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9. 부를 때마다 행복해지는 이름 (29/151)


#029. 부를 때마다 행복해지는 이름
2022.06.08.


올리비아는 웅장한 대공저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제이드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올리비아는 그대로 걸었다. 정원의 초입, 마차 앞에는 대공이 서 있었다.

계속해서 문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대공과 금방 눈이 마주쳤다. 짙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금세 사라졌다. 대공이 눈을 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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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내쫓고 왔어요?”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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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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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쫓기 버겁지는 않았어요?”

참 중의적인 말을 잘 쓴다. 힘에 부치지 않았냐는 뜻인지 아니면 마음이 힘들지 않았냐는 뜻인지.

탐색하듯 저를 바라보면서도 눈빛은 걱정스러웠다. 마치 며칠 전 앓아누웠을 때처럼 어딘가 아픈 환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올리비아는 일부러 가볍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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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확실히 아니에요.”

쥐고 있던 서류 봉투가 잔뜩 구겨질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했다.

그 이유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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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족이 생길 것 같거든요.”

 
가족.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장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저는 정말로 대공과 혼인을 하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무겁게만 생각되었던 단어가 어쩐지 간지러웠다. 올리비아는 힐끗 대공을 바라보았다. 저를 보고 있는 눈이 가늘게 접혀 휘어졌다.

저 다정한 시선을 느끼면서 올리비아는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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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드윈.”

선선한 밤공기 위로 봄빛처럼 고운 목소리가 퍼졌다 사라졌다. 이름마저도 길쭉하고 단단한 저 남자를 닮았다.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대공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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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처음이야 어색했지 그다음은 쉬웠다. 심지어 끝 글자를 발음할 때 입 끝이 올라가는 것도 좋았다. 늘 기쁨만 가득한 이름처럼 저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자신도 웃게 되는 모양새였다.

올리비아는 이 신기한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 다시 옆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드윈은 없었다.

뭐지?

뒤돌아본 올리비아는 저보다 세 걸음 뒤에 있는 에드윈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걷던 중에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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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세요. 에드윈?”

에드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몽롱하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에드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에드윈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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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진짜 불러 줄 줄은 몰라서.”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띄엄띄엄 하는 말을 유추한 올리비아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에드윈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제가 더 창피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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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냥, 전하께서 이름 부르라고 그러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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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계속 이름 불러 줘요. 그게 더 듣기 좋으니까.”

눈도 못 마주치면서 말은 잘한다. 하지만 당황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건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걸까.

올리비아는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뺨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미지근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아니, 심장을 간질이는 걸지도 몰랐다.

올리비아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 옆으로 에드윈이 따라 걸었다. 길어진 그림자 두 개가 짠 것처럼 엉성하게 걷는 게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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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길 걸어가시게요?”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큰 마차를 까먹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커다란 갈색 말이 순한 눈을 껌뻑이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마부석에 앉은 마부는 의아한 얼굴로 정원을 쭉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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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로 가도 10분이 넘게 들어가야 하는데. 저 먼저 들어갑니까?”

마부가 눈치 없이 쾌활하게 물었다. 얼굴이 다시 붉어질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냉큼 마차를 향해 뛰어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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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타고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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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겠어요? 전하께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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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걸어가려고. 날이 더워서.”

에드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느리게 마차로 와서 문만 닫아 줄 뿐이었다.

마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답을 알아낸 것처럼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훌륭한 기사는 평소부터 체력 단련을 하시는 모양이야.

마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에드윈을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고삐를 흔들었다. 커다란 눈을 껌뻑이던 말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올리비아는 창문에 바짝 붙었다. 대공의 얼굴이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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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계속 빨간지 궁금했는데.

올리비아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제게 등을 지고 섰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등만 바라보다가 올리비아는 마차에 바로 앉았다.

어차피 나중에도 계속 보게 될 얼굴이었다. 올리비아는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시작했다. 에드윈의 얼굴이 붉어지더라도 저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게.

에드윈, 에드윈.

정말 좋은 이름이다. 부를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서.

올리비아는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제이드에 대한 생각도 소리 없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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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차를 바라보는 에드윈은 다시 한번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이 홧홧하게 뜨거웠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손바닥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에드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좋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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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아 보였겠지.”

고요한 밤, 풀벌레 우는 소리 위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직하게 떨어졌다. 그 한숨의 끝에 달콤한 고민이 묻어 있다는 건 그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 * *

한편 늦은 밤의 황궁.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느리게 티아제 궁의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느슨히 셔츠의 윗단추를 푼 레오포드는 팔짱을 낀 채 마차에 기대듯 앉았다.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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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하께서는 몸은 저와 함께 계시지만 마음은 딴 곳에 계신 것 같아요.”

 
울먹이던 마리아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레오포드는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오늘 데이트는 엉망이었다. 마리아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올리비아.

새파란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앞에 있던 부관인 베르탱 하지스 백작이 움찔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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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잘 전달했겠지.”

늦은 저녁에야 방문할 테니 기다리라는 말.

하지스 백작이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보는 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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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그렇게 빌빌거리지 말고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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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그래도 요즘 공녀의 태도가 심상찮은데 꽃이라도 준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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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레오포드가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 그놈의 꽃은. 처음으로 커피 하우스에서 데이트를 하던 날 올리비아도 꽃 이야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하지스 백작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쯔, 레오포드는 혀를 찼다.

요즘 들어 올리비아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마리아와의 데이트에서 올리비아를 계속 떠올린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대공한테 기사의 맹세를 받은 것도 모자라 첫 춤을 허락하더니, 이제는 청혼을 받고도 거절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공저에 머물면서 제 부름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분명 대공이 올리비아한테 같잖은 수라도 쓴 게 틀림없었다.

오늘 만난다면 아예 티아제 궁에 기거를 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슬퍼하겠지만 올리비아가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쩐지 답답한 마음에 레오포드는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그리고 짙은 숨을 뱉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당연히 올리비아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

늘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선 한번 받겠다고 귀찮게 하는 사람. 올리비아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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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시 말해 봐.”

레오포드가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위협처럼 목을 긁고 나오는 목소리에 소프론 남작 부인은 달달 떨리는 손을 꼭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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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공녀는 귀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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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올리비아가 귀가를?

저를 보기 위해 황태자궁으로도 마음대로 들이닥치던 여자였다. 그런 올리비아가 자신을 보지도 않은 채 돌아갔다니. 이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레오포드는 날 선 눈으로 소프론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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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지? 공녀한테 정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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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것이.”

남작 부인이 잠시 레오포드의 눈치를 보았다. 레오포드는 화를 삼키며 애써 구슬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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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보게. 부인. 올리비아에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걸 파악하는 게 부인의 몫이 아닌가.”

대공이 청혼을 했다고 지금 제 주제를 모르고 기고만장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레오포드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는 사이, 소프론 남작 부인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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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주 수요일을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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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

레오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일 따위는 없었다. 올리비아가 새벽부터 티아제 궁에 왔었다는 것, 그뿐이었는데.

순간 레오포드의 좋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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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나와 마리아를 본 모양이군.”

남작 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황망하다는 얼굴을 보며 레오포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듯 몸을 길게 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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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겨우 그런 일 가지고 오늘 먼저 가 버린 건가? 대공에게 청혼을 받질 않나, 이제는 아프다고 오지도 않더니. 또 이렇게 내가 직접 마음을 풀어 주길 바라는 거잖아.”

이제야 답을 알아냈다는 듯 레오포드의 목소리에 여유가 묻어났다. 올리비아를 책망하는 레오포드의 언사에 소프론 남작 부인의 머릿속에는 경고등이 울리듯 불안한 생각들이 올라왔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가 태자의 약혼녀로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봐 왔다. 늘 침착하고 단정한 공녀는 수요일 공식적인 만남이 있는 날이면 그 나이 또래처럼 들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수요일은 달랐다.

사람이 무너진다는 게 저런 것임을 그날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공녀는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대공과 마차를 타고 떠났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태자한테 제가 본 것을 전하고 싶었다. 이전과는 다를 거라고.

하지만 레오포드는 낮게 웃을 뿐 소프론 남작 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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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한테 편지를 보내. 이번 수요일의 약속은 내일로 당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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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레오포드는 별문제 없다는 듯 굴었다. 오히려 옆에 서 있던 소프론 남작 부인이 더 조마조마할 정도로 말이다.

* * *

한낮의 티아제 궁.

올리비아는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눈을 감아도 궁의 복도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서편 복도의 탁자에는 수선화를 놓았고, 동편 복도의 협탁 위에는 푸른 수국을 꽂아 두었다는 세세한 정보까지 떠올랐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 생각하니 모든 게 아쉬웠다.

레오포드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올리비아가 후원으로 가지 않자 옆에 있던 소프론 남작 부인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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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전하께서 오시려면 한참 남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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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요. 공녀님.”

지금 소프론 남작 부인이 걱정하는 게 꼭 시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모른 척했다.

오늘도 저와 함께 입궁해 이 궁의 후원을 자유로이 다니고 있을 에드윈이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를 걷고 있을까.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정원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제가 레오포드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올리비아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을 한참 넘긴 테이블 위에는 다 식어가는 티 포트와 주인을 외로이 기다리는 찻잔 두 개가 자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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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죠.”

올리비아의 말이 반가운 듯 소프론 남작 부인이 한숨 돌린 얼굴을 했다.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었다니. 십여 년 만에 알게 된 사실에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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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오시면 물러나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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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프론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물러났다.

목련이 양각되어 있는 찻잔의 홍차는 다 식은 지 오래였다.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제 잔 속 식은 홍차를 바라보다가 따르지도 않은 건너편의 빈 잔을 응시했다.

몰랐는데 기다리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만들다니, 참.

설핏 시린 웃음이 입가에 그려지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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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작은 태양께 영광을.”

줄줄이 이어지는 인사 소리에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훤칠한 키에 걸맞은 큰 보폭으로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수려한 얼굴이 올리비아를 보고 오만하게 웃었다.

레오포드.

오늘로 파혼을 하게 될 제 약혼자.

올리비아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말아 쥐며 예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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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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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리 예를 갖춰. 어제 먼저 간 게 미안해서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올리비아의 말을 자른 레오포드는 언짢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어제 일을 끄집어내는 레오포드의 안중에 본인이 오늘 약속 시간을 한참 어긴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시녀들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아차, 하는 눈빛의 시녀들이 금세 자리를 물렀다. 이제 이 정원에는 저와 레오포드 단둘이었다.

티 포트를 들어 빈 잔을 채웠지만 레오포드는 잔만 힐끗 바라볼 뿐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꼈다. 사납게 치켜뜬 눈매 속 새파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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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을 깨기 전에 마지막으로 뵈러 왔어요.”

하하하.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포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스레 터진 웃음이며 환하게 미소를 띤 얼굴은 뭇사람들의 심장을 흔들 만큼 잘생겼지만, 새파란 눈동자는 분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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