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2. 언니한테 가는 길 (32/151)


#032. 언니한테 가는 길
2022.06.19.



“아가씨. 이것 조금만 드세요. 네?”

커튼으로 햇빛을 가린 어두운 방.

베로니카는 마음을 졸이며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일부러 뜨겁지 않게 한 김 식힌 소고기 감자 수프는 에셀라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고개만 저을 뿐 그릇을 받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에 그늘이 진 얼굴은 오늘따라 더 해쓱해 보였다.


“아가씨. 정말 왜 그러세요.”

베로니카는 울기 직전이었다. 늘 햇살처럼 웃던 아가씨가 웃음을 잃은 것도 속상한데 벌써 몇 끼째 식사도 거르다니.

큰 공녀님이 나간 날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것까지 생각하면……. 베로니카는 꾸역꾸역 눈물을 삼켰다.


“베로니카. 언니한테 가야 돼.”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에 결국 베로니카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 말씀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 말 때문에 공작님께서 근신을 명령하셨잖아요. 아가씨.”

 


“언니라니!”

 
며칠 전 언니에게 가겠다는 에셀라의 말에 공작은 크게 노여워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인지 처음으로 에셀라에게 화를 냈다.


“그 애한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이야!”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요. 아버지. 저 정말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요.”


“절대 안 돼. 생각을 바꾸기 전에 에셀라 너는 방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갈 줄 알아라!”

 
얼음처럼 차갑다는 소문이 자자해도 공작은 에셀라 앞에서는 늘 다정한 아버지였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같은 화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에셀라는 끝내 뜻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내려진 처분이 근신이었다.

베로니카는 근신 중인 에셀라의 곁을 지키며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푸념처럼 울음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이게 다 큰 공녀님 때문이에요. 큰 공녀님만 아니었더라도.”

“아니야. 이건 나 때문이야. 베로니카.”

“네?”

모처럼 듣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그치고 에셀라를 바라보았다.

에셀라는 베개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쳐 쓰러져 잠들 때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나 어렸을 때도 이렇게 제이드 오라버니랑 같이 방에서 근신했었다? 언니랑 놀았다고.”

저보다 다섯 살이 많은 둘째 오라버니 제이드는 근신이 떨어질 때마다 불평을 가득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몰래몰래 올리비아한테 놀러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빵, 또 어느 날은 오목한 그릇에 담긴 수프, 어느 날은 크레용과 종이를 챙겨 들고서.


“근데 어느 날부터 제이드 오라버니가 언니를 보러 가지 않겠다는 거야.”

그토록 올리비아와 노는 것을 좋아하던 제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제이드가 딱 열 살이 되던 때였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에셀라의 시선에 그리움이 담겼다.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보라색 자수정 빛 눈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이 뜬금없는 이야기에도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감이 왔지만 오랜만에 밝은 아가씨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어. 나 혼자라도 가야지.”

에셀라가 개구쟁이처럼 코를 찡긋했다.

잠이 많은 에셀라가 처음 잠을 이겼던 이유가 언니와 몰래 놀기 위해서라면 말 다 했다.


“언니 방은 저택 사 층의 다락방이었거든? 베로니카도 알 거야. 사 층에는…….”

“유령이 있다는 이야기요?”

“응, 그거.”

베로니카의 대답에 에셀라가 피식 웃었다. 누가 낸 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에셀라한테는 효과적이었다.

제이드와 함께 갈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혼자 선 사 층은 달랐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으스스한 사 층의 분위기. 이상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계단들. 눈앞에 희뿌연 유령이 정말로 나타날 것만 같았다.

다섯 살 에셀라는 몇 번이고 언니한테 놀러 가기 위해 계단 부근까지 다가갔다. 물론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계단에 서 있는데. 위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야. 나는 유령이 내려오는구나, 나를 잡아먹는구나, 하면서 눈만 감고 울었지.”

차마 소리조차 못 내고 울던 그날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바로 그다음 장면 때문이었다.


“그때 언니가 나타났어.”

에셀라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에셀라?”

 
어룽거리는 촛불 하나만 든 채 나타난 올리비아는 그야말로 영웅처럼 보였다. 유령이 살 것만 같은 사 층에서 당당히 나타난 영웅.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얼굴 때문이었을까.

그때 에셀라는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부옇게 흐린 시야 너머로 어렸던 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던 게 또렷했다.


“그런데 내가 막 우는데도 언니가 나를 안아 주지도 않고 달래 주지도 않는 거야.”

“…….”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 그래서 일부러 더 크게 울었다?”

 


“에셀라. 울지 마.”

 
결국 제가 이겼다. 한참을 쩔쩔매던 언니는 다시 저를 안아 줬다. 눈물도 닦아 주었고, 언니의 방에 초대해 주기도 했다.

제 방보다 작지만 안락한 곳. 그런 곳이 언니의 방이었다.

그날 밤 이후 에셀라와 올리비아 사이에는 암묵적인 비밀이 생겼다. 늦은 밤이 되면 올리비아는 아무도 몰래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왔고, 에셀라는 졸린 눈을 비비며 언니가 데리러 오길 기다렸으니까.


 
옛날 생각이 고스란히 나는 듯, 에셀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베로니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에셀라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지을 법한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느리게 비밀을 고백했다.


“나는 되게 나쁜 애였어.”

“네?”

갑작스러운 고해 성사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셀라 아가씨가 나쁜 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에셀라 아가씨를 사랑했다. 햇살처럼 밝고 만개한 튤립처럼 사랑스럽고 착한 아가씨. 하지만 에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실.”

짙게 가라앉는 에셀라의 목소리에 베로니카가 숨을 죽였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에셀라가 천천히 말했다.


“언니가 나랑 논 다음 날마다 혼나는 걸 알고 있었어.”

처음에는 어렴풋한 형상처럼 느껴졌었다. 언니의 어두운 표정과 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리 같은 것들이.

하지만 안개처럼 아스라한 것들은 점점 뚜렷해졌다. 날 선 목소리가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고, 오라버니가 언니의 책을 숨기는 걸 보았고, 가족들이 모여 있는 따뜻한 저녁에 언니는 혼자 멀찍이 서 있었다.

그사이에서 에셀라는 눈치챘다. 자신이 언니와 논 다음 날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그런데도 내 욕심에 언니랑 노는 걸 포기하지 못한 거야.”

애써 밝은 척을 하던 에셀라의 목소리가 점점 녹녹해졌다. 베로니카의 콧날도 같이 시큰해졌다.


“늘 언니는 나에게 밤에 푹 자라고 했는데. 내가 억지로 언니한테 놀러 간 건데도.”

베로니카는 큰 공녀님을 싫어했다.

공작님은 늘 큰 공녀님이 에셀라 아가씨한테 나쁜 물을 들이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언젠가는 큰 공녀님이 에셀라 아가씨한테 상처를 줄지 모른다고.


“언니는 그런 거 하나도 안 이르고 혼자 혼났어.”

그런데 문득 베로니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했어.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어렸다면 어렸으니까.”

 


“에셀라는 절대 몰라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가씨는 이렇게 언니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이제는 다 컸잖아. 내가.”

과연 제가 무엇을 더 감시해야 하는 걸까.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떨렸다. 에셀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간절하게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언니에게 말해야 돼. 베로니카.”

운 티가 선연한 목소리가 단단했다. 그게 에셀라 아가씨다워서. 베로니카는 제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예 이야기를 듣지 말았어야 했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미 베로니카의 마음은 기울었다.


“그러니까. 나 한 번만 도와줘.”

사실 딱딱해 보이는 베로니카는 에셀라를 완벽히 이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베로니카는 늘 속절없이 에셀라의 편이 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프는 마저 드세요. 그리고, 그리고 가요.”

못 참겠다는 듯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에셀라가 눈물 번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 * *

황궁에서 대공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올리비아는 빠르게 바뀌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궁을 벗어났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빠르게 긴장이 풀렸다. 몸은 노곤한데 마차에 기대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자세를 바로 가다듬고 싶었다.


“피곤하다면서요. 조금 기대어 쉬어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에드윈 때문이었다. 걱정하는 얼굴을 마주 보면서 올리비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안 피곤해졌어요.”

“정말요? 얼굴이 평소보다 더 하얀 느낌인데.”

에드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른한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듣기 좋았다.


“드레스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요.”

“드레스요?”

올리비아는 짙은 남빛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짙은 남빛이다 보니 평소보다 더 얼굴이 하얘 보일 수도 있고.”

 


“공녀님은 일부러 어두운색 드레스만 찾으신다죠? 그래서 그런가, 지금 공녀님은 하얀 걸 떠나서 창백해 보이시는데.”

 
데뷔탕트 전, 어느 부티크에서 들었던 비꼼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때는 타인의 말을 넘길 줄 몰라서 가슴 한편이 제법 시리게 아팠다.

다시 한번 속이 상할 줄 알았는데. 이상했다.

그때는 상처가 된 말이 지금은 훌륭한 대답으로 탈바꿈되었을 뿐 기분이 상하거나 마음이 아릿하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 제게 상처조차 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올리비아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옷이 잘못했네요.”

“네. 네?”

무심코 대답을 하던 올리비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옷이 잘못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일까. 하지만 에드윈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한테 계속 피곤한지 묻게 한 옷에게 죄를 묻죠.”

올리비아가 피식 웃었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런 말이 웃겼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농담을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진담이었는데요?”

“옷이 잘못했다는 말이요?”

설마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을 때, 에드윈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의미에서 러헤이른에 잠시 들러도 괜찮을까요? 다행히 아가씨는 피곤하지 않고. 옷은 잘못했으니. 이참에 아가씨 드레스를 몇 벌 맞추고 가죠.”

등 뒤로 불안감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달큼히 웃는 저 남자의 기준에 ‘몇 벌’이 어느 정도인지 이미 옷장 안의 드레스를 보고 확인한 터였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항변을 하기도 전에 에드윈은 마부석을 두드렸다.


“러헤이른 거리로 가지.”

“예!”

활기찬 마부의 대답이 이어졌다. 에드윈이 화사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소벨이 아가씨 옆방에 새로 드레스 룸을 꾸미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잘되었네요.”

어이없다는 듯 에드윈을 바라보던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나는 되게 좋은 것만 고를 건데요?”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건데요?”

올리비아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다는 듯 능청을 떨어 주는 저 남자 옆에만 있으면 비수 같은 날카로운 시선도, 독한 말들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물렁히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 거다. 제가 오늘 콘라드를 마주하고도 속이 상하지 않은 것은.

어느덧 피곤이 날아간 기분이었다. 올리비아는 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온전히 즐기며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