭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칸데르령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겨우 식사만 같이할 정도로 바쁘던 에드윈이 제가 사용인들에게 카드를 남긴 건 언제 본 걸까.
올리비아는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야. 그동안 고마웠으니까요. 나중에 에드윈이 귀족 회의로 올라올 때 동행하면 계속 보기도 할 거고.”
“외부로 편지도 썼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해나가 아가씨의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걸 봤죠. 비칸데르령으로 떠난다고 준비하기도 벅찼을 텐데. 나 빼고 다 카드며 편지며 받은 모양이에요. 그렇죠?”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에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카드를 돌린 건 사실이지만, 편지는 에셀라 몫이었어요.”
“마델레이네 공녀한테요?”
“네. 뭐, 겸사겸사요. 제 하녀였던 샐리한테도 한번 연락을 하려고 했거든요.”
아. 에드윈의 붉은 눈에 이해가 떠올랐다. 지나가듯 마델레이네 공작가에 있는 하녀가 보고 싶다며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옅게 웃으며 샐리를 떠올렸다.
비칸데르령으로 가기 전에 한 번은 봤으면 했는데. 못 보고 가는 것은 아쉬웠지만 에셀라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친밀한 사이였던 것 같은데. 그 하녀를 비칸데르령으로 데려갈까요?”
“……진심이에요?”
“그럼요. 올리비아만 원한다면요.”
이미 공작가의 소속이라든지, 샐리의 의견이라든지. 현실적인 문제를 차치한 채 에드윈은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차 안에 퍼지는 고운 웃음소리에 에드윈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배가 당기도록 웃음을 터트린 올리비아가 겨우 웃음을 그치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샐리야 나중에 보면 되죠. 그리고.”
올리비아가 말끝을 끌었다.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는 듯 에드윈이 말간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정감을 주는 그 얼굴에 올리비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비칸데르령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에드윈만큼이나.
묵음으로 삼킨 뒷말을 알아들었는지 에드윈의 눈매가 느른하게 휘어졌다.
부끄러운 기분에 올리비아는 시선을 피하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마차는 사람 많은 저잣거리를 지나 제도의 경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럼요. 다들 올리비아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대공저의 모두는 오늘 아가씨께서 외출을 나가시는 순간부터 손꼽아 돌아오시길 바랐거든요. 물론 제가 제일 바랐답니다.”
태자비 궁에서조차 나와야 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졌던 때 들려오던 에드윈의 목소리도.
이미 한 번 들어 봤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기다린다는 말은 지독히도 듣기 좋았다.
나를 기다리는 곳.
올리비아는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다 느릿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서 다행이었다.
제 현실이 이토록 다정하고 포근하다니.
그러는 사이, 에드윈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비칸데르령의 첫인상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녹녹하게 젖어 들던 감상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첫인상이라. 올리비아에게 비칸데르령이 처음일 거라 단정하는 에드윈의 생각은 틀렸다.
과거 황녀의 명으로 폐광산을 조사하러 갈 때 한 번 방문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비밀이었다. 이제 그 폐광산의 주인이 되었어도, 황녀의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는 것을 에드윈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드윈의 말에 동조했다.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비록 식사 한 끼를 했던 곳이었지만 활기찬 분위기와 무심한 듯 다정하게 챙겨 주던 사람들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올리비아의 대답이 좋았는지 에드윈의 눈매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익숙해지면 같이 저잣거리에 나가요. 내가 즐겨 가는 음식점도 있는데. 물론 대공저의 주방장 솜씨도 대단하지만 가끔 음식점을 찾는 날도 있어야 하잖아요.”
에드윈의 목소리에서 들뜬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면서 에드윈이 묘사해 주는 것들을 떠올렸다.
니스 칠을 한 나무 문과 투박한 테이블 위의 체크 무늬 식탁보, 쾌활하게 주문을 받는 사장과 예쁜 식기에 담긴 후추 냄새 나는 수프.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는 에드윈과 제가 저잣거리에 나가는 모습으로 가득 찼다.
지난번처럼 보석상을 들르고, 서로한테 선물도 해 주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제가 그럴듯하게 꾸민 폐광산에도 함께 가고.
아차. 올리비아는 제 짐 꾸러미 가장 깊숙이에 있을 폐광산 문서를 떠올리고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개발을 해서 에드윈에게 선보이고 싶은데.
“비칸데르령으로 가면 바쁠까요?”
“아무래도 처음은 바쁘겠죠? 사용인들을 다 확인해야 하고 영지 시찰도 할 테고.”
공부해야 할 게 제법 많을 거라며 겁을 주는 말에 올리비아가 살포시 웃었다.
에드윈이 이야기해 주는 일들은 모두 올리비아한테 익숙한 것들이었다.
“다 좋아요. 또 있어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얼굴이 예뻐서.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윈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리고 혼인 준비도 해야겠고.”
“혼인 준비. 완벽하게 해야겠죠.”
올리비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간의 유예 기간 동안 혼인을 준비하겠다던 제 말에 책임지듯 성대한 혼인 준비를 해야 했다.
다른 건 비슷하게나마 해 본 적 있었지만 혼인 준비는 처음이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려나. 고민에 빠지려던 올리비아가 무심코 에드윈에게 질문을 하려고 할 때였다.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올리비아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말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윈의 몸이 느리게 제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느덧 붉은 입술 위로 짓궂은 웃음이 걸렸다.
“그래서, 손바닥 키스의 뜻은 찾아봤어요?”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뺨이 붉은 꽃물이 든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올리비아가 서둘러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그걸, 그걸 제가 왜 찾아봐요.”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찾아봤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부끄러울 텐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에드윈이 얄미웠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함이 몰려왔다.
찾아봤으면 안 부끄러울 거라고? 혹시 어떤 경건한 뜻이라도 가지고 있던 걸까?
입을 앙다문 올리비아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이 딱히 없었다.
해나는 제가 떠난다는 이야기에 우느라 바빴고, 소벨이라면 저를 바라보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알 만하다는 듯 웃기만 했을 테니까.
“……뭔데요?”
올리비아가 기어들어 가듯 말했을 때, 에드윈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뭘 거 같은데요?”
“정말 이러기예요?”
올리비아는 새침하게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에 담긴 옅은 원망에 에드윈의 웃음이 짙어질 때였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 다시 한번 해 볼까요?”
나직한 목소리가 어쩐지 가라앉아 있었다. 작은 동물의 본능처럼 올리비아는 모르는 척 창문을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잔뜩 짙어진 눈으로 너그러운 척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사이, 작고 동그란 귓불이며 흰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놓치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바깥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아는 얼굴도 같이 가서 다행이에요. 인터필드 경도 그렇고, 칼터 경…….”
무심코 윈스터의 이름을 말하던 올리비아가 어?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워드와 달리 윈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에 있나, 올리비아는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윈스터를 찾아요? 지금 앞에 나를 두고?”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겸연쩍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은 또다시 토라진 얼굴로 올리비아를 등졌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그게, 언제나 에드윈 옆에 있었는데 안 보여서.”
“일하러 갔어요.”
“무슨 일이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그러면 뭐가 중요하냐는 듯 올리비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 순진한 얼굴에 에드윈은 하, 탁한 숨을 토했다.
아무래도 갈 길이 멀었다.
비칸데르령으로 가는 길이 말이다.
* * *
같은 시각, 황제 궁의 응접실.
찻잔을 들던 황녀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황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지금 그 폐광산을 다시 조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면밀히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해라.”
황제는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황녀의 앞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얼핏 봐도 꼼꼼하게 작성된 그 보고서는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그 반쪽짜리 공녀가 작성한 것이었다.
“분명 그때 조사하러 갔을 때는 아무런 특이 사항이 없다고 했지.”
“예,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7번 갱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현상에 대해서 마법사들은 아무 말 않던?”
지엄한 황제의 질문에 황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7번 갱도? 그 폐광산에 갱도가 몇 개였더라. 아니, 그것보다 반짝이는 현상이 있었다고?
황녀의 머릿속이 이리저리 꼬였다. 대답이 늦어지자 황제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오늘 비칸데르 대공, 제 개는 마델레이네 공녀와 비칸데르령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여차하다 1년을 헛되이 보내기 전에 황녀가 가진 백수정 광산의 특이 사항을 확인해 두어야 했다. 그런데 매번 똑 부러지게 보고서까지 작성해 오던 황녀가 오늘따라 맹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면 입구에 있었던 백수정의 흔적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그게.”
머뭇거리던 황녀가 돌연 이마를 짚었다. 가냘픈 흰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러더니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갑자기 두통이 와서. 아시다시피 요양을 하러 간 차에 폐하께서 부르신다는 말에 급히 올라오다 보니 아직 몸이 덜 회복된 듯싶습니다.”
애써 씩씩한 척 웃는 황녀의 얼굴에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눌렀다. 요 며칠 요양을 갔던 황녀를 급하게 불러온 것은 사실이었다.
아프다더니. 그래서 이리 대답을 못 하는 것인가.
급한 사안이 잔뜩이었지만, 황제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 조금 더 쉬도록 하거라. 빠른 시일 내에 백수정 광산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것을 잊지 말고.”
“……예. 폐하.”
.
.
.
“전하. 유블러 백작이 백작 부인의 산욕열로 휴가를 내었다고 합니다.”
시녀의 보고에 황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복도를 오가는 구두 굽 소리가 정신없게 들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그 반쪽짜리 공녀한테 액운을 털어 내듯 폐광산을 넘기고 요양을 명목 삼아 실컷 즐기러 여름 궁전에 내려갔는데.
그 폐광산이 뭐라고 다시 조사하라니. 황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폐광산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려 하니 담당자인 유블러 백작까지 휴가라고 하질 않나. 좋지 않은 일이 겹겹이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황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선, 궁으로 가야 했다. 제 궁으로 가서 생각을 정리한다면.
황제의 응접실을 나와 황급히 궁으로 향하려던 황녀의 시야에 문득 제복을 입은 기사단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단의 가장 앞에 선 부단장이었다.
눈이 시리게 빛나는 은발과 훤칠한 키의 남자. 어딘가 모르게 성마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사.
제이드 마델레이네였다. 황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 반쪽짜리를 저만큼이나 미워한다는 제이드 마델레이네라면…….
“……마델레이네 경과 티타임을 가져 본 적은 없었지.”
황녀의 입매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그 말을 알아들은 시녀가 황급히 기사단 쪽으로 달려갔다.
황녀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드리웠던 어둠은 씻은 듯 사라졌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황녀가 만개한 꽃처럼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신의 티 파티는 언제나 즐거웠다.
마델레이네의 그 반쪽짜리 공녀가 제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서 있는 날에도.
둘째 공녀가 세상을 잃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티 파티를 준비하기에 딱 좋은.
수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