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3. 마지막 기회 (33/151)


#033. 마지막 기회
2022.06.22.



 


“황후가 공녀와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게. 황후의 말대로 공녀가 가엾게 되는 일은 피해야지.”

 
마차에서 내린 황후는 황제의 말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 천한 초록 눈의 공녀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제 아들 태자를 끔찍이도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공작에게 직접 압박을 가한다 해도 좋았을 텐데. 태자를 향한 마음을 알고 있으니 의심은 안 하지만 요 근래 비칸데르 대공과 어울리는 공녀의 행동거지는 그야말로 문제였으니까.

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공녀가 대공저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황후궁까지 굴러 들어왔다. 아무리 못 배웠어도 태자와 약혼 관계인 공녀가 타 귀족의 저택에서 지내다니.

그것도 황녀와 혼인을 생각했던 비칸데르 대공의 저택이라니.

문제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심각한 일로 번지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첫째 딸을 제대로 가르치든, 아니면 막내딸을 대신 내놓든.

이 엄포 하나만으로도 공작의 얼굴이 굳어질 게 눈에 선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황후가 혀를 찼다. 하지만 이내 여유롭게 웃으며 황후궁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황녀로부터 공녀를 불렀는데도 바로 오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어제 공녀가 황녀 궁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괘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녀가 어련히 잘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황후는 조만간 공녀를 황후궁으로 불러야겠다며 낭랑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황후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긴 손톱이 섬뜩하게 움직인 것을 보지 못했다.

황후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의 즐거운 기분은 태자비 궁인 티아제 궁에 심어 두었던 시녀의 보고로 산산조각 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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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시 고해 보아라.”

“그, 그것이.”

고저 없이 차가운 황후의 목소리에 태자비 궁에 심었던 시녀가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공녀가 태자 전하께 파혼을 요구했습니다. 폐하.”

“하.”

황후의 눈초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시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감히 출생조차 비천한 초록 눈의 계집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태자에게 파혼을 요청했다고?

조금 전 여유로운 미소는 어디 갔는지 아름다운 얼굴이 노여움으로 점철되었다. 분노 가득한 손이 소파의 팔걸이를 거칠게 잡았다.

팔걸이의 비단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것을 발견한 황후의 가장 측근 시녀인 오프템 후작 부인이 눈치껏 다른 시녀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응접실에서 황후는 늘 머리를 숙이던 예쁘장한 얼굴을 떠올렸다.

태자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뭐든 할 듯 굴던 공녀.

늘 태자를 바라보며 사랑에 빠진 눈을 하던 공녀의 진심이라는 건 겨우 이 정도로 얄팍했다.


“……하. 누가 천하디천한 반쪽짜리 아니랄까 봐.”

황후가 옅은 숨을 뱉었다. 마치 공녀한테 농락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가슴속에 불덩이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감히 지고한 태자에게 먼저 파혼을 요구하다니.


“맹랑하고 건방지고 천한 것 같으니라고.”

나직이 중얼거린 말 위로 독기 어린 화가 일렁였다.

일 년간의 유예 따위는 없다.

그 비천한 출생의 계집 따위는 제친 채, 에셀라 마델레이네를 태자비로 바로 맞이해 달라고 황제께 청할 것이다.

그거야말로 딸 간수조차 제대로 못한 공작에게 가장 큰 형벌이 될 것이다.

여리고 순하다는 마델레이네의 작은 공녀를 데려와 제 독기로 말라 죽게 할 테니까.

황후는 잇새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늘 청초하게 반짝이던 갈색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 * *

커다란 태자의 마차는 벌써 몇 바퀴째 궁을 돌고 있었다.

마부는 불안한 얼굴로 말을 타고 마차 옆을 따라오는 하지스 백작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자의 부관인 하지스 백작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계속 돌라는 뜻이었다.

명에 따라 마부는 느리게 마차를 몰았다. 그리고 이 느린 마차 속에서 레오포드는 무표정하게 앞을 노려보았다.

지금 제게 닥친 상황이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제게 파혼을 요구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약혼을 깨기 전에 마지막으로 뵈러 왔어요.”

 
귓전에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제 궁에 제 허락 없이 에텔 영애를 들이셔서 제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신 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엿들었다기보다는 전하께서 저와의 약속을 잊고 그 시간에 제가 기다리는 이 태자비 궁의 정원에서 밀회를 가지신 거죠.”


“제국의 작은 태양께 경배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곧 비칸데르 대공비로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부디.……그때까지 무탈하시길.”

 
그렇게 말을 잘하는 여자인 줄 미처 몰랐다. 아니. 올리비아가 제 눈을 똑바로 보고 그렇게 덤덤하게 파혼을 말할 줄도 몰랐다.

아까의 올리비아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동요 없이 저를 보던 초록색 눈이 떠오르자 레오포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번 떠올리자 조금 전의 일들이 연이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가 서라는 말에도 감히 뒤를 돌아 가던 올리비아. 그리고 그 옆을 지키듯이 선 채 저를 힐끗 바라보던 대공의 얼굴. 꼭 저를 비웃는 것 같던 얼굴이 또렷해졌을 때.


“감히…….”

잇새로 내뱉는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무거웠다. 레오포드의 주변으로 사나운 기운이 요동쳤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렸다.

감히. 국경이나 돌던 아버지의 개가 제 약혼녀를 탐했다. 가장 정숙해야 할 제 약혼녀는 대공의 술수에 속아 넘어갔다.

가당치도 않게.

결국 레오포드가 마차를 쾅 내리쳤다. 값비싼 마차가 울릴 정도로 강한 힘에 마차가 멈춰 섰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아랑곳 않고 마차를 한 번 더 내리쳤다.

응어리처럼 맺힌 이 울렁임은 분명 분노일 것이었다.

제 감정의 정체를 정의한 레오포드의 눈이 심해처럼 짙게 가라앉았다.

누구라도 한 명 눈앞에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흉흉한 기세가 너울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멈춰 있던 마차가 다시 출발한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궁에 도착한 레오포드는 잔뜩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시종장은 레오포드를 맞이하며 조심스레 보고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모든 게 귀찮았다. 레오포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황후인 어머니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레오포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황후가 득달같이 레오포드의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태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

기분이 가라앉은 터라 황후와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태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히 그 천한 게!”

하지만 황후의 말을 듣는 순간 레오포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태자.”

“저는 그게 중요합니다. 폐하.”

레오포드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황후는 아차 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고한 태자였다. 천하에 드높은 자존심에 파혼을 요구당한 일이 바깥으로 흘러 나간 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태자비 궁에 심어 둔 시녀가 있었어요. 태자. 말이 새어 나갈 것은 염려 말아요.”

단호한 황후의 말에도 레오포드는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감히 그 반쪽짜리 공녀가 태자한테 건방을 떨다니!”

레오포드는 껄끄러운 마음을 애써 삼켰다. 황후의 말 중 어디가 걸리는지조차 레오포드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황후가 분노 섞인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폐하께 일 년간의 유예를 청하고 왔는데. 안 되겠습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내쫓고 태자비의 위치에 더 어울리는 에셀라 마델레이네를 바로 태자비로 들여요. 태자.”

“……일 년간의 유예요?”

에셀라 마델레이네를 태자비로 들이자는 이야기보다 레오포드의 귀에 꽂힌 것은 ‘일 년간의 유예’라는 말이었다.

황후는 기가 차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예. 태자. 황가와의 혼인 관계에 있던 여인은 후계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일 년간은 타 귀족과 혼인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

“출생은 천해도 능력은 제법 나쁘지 않아 부러 기회를 주려 했더니!”

벼락처럼 화를 내는 황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레오포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상하게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었다. 아까의 대화를 복기하던 레오포드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을 때, 덤덤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쳤다.


“제 궁에 제 허락 없이 에텔 영애를 들이셔서 제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신 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엿들었다기보다는 전하께서 저와의 약속을 잊고 그 시간에 제가 기다리는 이 태자비 궁의 정원에서 밀회를 가지신 거죠.”

 
아. 그거다.

사실을 직시하는 덤덤함.

애써 참고 나서 웃는 게 아닌 묘하게 체념한 듯한 웃음.

말을 잘하는 것을 떠나 오늘의 올리비아는 정말 평소와 달랐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

잘생긴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에 황후가 노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폐하께 고하러 가요. 태자. 에셀라 마델레이네와의 혼인을 추진해 달라고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하신 대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게 일 년간의 기회를 주시지요.”

제법 머리가 좋고 아는 것이 많은 올리비아라면 고서에 나오는 일 년간의 유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어머니를 만난 게 다행이었다. 레오포드는 ‘일 년간의 유예’에 대해 제대로 몰랐으니까.

레오포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황후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 건방진 계집한테 기회를 주자는 겁니까. 태자?”

“……한 번 정도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감히 먼저 파혼을 요구했습니다. 아무리 못 배웠어도 정도가 있지!”

“압니다. 폐하. 하지만 한 번 정도의 방황은 너그러이 봐줄 요량입니다.”

그래. 방황. 지금 올리비아는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넉넉히 일 년이라면 다시 제 자리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챌 거다.


“그래도.”

황후는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닌 듯했다. 레오포드는 어머니를 에스코트하듯 소파로 이끌었다. 둘 다 너무 화가 난 터에 계속 서서 이야기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대신 폐하. 저는 그 일 년간의 유예 동안 마리아 에텔을 약혼녀로 삼고자 합니다. 제 약혼녀 자리를 쉬이 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당히 귀족파와 황제파의 균형을 맞추기에도 적절한 선택이었다. 마리아라면 일 년간의 약혼녀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 있다는 레오포드와 달리 황후는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에텔 영애보다는 차라리 에셀라 마델레이네 공녀가 낫지 않겠습니까? 황위를 굳건히 하려면 추후 일이 어떻게 되든 마델레이네와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귀족파의 수장 엘킨 공작가의 공녀였던 황후에게 중요한 것은 태자의 굳건한 황위였다. 황제파의 수장인 마델레이네 공작은 싫었지만 사랑스러운 마리아 에텔의 가문은 태자에게 살짝 모자랐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가 얼마나 올리비아를 잘 아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제야 황후의 눈이 조금 풀어졌다. 레오포드는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황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했다.

늘 쉬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지금이야 이상하게 굴고 있지만 올리비아는 제 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원히 자신만을 바라봐야 했다.


“공녀는 저를 절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일 년 정도면 공녀는 다시 제 옆으로 오겠다며 제게 빌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쫓아다닌 주제에 이제 와 파혼을 요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리비아가 다른 누군가의 옆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아무리 올리비아가 싫었어도, 올리비아가 제 소유라는 것은 명확했다.

그리고 레오포드는 단 한 번도 제 소유를 뺏긴 적이 없었다.

게다가 늘 제 옆을 지키던 건 올리비아가 먼저 시작했다.

그러니 올리비아는 앞으로도 제 옆을 맴돌며 저만 바라봐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다시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그러니. 폐하. 일 년 뒤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황제 폐하께도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저도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여튼 공녀는 운도 좋군요.”

확신 어린 태자의 목소리에 황후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후도 레오포드도 깨닫지 못했다.

은연중에 둘 다 올리비아를 놓칠 수 없는 태자비 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 그 시간, 기회를 바라지도 않았던 올리비아는 쏟아지는 드레스들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황궁에서 있었던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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