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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굳건해지는 믿음과 불안해지는 마음 (38/151)


#038. 굳건해지는 믿음과 불안해지는 마음
2022.07.10.



 
멀어지는 마차를 보는 올리비아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에셀라를 봐서일까. 아니면 에셀라를 용서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콘라드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올리비아는 쉽사리 분간할 수 없었다.


“……동생과의 만남 때문에 잊고 있는 건 없나요?”

먹먹한 감정을 삼킬 때였다. 은근한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요?”

“아까부터요. 올리비아.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잊고 있는 것부터 떠올려요.”

아까부터라니. 정말 기척도 못 느꼈는데. 하지만 에드윈은 다른 생각 말라는 듯 섭섭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잊고 있는 거라.

올리비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따로 떠오르는 건 없었다.

뒤에 있는 소벨을 보며 힌트를 달라는 눈짓을 했지만 소벨 역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제가 뭘 잊고 있는 거죠?”

“와. 너무하네요. 나 아직 토라진 거 안 풀렸는데.”

흥. 에드윈이 쌀쌀맞게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에드윈이 사 준 목걸이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에셀라가 왔다는 이야기로 넘어갔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토라졌다는 에드윈의 말에도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토라진 척을 하려면 눈빛이라도 서운한 티를 내든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김없이 다정했다.

놀려 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올리비아는 모르는 척 과장되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에드윈이 언제 토라졌었죠?”

“그렇게 나온다면 정말 내일 새벽부터 보석상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서게 만들 겁니다?”

으름장을 놓는 말투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졌다는 듯 항복의 의미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치사하네요. 에드윈. 저한테까지 이렇게 꼭 이겨야겠어요?”

“승리만 맛보다 보면 이렇게 된답니다 올리비아. 이게 얼마나 달콤한 일인데요. 올리비아도 알잖아요.”

동의를 구하듯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향해 눈짓했다. 올리비아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황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날. 그날이 얼마나 기꺼웠는지는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야 그렇지만. 저한테 이기신다 해서 특별한 이득은 없지 않나요?”

“적어도 산책을 청할 수는 있겠죠?”

에드윈이 짓궂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올리비아가 피식 웃으며 그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얼마든지요.”

 

.
.
.

서늘한 밤공기는 생각보다 더 기분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달아올랐던 눈가를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마차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에셀라를 태웠던 마차가 반대편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


“이러다 대공저 대문 앞이 마델레이네가의 집합 장소가 되겠어요.”

제이드가 한 번, 에셀라가 한 번, 콘라드까지 스쳐 지나가듯 왔으니 정말 집합 장소라 해도 무방하겠다.

우스갯소리였는데 에드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깜빡였다. 속눈썹이 팔랑일 때마다 아름다운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어쩌면 나와 똑같은 말을 하죠?”

“에드윈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럼요. 마델레이네에서 다녀간 횟수가 무려 세 번인걸요.”

그러더니 에드윈이 힐끗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올리비아?”

“뭐가요?”

“그냥 물어봤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에드윈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뭐지? 올리비아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윈은 사려 깊네요. 소공작이 에셀라를 데리러 온 것 때문에 내가 속상했을까 봐요?”

에드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입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말했다.


“난 괜찮았는데.”

늘 그랬으니까. 그래서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괜찮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올리비아는 짓궂게 웃으며 에드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에드윈이 왜냐고 묻기도 전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나가면 에드윈이 나를 데리러 올 거잖아요.”

어디든, 언제든.

에드윈이 저를 데리러 올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그야……. 아가씨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괜찮았다. 단 한 번도 저를 데리러 오지 않았던 콘라드보다 어느 순간부터 에드윈이 제 신경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에드윈의 붉은 눈이 느릿하게 휘어졌다. 맞닿은 시선이 쑥스러워 올리비아는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죠. 올리비아?”

“뭘요?”

“이리 자각도 없이 나를 흔들어도.”

에드윈이 애틋하게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지독히도 달았다.


“내가 그저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으니.”

“그게 뭐예요.”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에드윈의 표정이 더없이 다정해서. 올리비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언젠가부터 간지럽게 살랑대고 있었다.

* * *



“……따라서 내일 대공과 공녀를 회의에 참석케 할 예정이오. 그때 ‘일 년간의 유예’에 대해 이야기할 테니 모두 그리들 알고 있게.”

귀족들의 회의장에서 황제가 위엄 있게 말했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이리저리 날뛰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옆에 있던 귀족들은 화가 난 마델레이네 공작의 상태를 알아채고 저들끼리 수군댔다.


“그러니까. 지금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그거 아닙니까. 일 년의 유예 기간 동안 첫째 공녀를 제자리로 돌려놓든, 둘째 공녀를 태자비로 올리든.”

“정리하자면 그게 되겠죠.”

“아니. 공작께서 설마 둘째 공녀를 바치시겠습니까?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딸을?”

“그렇다고 대공의 청혼을 받은 첫째 공녀가 다시 돌아오겠습니까?”

“그야 모르죠. 첫째 공녀가 태자 전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우리도 다 알지 않습니까.”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졌을 때에서야 황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모두 시끄럽군. 오늘의 회의는 여기까지 하면 되겠어. 다들 나가 보게.”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티 내는 모습에 황제파, 귀족파를 나누지 않고 귀족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단 한 명,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을 제외하고 말이다.


“……공작은 안 나가고 뭐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황제는 일부러 무심한 얼굴로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은 굳은 입매를 겨우 풀고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일 년간의 유예라니요. 재고해 주십시오.”

“무엇을 재고하란 말인가. 이미 회의 때 다 끝난 이야기이지 않은가.”

“십사 년 전, 저와 나누셨던 이야기 역시 그때 끝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공작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공작을 노려보았다.


“공작! 지금 나를 향해 그 무슨 무엄한 표정이야!”

“……송구합니다. 폐하. 그렇지만 마델레이네의 충성을 바친 약속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 제 둘째 여식은 태자비 후보에서 제외해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공작의 표정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건 황제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마델레이네의 혈통입니다. 저 아이를 태자비로 받아 주신다면 마델레이네의 충성은 앞으로도 굳건히 폐하를 따를 것입니다.”

 
황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공작과 약속을 하긴 했다.


“……그랬었지. 하지만 어쩌겠나. 상황이 달라졌는데.”

“폐하!”

“그러니 딸 관리를 잘하지 그랬어. 공작.”

황제가 덤덤히 말했다.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저 숙인 고개 아래로 분노 가득한 표정이 담겨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 무엄함을 꾸짖는 대신 생산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했기에 태자의 약혼녀가 대공의 청혼을 받을 수 있단 말이야. 내 말하지 않으려 해도 이 망신스러운 일을 어찌할 수가 없어.”

“…….”

“세상에. 말이 되나. 공작? 앞으로 이 프란츠를 이끌어갈 태자의 약혼녀가 대공의 청혼까지 받아들이다니.”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비칸데르 대공가와의 악연이 아들 대까지 이어지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포드가 자신의 전철을 밟게 할 수 없었다. 그 애는 더 나은 방법으로 대공을 짓밟아야 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면 더 좋고.

그래서 황제는 공작을 향해 자비롭게 웃었다.


“……나 역시 공작과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아. 공작이 얼마나 둘째 딸을 아끼는지 잘 알고 있고.”

“…….”

“나는 지금 그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거야. 황제의 명으로 내린 소원까지 미뤄 가며 말이지.”

공작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제의 눈이 경고를 담아 공작을 마주했다.


“그러니 공작.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이럴 시간이 있거든 차라리 내일 회의 전까지 첫째 공녀와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잔뜩 굳은 얼굴의 공작이 황제를 향해 고개 숙였다. 황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작이 회의장을 나섰을 때, 황제는 커다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일이 어떻게 이리 즐겁게 돌아갈 수가.”

아마 조금 전 돌아간 귀족들은 이미 말을 퍼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말에 살이 붙는다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

일 년간의 유예.

좋은 말로 포장해 황가와 혼인 관계였던 여인의 후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지 실상은 여인의 정절을 난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태자와 십일 년간이나 약혼 관계를 맺었으니.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추문이 많은 공녀에게 새로운 추문이라. 레오포드의 곁으로 온다면 흔적 없이 사라질 말에도 공녀가 과연 그대로 대공의 옆에 있을지 퍽 궁금해졌다.


“……시종장.”

“예. 폐하.”

시립해 있던 시종장이 황제를 향해 다가왔다.

황제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대공에게 편지를 쓰게. 어쨌든 회의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야 하지 않겠나.”

“지금 바로 사람을,”

“아니지.”

느른한 웃음이 담긴 말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눈이 서늘하게 올라갔다.


“여유 있게 하게. 내일, 회의 시작 한 시간 전 정도면 좋겠군.”

그 시간이라면 제대로 회의에 오기조차 힘든 시간이었지만. 시종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당연한 수긍에 황제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누군가의 파멸을 바라는 것처럼.

* * *

티아제 궁 위로 황금빛 노을이 드리웠다. 마리아 에텔은 두 손을 모아 쥔 채 가슴 부근에 올렸다. 그 순간 레오포드가 다정히 말했다.


“마리아. 그대를 내 약혼녀로 맞이할 거야.”

아, 아. 마리아가 벌어진 입술 새로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 영롱한 푸른 눈에 벅찬 감동이 반짝이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레오포드의 약혼녀라니.

기쁜 소식이 있다며 레오포드가 잘생긴 입매를 올릴 때부터 예감하긴 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은 그 어떤 것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일이었다.

감동한 것처럼 울먹이는 마리아 에텔이 예뻤는지 레오포드가 품에 안으며 다독였다.


“하하하.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전하. 정말, 제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거예요.”

기쁨에 젖은 마리아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끊어졌다.

이제 정말 레오포드는 제 연인, 그 이상의 공식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벅차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레오포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올리비아 그 반쪽짜리가 약혼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는 그 반쪽짜리와 달랐다. 고귀한 에텔 후작가의 피를 이은 저는 황후 폐하를 모시고 귀족파의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태자비를 거쳐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려졌다.

레오포드와 저는 그 역대 어떤 황제와 황후보다 잘 해낼 것이었다. 서로를 단단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기뻐? 그렇다면 일 년 동안 약혼녀 자리를 잘 수행할 수 있겠지?”

“네?”

순간 마리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일 년 동안이라니. 레오포드가 잘못 말한 게 분명했다.


“레, 레오포드. 그, 그게 무슨.”

이제 예비 태자비답게 똑 부러지게 굴어야 하는데. 마리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멍청해 보일까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당황하니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뭐가. 마리아?”

“그, 일 년 동안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레오포드가 근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다정한 연인의 것이라서 마리아는 조금 안도했다.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약혼녀 자리가 일 년만이라뇨. 잘못 말씀하신 거죠?”

“정확히 말했어. 마리아.”

“네?”

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레오포드는 느른하게 웃으며 마리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올리비아는 일 년간의 유예로 자리를 비우는 거야. 대신 그 일 년간은 그대가 공식적으로도 내 옆자리를 차지하는 거고.”

구름 위를 달리던 달콤한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끌어내려졌다. 마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 이건 악몽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마리아는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레오포드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마델레이네 공녀가…….”

마리아 에텔은 힘겹게 웃었다. 늘 저를 사랑해 주던 레오포드가 오늘따라 어쩐지 멀어 보였다.


“공녀가 안 돌아온다면요. 그러면 당연히 제가 전하의 비가 되지 않겠어요?”

“마리아.”

책망하듯 저를 보는 레오포드의 눈이 차가웠다. 쿵-. 마리아의 심장이 저 바닥 아래로 떨어지는 사이 레오포드가 서늘한 표정을 깨며 짓궂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마리아의 부푼 가슴을 단번에 깨부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일까. 공녀가 당연히 돌아올 거라는 말일까. 아니면.

제가 비가 될 수 없다는 말일까.


“일 년이라도 그대가 내 약혼녀 자리를 잘 수행할 거라 믿어. 그렇지?”

레오포드가 규정한 사이는 명확하고 확실했다. 일 년간의 공식적 관계.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시. 저는 겨우 정부 소리나 들어야 하는 걸까.

레오포드가 다정히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아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믿기지 않았다. 저와 레오포드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그 반쪽짜리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반쪽짜리가 사라진 마당에도 제 편을 들어 주지 않는 레오포드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지금 저를 안은 채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마리아 에텔의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깨진 파편이 마리아 에텔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찔렀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며 티아제 궁이 다시 은빛으로 빛났다. 마치 제 깨진 기대를 비웃는 것같이 시린 달빛에 마리아는 문득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떠올랐다.


“정부가 되고 싶나요?”

 
여상한 목소리가 번뜩 떠올라서 마리아 에텔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 년간이라는 이 시간을 영원으로 바꿀 것이었다. 그리고 마리아 에텔은 자신이 있었다.

파란 눈동자 위로 짙은 욕망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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