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거래와 부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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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거래와 부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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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거래와 부탁 사이
2022.05.29.
헐떡이며 달려온 시녀의 뒤로 다른 시녀도 보였다. 앳된 시녀의 옷에는 황녀 궁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미 태자 전하와 먼저 선약을 잡았으니 황녀 전하께는 추후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올리비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움찔한 시녀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 그게.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태자 전하께도 미리 양해를 구하셨다고 합니다.”
올리비아가 희게 웃었다.
황녀가 이런 식으로 올리비아를 물 먹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에 레오포드가 있다더라, 하는 식으로 하루 종일 올리비아를 궁 내에서 뱅뱅 돌게 한 적도 있었다.
“확인해 보죠.”
짧게 대꾸한 올리비아가 소프론 남작 부인을 불렀다.
적당히 속일 수 있는 어린 시녀가 아닌 작위가 있는 부인이 간다면 명쾌히 알 수 있을 테다.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 옆에서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갔던 부인이 가져온 답은 레오포드가 아침 일찍 궁을 나섰다는 것이었다.
“늦게 돌아올 수 있으니 저녁 식사는 미리 하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은 레오포드의 말을 옮기면서 올리비아의 눈치를 봤다.
당연하게 기다릴 것을 전제한 말에 올리비아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시린 웃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급히 오라는 편지를 보내 놓고 레오포드는 저와의 약속을 또 어겼다. 또한 약속도 하지 않은 황녀는 제 일정 따위는 아랑곳 않고 저를 불렀다.
하필 오늘 함께 온 대공 앞에서 이 모든 게 들통났다.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조금 전의 들뜬 기분이 바닥을 쳤다. 옆에서 대공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도도히 턱 끝을 올렸다.
별거 아니라는 듯 생긋 웃어 보였다. 가면을 쓰는 건 올리비아가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네요. 편히 보고 계세요.”
“아가씨.”
걸음을 옮기려던 올리비아가 대공을 돌아보았다. 대공은 유려한 몸짓으로 올리비아의 앞으로 걸어왔다.
선 채 정면으로 마주하니 새삼스럽게도 정말 훤칠하게 큰 남자였다. 남자는 자연스레 올리비아한테 손을 내밀었다.
“설마 지금 마차까지 에스코트라도 해 주시게요?”
올리비아가 조용히 웃었다. 눈을 맞추던 대공이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느리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 위로 스치듯 지나가는 부드러운 입술에 올리비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누군가 어머,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지만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대공은 끈질기게 올리비아와 시선을 맞췄다. 짙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마치 사람을 홀릴 것처럼 요요히 빛났다.
“……알겠지만 나는 언제나 승리만 쟁취했습니다.”
대공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수수께끼처럼 묘한 느낌을 주는 눈이 순간 도발적으로 반짝이며 올리비아를 향했다.
“그러니 내 아가씨께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리고 대공이 올리비아의 손에서 제 손을 떼었을 때 올리비아는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누구보다 우아하게 걷는 올리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대공은 직감했다.
제 바람 같은 말이 아가씨한테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 * *
마차에서 내린 올리비아는 황녀궁의 후원을 걸었다.
만개한 장미 후원. 차양으로 따사로운 햇빛을 가린 아래 황녀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찻잔도 하나, 다과 접시도 하나, 심지어 의자조차 황녀가 앉은 의자뿐이었다. 시종조차 가까이 있지 않았다.
손님 대접 따위는 없다는 명확한 의사에 올리비아는 서늘한 눈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의 기척을 느낀 황녀가 고개를 들고 화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공녀. 상당히 늦었군요.”
휘어진 입꼬리와 달리 새파란 바다 빛 눈은 독기를 가득 품은 채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호흡을 하며 황녀의 앞으로 향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시녀를 보낸 지 제법 되었는데. 공녀가 오지 않기에 서운할 뻔했습니다.”
황녀는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가리켰다.
“아차. 안 오는 줄 알고 잔을 치웠네요. 장미 차 괜찮나요?”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황녀의 눈에 조롱이 가득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복합적인 감정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평안했다.
올리비아가 부드럽게 웃자 황녀가 순간 사납게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웃다니. 겨우 반쪽짜리 주제에 제 앞에서 아량 넓은 체를 하다니.
씨근덕대던 숨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저를 보고 웃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바라보자 풀리지 않은 분노가 세차게 올라왔다.
둘째 공녀가 다 무너진 얼굴로 저택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올리비아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 천한 반쪽짜리가 얼굴을 제대로 못 들고 다니겠구나. 이제야 꾹꾹 기를 눌렀구나.
레이나는 속 시원한 마음으로 소문을 즐겼었다.
행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진 올리비아의 소문이 난잡해질수록 레이나는 더 기껍게 그 소문을 퍼트렸다.
도망가 봤자 어쩌겠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결국 빌면서 황녀인 제게 용서를 구하러 돌아올 것이었다.
맡길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채 레이나는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을 고대하며 아름답게 스스로를 치장했다.
그리고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 연회장으로 발걸음 가볍게 가던 차에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뭐? 대공이 공녀한테 청혼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인 아버지는 저를 달래며 결국 대공이 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했다.
“황녀는 소중한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지엄한 황제의 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레이나는 황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늘 저를 보고 세상에 다시 없을 보배라고 말하던 황제였다. 그러니 감히 어떤 남자가 저를 거부할까 싶었다.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연회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파다하게 번진 이야기에 황녀는 수치심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청혼을 받으러 가듯 아름답게 꾸민 제 모습이 우스웠다.
그 천한 게 얼마나 저를 우습게 봤기에.
이를 악문 황녀는 올리비아를 당장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아프다는 의례적인 핑계를 대고서 이제야 찾아왔다.
황녀는 제 앞에 선 올리비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참으려 해도 저 초연한 얼굴을 보니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황녀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성급하게 장미 차를 마셨다. 식은 차향이 엉망이었다.
시녀한테 화를 내려는 찰나 올리비아가 고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전하. 어차피 궁 안에서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안이라. 공녀는 말을 참 재밌게 하네요.”
황녀가 불쾌하다는 듯 낮게 말했다.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듯 황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가 지금 이곳에 앉아 있고 싶은데 감히 나보고 자리를 옮기라는 말인가요?”
“저야 괜찮은데 황녀 전하께 누가 될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뭐? 내게 누?”
하. 같잖아서.
황녀가 코웃음을 쳤다. 새파란 눈 위로 파도치듯 노여움이 넘실댔다. 황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공녀. 계속 그렇게 말장난을 할 건가?”
“트리스탄 곡창 지대.”
올리비아가 조용히 말한 그곳은 황녀 레이나 프란츠의 재산 중 두 번째로 풍요롭고 비옥한 영지였다. 동시에 올리비아한테 일을 맡겼던 영지 중 하나였다.
순간 황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올리비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리테일 영지.”
춘궁기에 빠졌던 황녀의 영지였다. 올리비아가 아무도 몰래 복구한 곳이기도 했다.
”르칼르의 목걸이.“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왕국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목걸이였다. 엘프의 후예가 행운을 불어넣었다는 이 목걸이를 차지하겠다고 황녀는 재산 중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미네르 영토를 날릴 뻔했다.
그것을 수습한 사람도 당연히 올리비아였다.
“백수정 광,”
“공, 공녀!!”
황녀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황녀의 고함에 멀찍이 떨어진 시종들이 힐끗힐끗 눈짓했다.
황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며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실까요?”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내 오라버니와 혼인을 그리 하고 싶어했으면서. 대공이 어떤 짓을 했기에 더럽게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해?”
이를 악물고 협박하듯 뇌까리는 황녀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일을 맡길 때 황녀는 이런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저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으니까.
늘 황녀를 어려워했다.
태자비 자질을 시험하겠다며 일을 맡기는 황녀를 두려워했고, 레오포드에게 다른 영애와의 춤을 권하는 황녀를 보며 서러워했다.
노력하면 저와의 춤을 권해 주겠다는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황후만큼이나 저를 좌지우지했던 황녀였다.
그런데 태자비 자리를 내려놓으니 모든 게 또렷하게 보였다.
이렇게 쉽게 당황하고, 쉽게 화를 내고, 또 서툴게 협박하는 사람.
황녀는 제 앞에서 붉은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황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이제 자리를 옮겨 주시겠어요?”
.
.
.
황녀궁의 응접실.
자리에 앉은 황녀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공녀와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자리를 멀찍이 물러.”
“예. 전하.”
마지막까지 황녀의 얼굴을 살피던 유모 루하스 남작 부인마저도 응접실을 나섰다.
그제야 황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하. 천하기 짝이 없는 걸 오라버니의 약혼녀로 잠자코 두었더니 이딴 식으로 내 호의를 뒤엎어?”
“…….”
“대공이 뭐라 속살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내 자비를 구해. 감히 증거도 없는 일을 내게 대고 운운해?”
그래. 증거가 없을 거다. 황녀는 조금 숨통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올리비아에게 일을 맡길 때부터 황후인 어머니는 누차 강조했다.
“천하고 어리석은 것들은 증거를 남기려 해요. 황녀. 늘 꼬리를 잡히지 않게 조심해요. 아니면 잘라 버려도 상관없는 꼬리를 이용하든가.”
늘 어머니의 조언을 따랐다. 올리비아를 보좌했던 시녀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시골 변방으로 보내 버렸다. 보고서는 늘 직접 전달하게 했으니 다른 사람이 봤을 리도 없다.
여차하면 올리비아를 제 놀이 시녀로 들여 일을 돕게 했다고 변명하면 될 일이었다.
천한 출생인 주제에 일은 깔끔하게 잘했으니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을 거다.
사생아 공녀의 말과 적통 황녀인 제 말 중 누구의 말이 신빙성 있는지는 세 살 아기도 알 일이었다.
황녀가 교만하게 턱 끝을 치켜올렸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얼굴이 어딘가 레오포드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올리비아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제 사재 사용 내역입니다.”
예상대로 황녀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게 뭐.”
“전하께서 르칼르의 목걸이를 찾느라 지하 경매를 다니실 때, 춘궁기에 빠진 리테일 영지를 복구하기 위해 제 사재를 사용했던 내용입니다.”
“뭐?”
황녀가 황급히 종이를 낚아채듯 들었다. 잘 정리된 장부의 한 페이지에는 일목요연하게 금액의 사용처가 적혀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이중장부를 만들었다고? 감시하던 시녀들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중장부가 아니라 제 사재 장부의 사본입니다. 전하께서 미네르 영토를 날릴 뻔하셨을 때 제 사비로 먼저 처리하라 말씀하셨고 저는 그대로 이행했던 내역이 남아 있을 뿐이니까요.”
“이따위는 얼마든 조작할 수 있잖아!”
황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장부 사본의 한편을 가리켰다. 제국의 은행장이 찍은 날인과 인장까지 그때의 날짜 그대로였다.
우아하고 청초한 평소의 모습을 버리기로 했는지 황녀는 거칠게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새파란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고고하게 속내를 숨기는 모습보다는 어쩌면 이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황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따로 이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황녀 전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걸요.”
“부탁? 나를 겁박하듯 말해 놓고 지금 부탁이라고 말했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황녀가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증오 가득한 눈에 올리비아는 손등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지참금이 필요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