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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아주 조금 더 운이 좋은 사람 (35/151)


#035. 아주 조금 더 운이 좋은 사람
2022.06.29.



“잠들었으면 깨워 줬어야죠.”

응접실에 올리비아의 애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실패였다.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어떻게 깨워요. 안아서 옮겨 준다면 모를까.”

“에드윈!”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에드윈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윈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자신은 무해하다는 듯 웃는 두 눈매가 달큼하게 휘어졌다.

저 눈웃음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아까 마차에서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잊어서도 안 된다.

올리비아는 달아오르는 뺨에 손부채질을 하며 에드윈을 흘겨보았다.


“아, 깼어요?”

 
어슴푸레하던 시야가 이상해 눈을 깜빡이던 찰나였다. 눈앞에는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모를 에드윈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 그, 이게”


“많이 피곤했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얼른 저택으로 올걸.”

 
생각을 못 했다는 듯 에드윈이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폈다. 잠이 묻어나는 올리비아의 멍한 얼굴을 보고 조금 웃더니 이내 마부석을 향해 말했다.

이제 저택으로 들어가자고.

불안함이 스물스물 올라온 올리비아는 황급히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둑하던 사위는 이미 검게 물든 뒤였다.

대공저에 들어온 마차가 한참이나 정원을 뱅뱅 돌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잠이 든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오늘따라 정말 긴장이 풀어진 걸까. 자고 일어난 얼굴이 부었을 텐데. 다시 생각해 보니 새삼 부끄러웠다.

올리비아의 뺨이 부루퉁하게 부풀었다. 부푼 뺨을 자각하지 못한 초록색 눈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에드윈의 시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생각에 빠져 있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는 꼭 깨워 줘야 돼요! 알겠죠?”

“……다음에요?”

에드윈의 말이 한 박자 늦었다.

됐다. 올리비아가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면 다 들어준다면서요.”

사정이 안 된다면 협박이었다. 에드윈이 아차 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에드윈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이번’에는 착하게 보기만 했고, ‘다음’에는 깨워 줄 테니…….”

나른한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휘감았다.

그제야 제 말의 허점을 알아낸 올리비아가 아차 했을 때, 에드윈의 몸이 올리비아 쪽으로 쏟아질 것처럼 기울었다.


“……그 다음번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요?”

느슨하게 휘어진 눈매 속 붉은 눈이 어딘가 위험하게 반짝였다.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돼요!”

“와. 생각도 않고 대답하네요? 내가 뭘 할 줄 알고?”

“뭘 하든 없어요. 다음도 없어요.”

“난 있었으면 좋겠는데.”

에드윈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림도 없다. 올리비아가 굳게 다짐하기 무섭게 에드윈이 다정히 말했다.


“그럼 내가 올리비아 앞에서 조는 건 괜찮죠?”

“네?”

“그냥. 볕 따뜻하면 마차 안에서 졸리고. 그러다 보면 내가 먼저 졸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에드윈의 목소리 위로 몽글몽글한 그림이 그려졌다. 노란 햇볕이 들어오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꾸벅이는 에드윈. 그러다가 곤히 잠에 들어 마차의 창문에 기대어 자는 에드윈.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먼저 잠든 에드윈을 놀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제 앞에서 긴장을 푼 채 잠이 든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것을 깨달은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묘한 기분이었다. 에드윈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뻐근하게 당겼다.

조금 더 닿고 싶어졌다.

테이블 너머가 아닌 바투 앉고 싶어서. 저 다정에 자꾸만 기대고 싶어서.


“……대신 도착했을 때는 서로 깨워 주기로 해요. 계속 마차에서만 자면 찌뿌둥하니까.”

“마차가 아닐 때는요?”

“네?”

“예를 들어 이렇게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다 잠들었을 때는요?”

“그러면…….”

생각도 못 한 질문에 올리비아의 말문이 막혔다. 에드윈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옆으로 가서 어깨에 자는 사람 머리 기대게 해 주는 건 어때요? 우리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닌가요?”

에드윈이 능청스레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깨에 에드윈의 머리가 닿는다는 것을 생각하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닿고 싶다고 생각은 해도 그렇게 가까이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올리비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는 이렇게 여유가 없는데. 저와 닿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빙그레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빈틈없이 저를 당겨 주다가도 은연중에 보이는 저 느긋한 태도를 골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더 별거 아닌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에드윈이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잘생긴 얼굴이 어쩐지 당황한 것처럼 보여서 올리비아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진, 짜요?”

“저는 진짜인데. 설마 거짓으로 물으셨어요?”

올리비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쩌면 능청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에드윈의 속은 순진하고 말랑거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그랬다. 이름을 부르자 붉게 달아올랐던 에드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 장난치고 싶었다. 어쩌면 대공의 말대로 저는 정말 재치가 넘치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농담을 하며 다가서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기로 아주 굳게 다짐했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올리비아가 에드윈을 바라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름다운 낯이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드윈은 평소보다 더 상냥하게 웃고 있는데.

올리비아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몸을 뺐다. 순식간에 응접실의 공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에드윈이 낮게 웃자 툭 불거진 목울대가 느리게 울렸다. 붉은 눈 위로 진득한 욕망이 짙게 번졌다.


 


“……올리비아가 먼저 허락한 겁니다?”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에드윈의 눈매 끝이 달콤하게 휘어졌다. 그러다 사이를 가로막듯 자리한 테이블을 보고 쯔, 혀를 찼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쉽다고 생각했던 테이블이 훌륭한 보호막처럼 작용했다.

하지만 한숨을 돌리는 것도 사치였다. 에드윈이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올리비아의 옆으로 다가올 것 같은 모습에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분위기를 깨트렸다. 에드윈의 얼굴이 설핏 찌푸려졌다.


“소벨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안 돼.”

“……예?”

단칼에 자르는 대답에 응접실 바깥에서 황당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돼! 들어와요.”

“올리비아.”

올리비아를 부르는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하하. 올리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외면하는 사이, 문이 열리며 소벨이 들어왔다.


“전하를, 아가씨를 뵙,”

“언제부터 내 명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소벨?”

음산한 목소리에 찔끔한 건 올리비아였다. 소벨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하께서 아가씨의 명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하실 때부터였습니다. 아마.”

“입만 살았어. 소벨.”

“입이라도 살았으니 다행입니다. 내일 오전부터 아가씨의 옆방을 드레스 룸으로 공사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도면상으로만 봐도 보관할 드레스며 구두며 보석이 너무 적습니다.”

에드윈이 혀를 차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소벨이 들고 있던 종이를 쫙 펼쳤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용을 표시하는 색칠된 부분이 적었다.


“그렇다네요. 이를 어쩌나.”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돌아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올리비아는 서둘러 대꾸했다.


“아까 마담 플루토의 부티크에서 주문한 드레스 오면 꽉 찰 것 같은데.”

“열다섯 벌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구두와 보석 진열장도 텅 비었습니다.”

구두와 보석이라니. 올리비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흥. 에드윈이 새침하게 턱을 올렸다.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 몽글몽글한 분위기에서 소벨은 짜게 식어 갔다. 그러다 에드윈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참. 그리고 전하. 차가 다 식었습니다.”

차? 올리비아는 멀뚱히 티 포트를 바라보았다. 응접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차는 따끈했다.

올리비아가 차를 바라보는 사이, 에드윈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이내 풀어졌다.


“……기분이 안 좋아. 아무래도 올리비아의 진열장이 비어서 그런가 봐요. 소벨. 보석상을 불러. 구두 장인들도.”

“예.”

소벨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정말로 내일부터 보석상들이 저택에 줄줄이 방문할 기세였다. 이전과 달리 지금 제 재산이라고는 폐광산 하나뿐인데.

올리비아는 우물쭈물했다.


“보석은 있는데. 그때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있고.”

“하지만 연회 이후로는 안 걸잖아요.”

“그야…….”

같은 목걸이를 가진 에셀라가 떠오르니까.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매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소벨은 차를 더 가져오겠다며 응접실을 나섰다. 올리비아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에야 옅게 웃었다.


“……제게 그날 이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두 개 사 주셨잖아요.”

“하나는 올리비아한테 선물했고, 다른 하나는.”

“……제 동생 에셀라한테 선물해 주셨죠. 전달은 했는데. 하고 다닐지는 모르겠네요.”

동생, 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소하고 껄끄러운 발음인 줄 미처 몰랐다.

올리비아는 입속으로 다시 한번 ‘동생’을 중얼거렸다.

이제 차츰 더 낯설어질 지칭이었다. 올리비아가 흐리게 웃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에드윈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동생을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눈이 서러워져요.”

서럽다라니, 그냥 저는 에셀라가 보고 싶어서…….

무심코 생각하던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었다.

보고 싶은 가족. 늘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 혹시나 제 소문이 흉이 될까 다가가지 못했던 애틋한 동생.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그보다 조금 복잡했다. 여전히 애틋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러웠다. 그 애에게 미안했지만, 그 애 때문에 속상했다.

그러니까.


“……에드윈 말대로 서러워서요.”

입술을 타고 나가는 목소리가 녹녹해졌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생각할수록 서러워서 올리비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에드윈 때문이다.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다 덮어 두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가 나오니 다시 생각나 버렸다.


“……딱 한마디만 들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리숙한 투정이라 해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때, 에셀라한테 한마디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내가 매번 ‘다음에’라고 약속을 미뤄서 에셀라도 내 말을 안 들어 준 걸까요?”

에셀라가 항상 이야기하던 친구의 티 파티, 혹은 함께 가기로 한 커피 하우스, 데뷔탕트 준비 등. 에셀라가 원하고 올리비아가 미뤘던 일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그러다 올리비아가 조금 웃었다. 저한테서 이유를 찾는 건 이제 그만하기로 했으면서.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런 말들은 미웠어요.”

 


“언니 때문에 정말 우리 엄마가 죽었어?”

 
에셀라가 했던 그 한마디가 응어리처럼 맺혔다. 올리비아는 천천히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말들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텐데. 에드윈은 집요하게 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그러면 아주 보기 싫겠네요.”

묘하게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서운하고 서럽고, 어쩌면 진심으로 미웠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보고는 싶어요.”

쓰러졌다고 했다. 괜찮은지 정도는 보고 싶었다. 에셀라는.

가만히 있던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고 미묘하게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마델레이네 공작가는 대체로 운이 좋은 편인가 봐요.”

갑자기 나온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이야기에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델레이네 공녀는 그중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고.”

마델레이네 공녀.

에드윈은 저를 늘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러니, 에드윈이 저런 식으로 언급할 만한 운이 좋은 공녀는 한 명밖에 없었다.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초조한 것 같기도 했고 미묘하게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빠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에드윈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공녀가 저택으로 왔어요. 올리비아가 보고 싶다고.”

쿵. 어쩐지 심장이 크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결정은 오롯이 올리비아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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