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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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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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돌아가지 않는다
2022.07.06.
에셀라는 올리비아의 뒤를 따라 대공저의 계단을 내려갔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올리비아한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걸음이 멈추는 순간마다 에셀라와 올리비아의 구두 굽 소리가 엇갈리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절묘하게 비껴가는 서로의 구두 굽 소리 탓일까. 아니면 언니와의 이 애매한 거리 때문일까. 에셀라는 올리비아와의 거리를 눈으로 재 보았다.
딱 세 걸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한 모호한 거리였다. 힘껏 팔을 뻗는다면 앞서가는 언니를 잡을 수 있겠지만…….
에셀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아릿하게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아하고 꼿꼿하게 걷는 올리비아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올리비아와 바싹 곁에 앉았었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에셀라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조금 전을 떠올렸다.
올리비아와 끌어안고 있다가 갑자기 목이 말라 마른기침을 했고, 조금 떨어져서 식은 차를 마셨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는 둘 다 붉어진 눈으로 조금 웃기까지 했다.
어쩌면. 야트막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니한테 용서를 받았으니 다시 언니와 볼 수 있는 사이가 된 거라고. 어쩌면. 조금 더 바라자면.
하지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한 무뚝뚝한 집사의 말은 다시 에셀라를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대문 앞에 마델레이네 소공작님이 찾아왔습니다.”
콘라드가 저를 찾으러 왔다니. 붕붕 들떴던 마음 위로 베로니카와 샐리에 대한 걱정이 올라왔다. 오라버니가 알았을 정도라면 아버지도 아시겠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지만 스멀스멀 겁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셀라는 저도 모르게 언니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언니라면 무슨 말을 할까.
고개를 들어 올리비아의 얼굴을 본 순간, 에셀라는 입을 다물었다. 올리비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아무래도 이제는 가야겠지?”
하지만 에셀라는 봤다. 순식간에 사라진 올리비아의 진심을.
아주 어려운 감정들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에셀라는 개중 몇 가지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옅은 미소에 담긴 그건, 체념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그 얼굴 때문이었다. 제 어리석은 만약이 순식간에 쓸려 내려간 건.
언니는 절대로 마델레이네에…….
에셀라는 차마 끝맺을 수 없었다. 그 생각에 온점을 찍는 순간 언니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아서.
그러는 사이 둘은 1층 현관에 다다랐다. 아까 봤던 갈색 머리 기사가 현관 밖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올리비아와 에셀라가 현관을 나서자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났다. 밤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었고 별이 높이 뜬 늦은 밤이었다.
갈색 머리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대문까지 이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됩니다.”
아마 저 마차를 탄다면 앞으로 언니와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만히 마차를 향해 걸어가던 에셀라가 절박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마지막이 오기 전에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가씨. 이거 공녀님이 놓고 가신 것 같아요.”
“어? 고마워. 해나.”
뒤에서 달려온 하녀가 언니한테 무언가를 건넸다. 언니가 자연스레 받아 든 물건을 저를 향해 흔들며 웃어 보였다.
“에셀라. 이거 놓고 갔다.”
언니의 손에 들린 건 제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저걸 놓고 가다니.
아니, 사실 목걸이를 놓고 갔다는 것보다 더 충격인 건 따로 있었다.
언니가 아가씨라는 호칭을 듣고 너무 자연스레 반응했다는 거다.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처럼 얼얼했다.
언니는 늘 마델레이네 공녀였는데. 공녀라는 호칭에 누구보다 우아하게 잘 어울렸는데.
에셀라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웃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낯설었다. 하지만 왜일까, 를 따져 보는 건 의미가 없었다.
마델레이네 공작저에서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고작 며칠 있었던 이 대공저가 뭐라고.
올리비아가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에셀라의 마음이 먹먹하게 젖어 들었다.
언니한테 마델레이네는 뭐였을까요.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가 의아한 얼굴로 목걸이를 내밀었다.
“안 받아?”
“언니가…… 걸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까?”
올리비아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셀라가 올리비아한테 등을 보이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올리비아는 에셀라의 목에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불현듯 레오포드와의 데이트 날이 떠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에셀라가 목에 걸려 있던 핑크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빼서 제 목에 걸어 주었던 그날.
올리비아가 에셀라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했다.
“지난번과 정반대네. 그때는 에셀라 네가 나한테 네 목걸이를 걸어 주었는데.”
목걸이를 툭, 건드리며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 말했던 레오포드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날은 제게 솜사탕처럼 기분 좋은 날로만 기억되어야 했다.
에셀라와 샐리가 제게 아름답다 했던 날, 에셀라가 제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던 날, 에드윈과 커피 하우스에서 만난 날. 딱 그런 날로 말이다.
“다 됐다.”
웃으며 에셀라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예쁘게 목걸이까지 건 에셀라는 자수정 빛 눈 위로 투명한 눈물을 잔뜩 어룽거리고 있었다.
“왜 또 울어.”
다정한 목소리가 에셀라를 다독였다. 에셀라는 정말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우스운 일이었다. 언니가 이 대공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눈물이 나다니.
언니한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의 마음속에 이제 마델레이네는 없었다.
늘 웃는 낯으로 멀찍이서 저를 보던 언니는, 공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언니는 이제 없다.
이곳에서 언니는 모든 게 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에셀라는 안도 반 절박한 마음 반으로 저도 모르게 올리비아한테 물었다.
“……언니. 그래도. 제 언니는 맞죠.”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에셀라 마델레이네.
에셀라는 저를 향해 자조했다. 하지만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매달림뿐이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린 게 다행이었다. 언니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일 초가 수 분처럼 길었다. 괜히 말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언니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후회가 몰려올 때였다.
어깨를 껴안는 손이 따스했다.
“……그럼. 당연하지.”
올리비아는 에셀라의 등을 다독였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우는 에셀라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에셀라보다 먼저 성인이 된 저도 이제야 알았으니까.
그토록 매달렸던 마델레이네. 그 테두리 같은 게 없어도.
에셀라와 제가 자매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 * *
그 시각, 콘라드는 이를 으득 갈며 비칸데르 대공저를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공저 안쪽을 향해 멀어지는 마차를 말이다.
훌쩍 마차를 타고 떠난 비칸데르 대공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고고한 척 빙그레 웃으면서 저를 경멸하듯 바라보던 얼굴.
하. 웃기지도 않았다. 콘라드는 갑자기 나타났던 대공의 첫마디를 떠올렸다.
“마델레이네가가 내 저택 대문 앞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꼴에 대해서는 정식 항의를 넣어야 하나?”
콘라드는 그저 올리비아를 찾아갔다는 에셀라를 따라온 것뿐이었다. 올리비아와도 마주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대공이라면 더더욱.
대문을 지키는 경비에게 조용히 제가 왔다는 소식만 전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친히 대문까지 나온 건 대공이었다.
“……위대한 영웅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이곳에 동생을 데리러 왔을 뿐입니다.”
콘라드는 예를 갖추며 제 용건을 말했다.
“동생이라. 누굴 이야기하는 거지?”
“에셀라 마델레이네. 아까 전 대공저 안으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빈정대듯 미소 짓고 있던 대공이 화려하게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숨을 삼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이었겠지만, 콘라드는 본능적으로 저 웃음이 독초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무거운 분위기가 콘라드를 짓눌렀다.
대공을 본 순간부터 힘을 주고 서 있지 않았더라면 볼썽사납게 휘청일 뻔했다.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콘라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대공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소공작은 자세가 좋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날것의 위압감을 고스란히 받아 내기란 힘들었다.
제도에 영향력이 없는 대공이 굳이 황제파인 저와 척을 질 행동을 하다니. 콘라드의 잘난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콘라드는 비웃듯 피식 웃었다.
고작 올리비아 때문에 제게 이러는 거라면. 대공에게 내렸던 평가를 한참이나 하향 조정해야 했다.
전쟁 영웅으로 명예를 떨쳤지만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은 사람. 딱 그 정도.
그때였다. 우악스럽던 기세가 걷히고, 대공이 혀를 차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정말이지 마델레이네에서 운을 놓치지 않는 건 그나마 공녀뿐인가 보군.”
“무슨……!”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대공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마차를 타고 대공저 깊은 곳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콘라드는 분노가 넘실대는 눈으로 마차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공이 탄 마차가 점처럼 멀어졌을 때에서야, 콘라드는 잇새로 짓이기듯 내뱉었다.
“뭘 안다고.”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 때문인지 지금 대공은 영웅 놀이에 심취한 게 분명했다. 올리비아를 감싸 주면서 다시 영웅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지도 모른다.
올리비아가 어떤 애인데.
성난 숨소리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때였다. 철옹성 같은 대공저의 대문이 열리고 마차 한 대가 바깥으로 나왔다.
“오라버니.”
마차의 문이 열리며 낯설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셀라였다.
잔뜩 화를 내려고 했는데. 퉁퉁 부은 에셀라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콘라드의 전의가 꺾였다.
쭈뼛쭈뼛 다가오는 에셀라의 모습에 콘라드는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공작가의 마차를 턱짓했다.
“……우선 타.”
.
.
.
콘라드의 신호에 마차가 출발했다. 에셀라는 제 잘못을 아는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콘라드는 에셀라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게 다정한 애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너. 분명히 아버지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아버지가 아셨다면 너는 방에서 근신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와야 했어요.”
“……뭐?”
콘라드의 기민한 감각은 에셀라에게 생긴 이상한 균열을 곧바로 눈치챘다. 눈치를 보면서도 분명하게 말을 하는 건, 전혀 에셀라답지 않았다.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했어요.”
“에셀라!”
결국 콘라드가 노여움 섞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에셀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가 제게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콘라드는 스스로를 가라앉히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셀라 마델레이네. 현명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익숙한 애정이 오늘따라 못 견디게 아팠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이 애정이 아주 조금이라도 언니한테 닿았으면 어땠을까.
에셀라는 뭉글뭉글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키며 말했다.
“왜 언니한테는 이러지 않았어요.”
“에셀라!”
“아주 조금만. 나한테 하는 것처럼 아주 조금만 해 주었어도 달랐을 텐데.”
서러움을 삼키던 에셀라의 말끝이 흐려졌다. 콘라드는 답답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말을 했다.
“그야!”
“언니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젖은 에셀라의 말이 콘라드의 머리를 때렸다.
아무것도 안 하다니. 그럴 리가.
올리비아를 미워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 애가 우리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행복이 깨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일에만 매달렸으며 제이드는 매일 화를 내더니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런데.
그 애가 아무것도 안 했다니.
콘라드는 에셀라의 말을 정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콘라드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저가 멀어지는 것을 보자 속이 더 불편해졌다. 다 올리비아 때문인데. 지금은 그 애를 탓할 기운조차 없었다. 훌쩍이는 에셀라의 울음소리가 옅어졌다.
아주 조금만 더 고민했더라면, 에셀라에게 느꼈던 균열이 콘라드 자신의 안에도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콘라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익숙하게 미워해 온 대상을 찾았다.
가장 손쉽게 탓할 수 있는 사람. 그건 당연하게도 올리비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