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기대하게 만드는 남자
(25/151)
025. 기대하게 만드는 남자
(25/151)
#025. 기대하게 만드는 남자
2022.05.25.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대공과 응접실에서 차를 마실 때였다. 잿빛 머리의 기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하워드 인터필드 남작.
귀족 도감에서는 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연회 때 언뜻 보긴 했는데. 올리비아가 인터필드 남작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대공가의 가신이라는 것. 몇 년 전 남작 작위를 승계받았다는 것, 그리고 대공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 승리의 주역이라는 것 정도.
선이 굵은 잘생긴 얼굴이 올리비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도 묵례했다.
바로 일어날 줄 알았는데 대공은 올리비아를 보며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잠깐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어서 다녀오세요.”
올리비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공녀였던 저에게도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일이 밀려들었다. 태자비의 직무와 황녀가 시킨 일을 동시에 수행할 때는 더 그랬다.
그러니 대공 정도의 위치면 얼마나 더 바쁠지 대강 감이 왔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배려에도 대공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올리비아가 갸웃거렸다.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바쁘죠. 하하.”
대공의 목소리가 기운 빠진 것처럼 들렸다면 그건 올리비아의 착각일까? 자리에서 일어나던 대공이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참. 아직 약을 안 먹었는데.”
이크. 올리비아는 자연스레 대공의 시선을 피했다. 나른하게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곧 약을 가져올 겁니다. 먹고 있어요.”
“…….”
“그럴 거죠?”
기어코 대답을 듣겠다는 물음이었다. 올리비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쳐다보면 안 된다. 눈이 마주치면서 부끄러워졌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증이 부끄러움을 기어코 이겼다. 그 잠깐의 충동이 올리비아의 고개를 들게 했을 때, 올리비아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저 남자는 어째서 저렇게 봄볕처럼 저를 바라봐 줄까.
……저가 뭐라고.
달큼하게 휘어진 눈매 속 붉은 눈이 다정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꼭 먹기예요. 안 먹으면 정말 바로 올 겁니다.”
“……네.”
작게 떨어진 올리비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대공이 빙그레 웃더니 응접실을 나섰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드레스 자락 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손끝이 서서히 붉어졌다.
불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대공에게 품은 기대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으면서 이렇게 두근댈 건 뭐야.
이 낯설고도 익숙한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올리비아의 대답과 동시에 들어온 사람은 갈색 머리의 윈스터 칼터 경이었다.
아. 레이스.
올리비아의 머릿속에는 자연히 레이스가 달린 기사 정복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쾌활한 얼굴이 올리비아를 보고 찡긋 웃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약 시중으로 왔습니다.”
“아. 칼터 경. 잘 부탁해요.”
당연히 해나가 올 줄 알았기에 기사가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대공의 측근 기사인 칼터 경이라면 더.
올리비아는 당황해서 딱딱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폭소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둘만 있는 건 처음이었다.
약 시중이라는 이상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윈스터는 오히려 좋다는 듯 웃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아가씨. 힘들게 온 건데 아가씨께서 불편해하시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기회요?”
무심코 묻고도 올리비아는 제가 괜히 물었는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윈스터는 그 편이 좋은 듯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아시겠지만 아가씨께 말 한마디 걸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대공저에 깔려 있거든요.”
“저한테요?”
“그럼요. 저희 그날 식당에서도 다 아가씨께 완전 잘 보이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날이라면.”
“네. 제가 웃어서 대공저를 온종일 뛰어다닌 날이요.”
윈스터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처량 맞은 얼굴이 웃겨서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작게 웃다가 아차 했다.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웃는다면 안 좋아할 텐데. 하지만 걱정할 새도 없이 윈스터가 유쾌하게 웃었다.
“원래 이렇게 잘 웃는 분이셨군요.”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웃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제 입가를 스치듯 만졌다. 정말 입가가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편하게 웃는 게 어색했지만 좋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눈매가 느슨히 휘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윈스터는 묘한 감정을 삼켰다.
힘들게 왔다는 건 반만 사실이었다. 대공의 명령으로 오게 된 것을 질투하는 사용인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렇게 와 보니 더욱 제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파의 수장 마델레이네 공작의 딸이자 다혈질 사고뭉치 제이드 마델레이네의 동생.
그 강한 선입견과 더불어 요사스럽다는 평판까지 가득 뒤집어쓰고 있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의 실체가 이렇게 말갛고 작은 아가씨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독기라고는 하나 없는 요정 같은 아가씨가 잠시 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당연하죠!”
윈스터는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대공 전하나 이 대공저와 관련해 윈스터가 모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
올리비아가 조금 머뭇거렸다. 자그마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궁금증이 드리웠다.
“혹시 레이스 달린 정복이 취향인가요?”
“악!!”
.
.
.
응접실의 열린 창문으로 고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옆방에서 흐뭇하게 듣고 있던 대공과 달리 옆에 서 있는 하워드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일부러 자리를 비워 주고 윈스터를 시켜 아가씨에게 친근하게 굴기.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고개까지 까딱이며 느른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이 기회인데.”
갈 곳 없다던 아가씨가 유일하게 생각하는 목적지가 이곳이 되었다.
아가씨가 대공저에 더 정을 붙였으면 했다. 종래에는 당연하게 이곳을 집처럼 여길 수 있도록. 그게 대공이 바라는 결과였다.
기분 좋다는 듯 화사하게 웃는 대공을 보며 하워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난번 폭소 이후로 아가씨한테 호감을 가진 윈스터라면 괜찮을 테지만 아직 비칸데르령에 있는 다른 기사들의 호감을 사기에는 먼일로 생각되었다.
황제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기사들을 떠올리던 하워드는 머리가 아팠다.
황제라면 진저리를 치는 놈들이 볼 때는 황제파 수장인 마델레이네 공작 또한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공작의 딸이라면? 주군의 아가씨라고 온순히 굴 녀석들이 아니었다.
하워드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말씀드리기 외람되나, 비칸데르령에는 마델레이네 공작조차도 싫어하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전에 차단을 하겠지만 아가씨께서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도 싫어.”
“예?”
“공작. 나도 싫다고.”
하워드는 대공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깨를 으쓱인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가씨를 싫어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특히 디안은. 전쟁 중에 칠면조 고기를 보내 준 후원자는 마음씨까지 고울 거라며 그렇게 찬사를 해 댔잖아.”
전쟁 중 칠면조 고기를 보내 준 후원자라면?
하워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공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혼자만 알고 있어.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도 아가씨라면 똑같이 디안을 사로잡을 테니까.”
“만약. 모르는 상태에서 선입견만 가진다면 그때는…….”
하워드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제이드 마델레이네와 맞먹을 정도로 불같은 기사 디안 스젤린을 비롯해 비칸데르의 기사들이 적의를 보인다면. 최악으로 치닫는 가정에 무표정한 하워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질 때였다.
대공이 힐끗 하워드를 돌아보았다. 감히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위압감이 하워드를 짓눌렀다. 하워드가 본능적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아름다운 얼굴이 여유롭게 웃었다.
“만약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
“아가씨는 내 비가 될 거고 내 기사들은 나를 보필하듯 내 아가씨를 보필하게 될 거야.”
그제야 하워드의 등골이 송연하게 당겼다.
감히. 감히 제가 주군의 아가씨를 재단하려고 했다. 그것도 그녀에게는 뭐든 다 하게 해 주고 싶다는 주군 앞에서.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하워드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간을 지배하던 날카로운 공기가 느리게 걷혔다.
대공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위압감이 걷혔는데도 그 한숨이 하워드의 어깨를 아프게 눌렀다.
“……아가씨 앞에서는 말을 더 조심해. 이제야 막 하고 싶은 말을 눈치 안 보고 하려는 참이니까.”
* * *
“가장 가까운 시일 내로 황제를 만나러 갈 겁니다.”
물론 아가씨만 괜찮다면.
대공이 덧붙인 말에 올리비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고 다시 갈 것을 각오하긴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게 있었다.
“괜찮다면, 제가 먼저 황궁에 다녀올게요. 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뵈러 가야 할 것 같아요.”
편지가 온 것을 떠나서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었다. 올리비아가 다부진 표정을 했다. 눈매를 날 세우던 대공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가씨도 정리할 게 있겠죠.”
여유로운 척 말하는 대공의 얼굴에 어린애처럼 싫은 티가 서렸다. 올리비아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먼일을 회상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티아제 궁의 실권을 부여받은 게 일 년이 되었어요.”
“그래요?”
대공이 눈썹을 까딱했다. 보통 태자의 약혼녀들이 훨씬 더 어릴 때부터 실권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네. 물론 그전부터 일은 했지만 실권을 부여받는다는 건 의미가 다르잖아요. 그러니 어땠겠어요.”
올리비아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제 서러움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게 말이다. 다행히 대공은 별말 없었다.
“……밤낮으로 티아제 궁을 가꿨어요. 드디어 이 궁이 완전히 내 것이 되었구나. 그런 어린애 같은 소유욕 있잖아요.”
올리비아는 배시시 웃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때의 감격은 정말 다시 생각해도 콧날이 시큰할 정도였다.
마지못해 실권을 준다는 황후한테도 진심으로 감사했다. 황녀가 툭하면 와서 궁을 망가뜨리고 황녀 궁을 더 신경 쓰라는 말에도 불만 없이 일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줄 알고.
“특히 후원이요. 제가 정말 열심히 꾸며 놓은 곳이거든요.”
한 번이라도 레오포드가 예쁘다 봐 주었으면 해서.
헛된 기대였다. 올리비아는 씁쓰레한 기억들을 삼키며 빙그레 웃었다. 대공은 느리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꾸미셨다면 정말 예쁜 곳이겠군요.”
“그 예쁜 후원을 직접 보고 싶지 않으세요?”
올리비아가 장난스레 말했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고 올리비아를 마주 보았다. 이내 나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데이트 신청인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전하께서 말씀하신 ‘부리는 것’을 실천하는 중인데요?”
“그게 그거죠.”
대공이 우아하게 웃었다. 만개한 장미처럼 화사한 얼굴에 올리비아는 대꾸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사실은. 보여 주고 싶었다.
아무도 눈여겨봐 주지 않았던 제 궁을.
늘 자랑하고 싶었던 제 공간을.
노력을 알아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공이라면, 충분히 제 노력을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간질거리는 설렘이 좋았다. 기대에 부응해 줄 거라는 확신이 올리비아를 들뜨게 만들었다.
올리비아는 대공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올리비아의 눈매도 자꾸만 휘어졌다.
* * *
“전쟁 영웅 비칸데르 대공 전하를, 그리고 공녀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 이 티아제 궁에는 어쩐 일로.”
소프론 남작 부인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허락받은 이가 아니라면 남자 귀족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태자비의 공간인 티아제 궁에 비칸데르 대공이 태자의 약혼녀와 함께 나타나다니.
그것도 지금처럼 대공이 제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어지러운 때에.
올리비아는 연하게 미소 지으며 대공을 마주했다. 대공의 얼굴 위로 사르르 웃음이 번졌다.
“내가 허락했습니다.”
“네?”
“주인인 내가 직접 허락하고 환영하는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무게감 실린 단정한 목소리에 소프론 남작 부인의 표정이 흐려졌다.
단번에 부인이 누구를 떠올리는지 알 수 있었다.
불청객인 마리아 에텔.
아무리 태자의 뜻이었다지만 태자비를 보필하고 티아제 궁을 관리하는 시녀로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모른 척 말을 돌렸다.
“……태자 전하께는 미리 편지를 드렸습니다. 곧 이곳으로 오실 테니 준비를 해 주세요.”
“네. 그러면 후원에 준비하겠습니다.”
소프론 남작 부인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궁인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가운데에서 올리비아는 대공을 돌아보았다.
신기하다는 듯 궁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얼굴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자각하는 동시에 올리비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대공이 의아하다는 듯 올리비아를 불렀다. 아차. 그제야 제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올리비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벌, 벌이요. 봄이라 벌이 있나 봐요.”
“그 벌도 미감을 갖춘 모양입니다.”
대공이 상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낯간지러워서 올리비아는 다른 말을 했다.
“저기. 저 분홍 꽃은 제가 심었습니다.”
“어쩐지. 팻말에 쓴 글씨가 낯익다 싶었습니다.”
응? 올리비아는 순간 대공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글씨가 낯익다는 게 무슨 뜻일까.
하지만 다시 묻기도 전에 저편에서 고함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황녀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