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일 년간의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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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일 년간의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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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일 년간의 유예
2022.06.15.
웅장하고 화려한 황제 궁의 집무실 앞.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투과된 햇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 올리비아는 커다란 문을 지키듯 선 황제 궁의 시종장을 마주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중요한 정무 중이십니다.”
벌써 세 번째. 시종장은 감정 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 중이었다.
중요한 정무라니. 사전에 시간을 다 조율한 뒤 방문했는데도 불구하고 저 두꺼운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핑계를 대며 알현을 미루기.
올리비아가 보기에도 빤한 수였다. 더불어 자주 겪어 본 일이기도 했다.
레오포드와 황녀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줄 알았는데.
“……폐하께 다시 확인해 보게. 약속하신 대로 비칸데르 대공이 소원을 말씀드리러 왔다고.”
결국 잡아먹을 듯 냉혹한 목소리가 깔렸다.
에드윈의 뒤에 있던 올리비아조차 조금 놀랄 정도의 목소리에 노련한 시종장의 무표정에 균열이 갔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결국 시종장이 굳건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을 겁박하던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계속 서 있어서 다리 아프지 않아요?”
“그 계속이 고작 오 분 정도였는데요?”
“그래도요. 굽 있는 구두는 제법 발이 아플 텐데.”
“익숙해져서 괜찮,”
부드럽게 대답을 이어 가던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리비아의 드레스 끝자락을 바라보던 에드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굽 있는 구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모양이에요. 전하.”
놀릴 목적이었는데 입 밖으로 나간 목소리가 제법 심술궂었다. 에드윈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이내 가늘게 휘어졌다.
“그냥 딱 봐도 불편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왜 다시 나를 전하라 부르는 걸까요?”
“……황궁이니까요.”
“황궁이라. 그래서요?”
“아무래도 바깥에서 함부로 전하의 이름을 부르기는 어려워서.”
에드윈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올리비아의 대답은 궁색해졌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하지만 집요한 눈이 계속 올리비아를 마주했을 때.
“큼큼.”
의도적인 헛기침이 끼어들었다.
윈스터였다. 커다랗게 헛기침을 할 때는 언제고 윈스터는 에드윈의 시선을 피했다. 저 강렬한 눈과 마주쳤다가는 대공저를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대공저도 아닌 황궁, 그것도 황제 궁의 집무실 앞이었다. 윈스터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참아 가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 틈에 올리비아는 에드윈으로부터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와…… 이러기예요?”
“뭐가요?”
잔뜩 골이 난 것처럼 구는 표정이 재밌었다. 올리비아가 모른 척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대공이 다시 무어라 대꾸하려 할 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폐하께서 아직 중요한 정무를 보고 계십니다. 오늘은 어려울 듯싶은데 다른 날 다시 알현을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시종장은 황제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던 대공이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처럼 시뻘건 눈은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듯 문을 바라보았다.
꼭 문을 부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시종장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장 단단한 광물인 카르빈으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아무리 살육귀라 불리는 대공일지라도 마법사의 보호 강화 마법까지 걸려 있는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본능은 계속해서 불길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때였다.
“그러면 다음에 올까요?”
에드윈이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올리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드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조금 피곤하던 참이었거든요.”
올리비아가 힐끗 문가를 바라보았다. 이 황궁에 다시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아까 레오포드를 마주 보며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그럼 갈까요?”
용무 따위는 끝났다는 듯 에드윈이 성급히 걸음을 옮겼다. 척하면 척이라는 듯 이미 윈스터는 마차를 준비하기 위해 저만치 멀어졌다.
올리비아와 에드윈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후원의 호수가 호젓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 멀리에서 한 무리의 귀족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귀족들이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저런 시선이야 별거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귀족들 사이에서 차가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콘라드만 아니었더라도.
콘라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올리비아는 저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표정을 굳혔다.
지금 저런 표정을 지어야 할 건 다름 아닌 저였다. 함부로 집을 나가는 걸로 모자라 추문으로 얽힌 대공과 함께 있다니.
동시에 주변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왜 저 둘이 같이 있는 거야?”
“정말 대공과 혼인을 하려나 봐.”
“그러면 태자 전하는?”
“별수 있어? 막내 공녀 있잖아.”
한낮 가십처럼 마델레이네가 오르내렸다. 콘라드는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는 명확했다. 지금 공작저는 엉망이었다.
에셀라는 올리비아가 보고 싶다고 풀이 죽어 있다 결국 근신을 받아 방에만 있게 되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제이드는 이상한 말이나 늘어놓았다. 그 또한 올리비아에 대한 거였다.
그러니까. 이게 다 올리비아가 공작저를 나가서 생긴 일이었다.
하던 대로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훌쩍 대공저로 가더니 대공과 혼인을 하려 한다.
그렇다면 에셀라는.
머릿속이 차게 식는 생각에 콘라드는 올리비아를 부르기 위해 입을 떼었다.
“올,”
“피곤하다고 했죠.”
근사한 목소리가 콘라드의 말을 뭉개 버렸다. 대공은 부드럽게 올리비아의 손을 제 팔 위에 얹었다.
“이 정도면 마차가 도착했겠죠?”
“……그렇겠죠?”
올리비아는 겨우 대답을 했다. 공작도, 제이드도 다 상대해 놓고 콘라드는 고작 보는 것만으로 놀랐다.
아마 끝을 맺지 못해서일 것이다.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조차 그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콘라드의 마지막은 저를 미워하듯 바라보던 공작저의 마지막 밤이라서. 손끝이 조금 떨렸다.
에드윈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올리비아를 에스코트했다. 그는 콘라드와 제 사이에 벽처럼 단단히 서 있었다.
그 배려가, 안정감이 기꺼웠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멎었다.
* * *
“대공이 물러갔습니다. 폐하.”
시종장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시종장은 황제가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을 읽고 집무실을 나섰다.
황제는 창밖을 노려보았다. 비칸데르가의 문양이 찍힌 검은 마차가 황궁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저놈을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황녀에게 백수정 광산을 넘긴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토록 탐내던 백수정 광산이라면 훌륭한 미끼였다.
심지어 맹세를 하기 위해 가져온 검이 보검 아이라루텐이었다.
당연히 황녀에게 맹세를 바칠 거라 생각했다. 그 속단에 황제의 이름을 건 소원까지 하사했다.
그런데 감히 그 소원으로 마델레이네 공녀와의 혼인을 바라다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녀에게 맹세를 바치지 않은 것을 떠나 태자의 약혼녀인 공녀에게 청혼을 한 것 자체도 문제였다.
황제파의 수장인 마델레이네 공작가는 태자의 기반을 닦기에 가장 좋은 혼처였다. 첫째 공녀가 안 된다면 둘째 공녀라도.
“……마델레이네의 혈통입니다. 저 아이를 태자비로 받아 주신다면 마델레이네의 충성은 앞으로도 굳건히 폐하를 따를 것입니다.”
십사 년 전, 기억 속에 파묻혔던 공작의 말이 넘실넘실 떠올랐다.
황제는 공작의 적녀인 에셀라 마델레이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계속 미적거리던 공작은 어느 날 그보다 조금 더 큰 여자아이를 첫째 공녀랍시고 데려왔다.
이미 사교계에 공작이 사생아를 데려왔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아무리 공작의 충성을 가질 수 있다지만 출생이 탐탁지 않았음에도 결국 받아들였다.
황제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기시감을 느끼게 하던 초록색 눈이 잠시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공작가의 충성스러움, 그리고 자신을 흡족하게 만들던 개. 이 중요한 것을 빼앗기게 생겼다. 늘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개, 비칸데르 대공에게.
“……주인에게 이를 보이는 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황제의 새파란 눈이 번뜩였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문밖에서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제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황후가 들어왔다. 황제의 찌푸린 얼굴을 본 황후가 소녀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폐하. 무슨 심려라도 있으십니까? 훤칠한 얼굴을 그리하시면 되겠습니까.”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함께 황후가 황제의 곁에 바짝 다가왔다. 달콤한 향유 향기와 함께 보드라운 손이 스스럼없이 황제의 미간을 눌렀다.
적당한 압에 황제의 미간이 조금씩 풀렸다. 황제가 느리게 말했다.
“……대공이 왔었소. 그것도 공녀와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며.”
“참. 주제를 모르는군요.”
“그렇지. 하지만 내 이름을 건 소원이잖소. 안 들어주기에는 난감하고 들어주자니 마델레이네와의 관계가 염려되고.”
“예법대로 행하심이 어떠하세요. 폐하?”
황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황제가 눈을 번쩍 떴다.
“예법?”
황후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폐하. 고서에 따르면 황가와의 혼인 관계에 있던 여인은 그 후계의 출신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일 년간은 타 귀족과 연을 맺을 수 없지 않습니까.”
황후가 조곤조곤 말했다. 꽃같이 화려한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그러니 혼인을 전제로 하되 일 년간의 유예를 달아 주세요. 고서를 좋아하는 공녀라면 그 정도야 수긍하지 않겠어요.”
황제는 으음, 하며 신음을 삼켰다. 대공의 맹세를 받을 때 공녀가 고서의 예법을 운운하던 게 번뜩 떠올랐다. 그제야 황제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황후. 그대는 어찌 이리 좋은 생각을 했어.”
“다 폐하의 은덕 덕분 아니겠습니까.”
황후가 애교 있게 웃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 년간의 유예.
그 시간이라면 분명 좋은 수가 떠오를 것이었다. 다시 첫째 공녀를 원위치로 되돌리든, 둘째 공녀를 태자비로 맞이하든.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공녀를 원위치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대공이 공녀에게 진심 같아 보이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행복을 빼앗긴다는 게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지 절실히 느끼게 될 테니까.
선대 대공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가 선뜩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황후가 나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황후.”
“공녀도 대공의 청혼에 동의했습니까?”
황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대공이 알현을 청한다는 말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지적이었다.
“공녀가 태자를 그리 좋아했는데. 만약 대공의 억지 때문에 약혼이 무산된다면 너무 가엾지 않겠습니까.”
단 한 번도 올리비아를 가여워한 적 없는 황후가 처연한 얼굴을 했다. 황제가 낮게 웃으며 황후를 칭찬했다.
“황후처럼 영리한 이가 내 곁에 있다니.”
“과찬이십니다. 폐하.”
대공을 공격하기 좋은 조건이 두 가지나 갖춰졌다. 공녀가 태자를 지극히 생각한다는 건 황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공녀만 싫은 티를 내 준다면 제 고민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황후는 오만에 젖어 웃는 황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고작 제 개조차 휘어잡지 못해 이리 전전긍긍하다니. 황제답지 않은 면모였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이 제국의 미래가 될 제 자식들은 저를 닮았으니.
올리비아를 수족처럼 부리는 황녀와 늘 올리비아의 정성 어린 사랑을 받는 태자.
황후의 얼굴 위로 자랑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정작 제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모르는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