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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약혼을 깨기 위한 인사 (30/151)


#030. 약혼을 깨기 위한 인사
2022.06.12.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레오포드가 너른 어깨를 으쓱였다. 분노로 빈정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사뭇 여유로운 태도였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솔직이라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거 말고.”

레오포드가 잘 관리된 금발을 뒤로 넘겼다. 잘생긴 입매가 비틀리듯 위로 올라갔다.


“내가 마리아와 함께 있는 걸 봐서 질투가 나서 이러는 거잖아.”

특유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순간, 올리비아는 온몸이 떨렸다. 손끝을 마주 잡지 않는다면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추태를 보일 것만 같았다.

레오포드가 알고 있었다. 제가 그날 티아제 궁을 나선 이유를.


“……그럼에도 제게 말씀하실 게 그게 다이신가요?”

최소한.

저에 대한 예의는 지켜 줘야 했다. 아무리 마리아 에텔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도. 저를 내버려 둔 채 마리아 에텔을 파트너로 동행해도.

약혼 관계였다. 모든 게 깨 부서진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줬으면 했다.

하지만 레오포드는 늘 그랬듯 가장 지독한 방법으로 올리비아에 대한 예의를 무시했다.


“내가 다시 데이트를 신청한다면 대공과는 더 이상 보지 않을 거지. 올리비아?”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 안에 든 고압적인 내용이 이제는 확연히 보였다.

레오포드는 단 한 번도 저를 사랑한 적 없다. 제가 사랑했던 찬란한 남자는 단 한 순간도 저를 약혼자로서 동등히 바라봐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올리비아의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이건 분노일까 슬픔일까.

헤아릴 수 없는 참담함에 올리비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듯 레오포드가 낮게 웃었다.


“그래. 올리비아. 그렇게 내 말을 들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

“…….”

“그리고 약혼을 깬다니. 정말 비칸데르 대공의 말을 믿은 건 아니겠지? 올리비아. 열아홉이나 먹고 그렇게 순진해서 어쩔까.”

“……스물이에요. 전하.”

“그래? 그대가 벌써 스물이었나?”

올리비아의 정정에도 레오포드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짜랑하게 들려오는 고운 웃음소리에 한참 떨어져 있던 소프론 남작 부인까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목을 빼서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공녀의 뒷모습이 보일 뿐 공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공녀가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건 처음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소프론 남작 부인은 그 이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태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도 레오포드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웃음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제가 몇 살인지도 헷갈리는 남자라니.

정작 저는 레오포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제 나이조차 모르는 남자를 위해 그토록 온 마음을 다 바쳤다.

아홉 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대공의 청혼을 받을 때까지. 아니 어쩌면 마음이 울렁이던 조금 전까지도.

하지만 이제 올리비아는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휘몰아친 감정들이 타올라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느리게 웃음을 멈췄다. 한결 서늘해진 미소가 올리비아의 입매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변화조차 모르는 레오포드는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웃는 건 예의가 아니지. 공녀.”

“전하께서는 재밌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지?”

레오포드가 흥미 없다는 듯 적당히 대꾸했다.

이 정도로 다정히 마음을 풀어 주었으면 만족해야 할 텐데, 올리비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말을 붙였다.

레오포드는 몇 마디 정도 건성으로 답변하고 이제 정말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웃음기 번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졌다.


“제 궁에 제 허락 없이 에텔 영애를 들이셔서 제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신 건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뭐?”

레오포드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으며 찻잔을 잠시 들어 입술을 적셨다.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한 행동거지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마주쳤을 때, 초연한 초록색 눈을 보는 순간 레오포드의 오만한 자존심에 금이 갔다.

하. 레오포드의 입에서 시린 비웃음이 나왔다.


“지금 나를 탓하는 건가. 공녀?”

레오포드가 서늘하게 말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탓하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면 더더욱.

올리비아가 덤덤히 말했다.


“솔직한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후. 그만하고 오늘은 돌아가지. 더 이상 그대의 앙탈을 봐주고 싶지 않을 것 같군. 경솔한 행동도 삼가도록 해. 정말로 약혼을 깨고 싶은 게 아니라면.”

레오포드가 잇새로 짓이기듯 말했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것이다. 질투에 휩싸여 대공과 무슨 꿍꿍이를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비아가 얼마나 약혼 관계에 집착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데이트고 뭐고 앞으로 올리비아가 반성하기 전까지는 수요일의 약속조차 무시해야겠다며 레오포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때였다.


“말씀하신 대로 전하께서는 저와의 약혼을 깨시게 될 겁니다.”

끝까지 가 보자는 걸까.

레오포드는 담담한 올리비아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코웃음 쳤다.


“누구 마음대로.”

“전하의 마음과 저의 뜻대로요.”

“그게 무슨 형편없는 소리지?”

“전하께서는 황후로 올리고픈 분이 따로 계시잖아요.”

떠보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의중을 파악하듯 파란 눈동자가 꿰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확신을 주기 위해 올리비아는 느리게 말했다.


“주제 파악을 잘해요. 제가. 아시잖아요.”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지나갔다. 레오포드의 목소리였다.


“공녀가 주제 파악을 잘해. 절대로 그대에게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질투의 정도를 넘었군, 공녀. 엿듣기라도 한 거야?”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을 보고 올리비아는 가늘게 웃었다.

정말로 저를 위한 배려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어서. 그래서 올리비아는 사실을 적시했다.


“엿들었다기보다는 전하께서 저와의 약속을 잊고 그 시간에 제가 기다리는 이 태자비 궁의 정원에서 밀회를 가지신 거죠.”

“공녀!”

번뜩이는 살기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훌륭한 기사라더니. 이런 식으로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기세였지만 올리비아는 최선을 다해 몸을 꼿꼿이 했다.

그게 바로 제가 지키고 싶었던 긍지였고, 제가 마지막으로 보이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벅이는 발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마지막 인사는 끝난 건가요. 아가씨?”

단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느새 숨이 편하게 쉬어졌다. 레오포드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비칸데르 대공.”

올리비아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대비되듯 흰 얼굴이 부드럽게 웃으며 올리비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 선을 부각하는 검은 제복 차림의 그는 모든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위험해 보였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너무 무탈해 보이십니다. 전하.”

“이게 무슨 무례지?”

레오포드가 비뚜름하게 한쪽 입술을 올렸다. 올리비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께 약혼을 깨자는 말씀을 드린 뒤 함께 폐하께 갈 예정이거든요.”

올리비아의 대답에도 레오포드는 성마른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감히 대공이 태자비 궁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제가 정식으로 초대했습니다. 제게 허락된 궁이었잖아요. 전하.”

올리비아는 잠시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올리비아를 응시했다.

가라앉은 새파란 눈동자 아래 무엇이 소용돌이치는지 올리비아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누군가의 눈치를 봐 왔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벗어던질 차례였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 몫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제 것이.”

“올리비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게 주어진 권한을 사용해 보았답니다. 퍽 꿈같은 시간을 마무리하기에는 좋은 선택이었죠.”

올리비아는 새삼스럽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다못해 저 궁을 지탱하는 유리창 하나하나 다 올리비아가 살핀 것이었다.

레오포드가 봐 주길 바랐던 모든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더 심혈을 기울여 가꿨던 제 궁.

궁의 모든 것을 눈에 담은 올리비아는 제 궁과 작별할 준비를 마쳤다.

올리비아는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다는 듯 그녀가 향한 곳은 에드윈의 옆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올리비아는 곁눈질로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화가 날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레오포드에게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그저, 주제 파악을 잘하는 약혼녀에 불과했으니까.


“……아.”

이제 생각이 났다는 듯 올리비아가 빙그르르 돌아섰다. 한순간 레오포드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희미한 고양감이 스쳐 지나갈 때였다.

올리비아가 레오포드를 향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제국의 작은 태양께 경배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곧 비칸데르 대공비로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부디.”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예법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부정이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노려보는 레오포드의 얼굴을 보자 지난 모든 순간들의 제가 떠올랐다.

아홉 살, 햇살 같은 그에게 처음 반했던 제가.

열네 살, 첫 원정을 떠나던 그에게 건네지지 못한 크라바트를 쥔 채 애써 웃던 제가.

열여덟 살, 데뷔탕트의 첫 춤은 당연히 그와 함께할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 무참히 꺾였던 제가.

그리고 스무 살,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이곳에서 다른 이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던 약혼자를 보던,

모든 순간의 가엾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사랑을 갈구하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이제야 겨우 레오포드 프란츠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무탈하시길.”

올리비아가 뒤돌아섰다. 레오포드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자에게 예를 갖추듯 묵례를 한 에드윈이 팔을 내밀었다.


 
올리비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누군가를 뒤에 놓고 걸음을 옮기는 게 생경했다.

이미 공작을, 제이드를 두고 걸어 봤지만 이 묘하게 싱숭생숭한 기분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될 것 같았다.

문득 제 뒷모습은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애정을 갈구했던 생각이 나서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누군가를 뒤에 두고 간다는 건 원래 이렇게 이상한 기분일까요?”

“……어떤데요?”

“내 뒷모습은 어떨까, 이런 쓸데없는 게 궁금해지는 기분이요.”

올리비아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서 다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가 의아하다는 듯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수려한 눈매 끝에 달큼한 웃음을 머금었을 때, 에드윈이 나직이 웃었다.


“내가 봤는데.”

에드윈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자가 보였다.

조금 전 기사로서의 도의도 잊은 채 살기를 뿜어내던 멍청한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그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폈던 작은 어깨가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겠다는 당당한 의지.

굳세게 먹은 마음가짐을 드러내는 자세.

에드윈은 다시 제 팔을 잡은 가냘픈 손을 바라보았다.

얕게 떨리는 이 감각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 오던 이 작은 아가씨의 시선은 누구보다 곧았다.


“……무척이나 멋져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흰 뺨 위로 봄꽃처럼 붉은 기운이 느리게 퍼져 나갔다.

올리비아는 에드윈의 시선을 피했다. 문득 바라본 곳에 소프론 남작 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얼굴이었다.


“잠시만요.”

양해를 구한 올리비아가 소프론 남작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소프론 남작 부인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공, 녀님. 그러면.”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올리비아는 낮게 웃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인.”

소프론 남작 부인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에텔 영애가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티아제 궁의 주인은 결국 이 우아한 공녀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도 티아제 궁을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까지도 궁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이 공녀가 궁을 차지할 줄 알았는데.

부인은 저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누군들 이렇게 궁에 애정을 보일 수 있을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까 궁을 구석구석 살핀 것이 시간을 때운 게 아니었다.

방해하지 말걸.

되돌릴 수 없는 후회가 다시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공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뒤돌지 않는 뒷모습이 단호했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우아한 모습이 점처럼 멀어졌을 때 소프론 남작 부인은 자신의 마음에 생기는 감정이 안타까움인지 아쉬움인지 구태여 분간하지 않았다.

그저 이 티아제 궁에 가장 잘 어울렸던 주인이 떠났구나, 하는 허전함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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