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황궁에서 온 편지
(24/151)
024. 황궁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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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황궁에서 온 편지
2022.05.22.
에셀라는 걸음을 멈췄다. 문틈 사이로 나온 목소리는 콘라드였다. 에셀라를 본 하녀가 얼른 인사를 하려 했지만 에셀라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듣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에셀라는 식당 문가로 다가갔다.
“올리비아를 다시 데려와야 합니다. 걘 그럴 용도로 우리 집으로 왔지 않습니까.”
좁은 문틈으로 콘라드의 등이 보였다.
언니가 뭘 하기 위해 왔다는 말일까.
지난번 황녀의 티 파티에 갔을 때처럼 불안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만약 에셀라가 태자비로 간다면.”
무슨 이야기지? 언니가 태자의 약혼자인데. 둘은 서로 사랑하는데 왜 제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황후의 독기에 말라 죽을 정도로 괴로워할 겁니다. 저는 그 모습 못 봅니다.”
무거운 콘라드의 목소리에 에셀라는 반사적으로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그러면 올리비아 언니는?
순식간에 피가 다 빠진 것처럼 에셀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에셀라는 무작정 방을 향해 뛰었다.
갑자기 누군가 에셀라의 어깨를 잡았다. 놀란 에셀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이드였다.
“제이드 오라버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순식간에 힘이 쭉 빠졌다. 제이드가 힘없이 늘어지는 에셀라를 단단히 잡으며 소리쳤다.
“괜찮아? 의원! 의원을 불러!”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 상황에서 제이드는 하얗게 질린 에셀라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기에. 에셀라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젠장. 대공저로 올리비아를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지만 에셀라 쪽이 더 급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에셀라는 늘 가족들의 걱정이었으니까.
“우선 침대로 가자. 어지럽지는 않아?”
“오라버니.”
“응. 말해.”
“아니지?”
에셀라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하지만 주어가 빠진 말을 제이드가 바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뭐가 아니야.”
“언니…….”
성큼성큼 에셀라의 방으로 가던 제이드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셀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언니가 황후 때문에 힘들어한 거 아니지?”
제이드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뼛속까지 귀족파인 그 여자라면 얼마든지 올리비아를 괴롭혔을 것이다.
“……몰라.”
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제이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에셀라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너 열 난다.”
“그러면 태자비가 원래 내 자리였다는 건?”
순간 제이드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설마 했는데. 거짓이길 바랐던 말이 사실이라니.
하하. 에셀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엉켜 있던 콘라드의 말들이 제 상황과 맞물려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걘 그럴 용도로 우리 집으로 왔지 않습니까.”
어릴 적 갑자기 언니가 생긴 것도, 저를 숨기듯 사교계에 내보내지 않는 가족들도. 언니를 없는 사람인 듯 대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황후의 독기에 말라 죽을 정도로 괴롭다는 것도.
전부 다 사실일 거다.
에셀라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대신 궁에 가야 했다는 언니가 가여워서. 황후한테 괴롭힘 받았을 언니가 안쓰러워서.
동시에 제가 언니한테 했던 말들이 천천히 또렷해졌다.
“손대지 마! 더러워!”
“걱정하는 척하지 마.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언니 때문이었어.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게. 다 언니 때문이었다고!”
“나가! 언니도 아니야! 너 따위는! 나가 버려! 꼴도 보기 싫어!”
제가 무슨 말을 한 걸까.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던 에셀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묵묵히 생각에 빠진 제이드도 에셀라를 달래 줄 겨를이 없어 보였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안개가 걷히듯 의문들이 흩어지면서 에셀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 언니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그것도 엄마를 아주 좋아하던 여섯 살.
머리가 이상하게 잘린 채로 저랑 엄마랑 제이드만 보면 행복하다는 듯 배시시 웃던 여섯 살. 고작 여섯 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했다고.
언니가 엄마를 죽게 했을 리 없는데.
언니가 우리 집에 온 것도. 태자와 약혼을 하게 된 것도. 일이 많았던 것도. 어쩌면 저와 놀지 못했던 것도 다.
어른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퍼뜩 저를 바라보던 언니의 눈이 떠올랐다. 쌀쌀한 척 돌아서면서도 저를 힐끔힐끔 보던 다정한 초록색 눈동자.
왜 이제야 생각난 걸까.
언니가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심장이 내려앉았다. 에셀라의 뺨을 타고 후회 섞인 눈물이 뚝뚝 흘렀다.
* * *
올리비아가 황당하다는 듯 방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게 뭐죠?”
당황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대공은 오히려 잘하지 않았냐는 듯 뿌듯하게 웃었다.
“휴식을 취하기 적합한 방으로 개조한 거죠.”
“책을 다 빼 버린 게요?”
올리비아가 허망한 얼굴로 책장을 가리켰다. 약을 먹고 잘 자고 일어났는데 벽 하나를 꽉 채운 책장이 온통 사라졌다. 그곳에 꽂혀 있던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조금 찔린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잘난 외양이 흡사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안쓰러웠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넘어가지 않았다.
“휴식 때는 책을 읽어야죠!”
“누가 휴식 때 책을 읽어요. 가만히 누워 있어야죠.”
“그건 요양이잖아요! 전 이제 다 나았는걸요!”
올리비아가 당당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대공은 아직 책을 읽는 것도 무리일 정도로 아프다는 말을 겨우 삼켰다.
그러는 사이 올리비아는 제가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보세요. 목소리도 괜찮고. 이제는 어지럽지도 않다니까요?”
그러니 책을 돌려 달라는 묵음 같은 말에 대공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가 조금만 더 잤으면 아예 그 자리에 다른 가구를 들여놓았을 텐데.
“……빈칸이 헛헛하기는 하네요. 다른 걸 사러 갈까요?”
“새로운 책장을 사기에는 있던 책장도 마음에 들어서요. 새 책은 사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올리비아는 스스로의 대처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능청스레 잘 받아쳤으니 이제 대공이 책장을 다시 가져다 놓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멍하니 올리비아만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맞이한 것처럼 당황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전하?”
“……좋네요.”
“뭐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 따로 좋을 게 있을까? 올리비아는 잠시 갸웃했다.
대공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화사하니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가씨가 직접 선물을 조르시다니. 기분이 안 좋고 배기겠어요?”
“저는! 선물을 바란 게 아니라!”
“걱정하지 말아요. 책장은 마음에 든다 했으니 그대로 돌려 줄게요.”
정말 기분이 좋은 듯 대공의 얼굴에 나른한 웃음이 번졌다. 선물을 바란 게 진짜 아닌데. 올리비아는 대꾸하려던 마음을 버렸다.
선물을 주고도 좋다니. 하긴 그 마음이 어떤 건지는 저도 잘 알았다.
피식 웃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매번 가족들과 레오포드의 선물을 준비했던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보석이며 커프스, 직접 만든 검 장식과 구하기 힘든 고서적들. 그 선물들이라도 받아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준비했는데 늘 방문 앞에 그대로 있었다.
손 한번 안 댄 것을 티 내듯 말이다.
레오포드의 선물은 시종장에게라도 맡겼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하나도 착용하거나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꼭 한 번은 착용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었던 것들인데.
어떻게 할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묵직한 서글픔이 올리비아를 잠식했다.
그러고 보니 에셀라의 방에 두고 온 핑크 다이아몬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에셀라를 위해 예약했던 부티크는…… 돌려보냈으려나.
씁쓸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올리비아는 대공을 다시 바라보았다. 찬찬히 기다려 주듯 눈을 맞춘 대공이 느릿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다시 아픈 건 아니죠?”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괜찮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답변이 맞았지만. 이제 저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다 괜찮아질 거예요.”
모조리 다.
이 슬픈 기억을 딛고 나아질 거다.
그제야 대공이 우아하게 웃었다.
“현명한 답이네요.”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근사한 미소였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우울한 감정도 잠시 잊을 정도로 굳어 버렸다.
뭐지?
생경한 감정에 심장이 두근대었다.
올리비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서 그럴 것이다. 이렇게까지 다 해 주는데 안 고마울 리가 없으니까.
올리비아는 꾹꾹 이 묘한 느낌을 눌렀다. 아무리 제가 대공에게 기대를 품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마음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무서웠다.
가족들에게, 약혼자에게 두 번 거절당한 마음은 아직 움츠러든 그대로였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식사나 할까요?”
대공이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식사라. 좋은데요?”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배가 고팠다. 이 정도 식욕이라면 수프를 한 그릇도 먹을 것 같았다. 대공이 짓궂게 눈짓했다.
“아까보다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내가 또 먹여 드릴 테니.”
갑자기 아까 모습이 생각났다.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부루퉁하게 대공을 흘겨보았다.
하얗고 고운 얼굴은 뾰로통했지만, 머리카락 새로 보이는 작은 귓불이 붉었다. 대공은 유쾌함을 숨긴 채 올리비아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정말 장난치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올리비아는 그 손을 잡았다. 갑자기 문에 노크가 울린 건 그때였다. 들어오라는 말에 소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급한 사안이라 죄송합니다.”
하나도 급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소벨이 세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한 통은 전하께, 두 통은 아가씨께로요.”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편지의 인장을 확인했다. 세 장의 편지에 찍힌 인장이 다양했다. 황제 궁, 황녀 궁, 그리고 레오포드가 있는 황태자 궁까지.
저 중 제게 왔을 법한 편지는 황녀 궁, 그리고 황태자 궁.
“……가족이 한 번에 보내면 좀 좋아.”
매혹적인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한탄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큼큼, 정색했다. 올리비아를 힐끗 바라보는 대공의 눈매가 짙었다.
“내 편지부터 줄래요?”
“예. 아가씨.”
소벨이 건넨 편지는 올리비아의 예상대로였다. 황녀 궁, 그리고 레오포드.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황녀 궁의 편지부터 뜯었다.
“황녀가 뭐라던가요?”
“……당장 입궁하라고 하는데요?”
의외였다. 무슨 꿍꿍이일까 가늠하던 올리비아의 눈이 총명하게 반짝였다. 어차피 황녀는 한번 봐야 할 일이 있었다.
“잘됐네요. 뵐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절대 안정인 거 알죠?”
몰랐지만 당장의 만남을 피하기에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심호흡을 하며 레오포드에게서 온 편지를 뜯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전하 말씀대로 가족이긴 가족이네요.”
“왜요? 똑같아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요.”
딱 한 줄. 당장 입궁하라는 말이었다. 뚫어져라 그 한 줄을 쳐다보던 올리비아가 희게 웃었다.
제가 이제까지 받았던 레오포드의 카드와 필체가 비슷하나 조금 달랐다.
진짜 레오포드의 편지는 이런 거였구나.
복잡한 감정이었다. 제가 대공저에 있는 걸 알면서도 보낸다는 게 고작 입궁하라는 한 마디라니.
올리비아에 대한 걱정이나 애정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치밀어오르는 허탈감을 애써 털어 냈다. 헛헛함 아래 섞여 있던 배신감, 그리움, 서러움들이 어지러이 일렁였다.
이제는 모두 뒤로 해야 할 감정이었다.
올리비아가 단단한 얼굴로 편지를 외면했다.
그러는 새 대공이 황제의 편지를 뜯어서 흔들었다.
“과연 이 편지 내용도 같을까요?”
장난치듯 가벼운 말에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공이 바로 맞췄다는 듯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답장을 똑같이 보낼까요?”
* * *
어스름히 해가 진 시각. 태자궁 후원에 있던 레오포드 앞으로 시종장이 다가왔다. 노련한 얼굴이 어딘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오포드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그는 분노를 참듯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조금 전 대공저로 편지를 보냈다. 올리비아라면 당연히 뛰어올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감히. 약혼자가 버젓이 있는 공녀가 정숙지 못하게 외부에서 하룻밤을 묵다니. 그것도 추문이 붙을 만한 일을 함께 벌인 대공의 저택에서.
새파란 바다 빛 눈동자에 화가 넘실거렸다.
어젯밤 마지막 승전 연회에서 둘이 나타났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둘이 함께 대공저로 들어갔다는 말에 레오포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저를 위로하기 위해 온 마리아까지 억지로 돌려보냈다.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레오포드가 눈을 번뜩이며 입을 떼었다.
“올리비아는. 도착했어?”
성마른 목소리에 시종장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공녀는 오지 않고 편지가 왔습니다.”
“뭐?”
말도 안 되었다. 올리비아가 오지 않았다고? 레오포드는 사나운 기세로 편지를 낚아채듯 뜯었다. 단정한 필체로 적힌 문구는 단출했다.
“……그러니까 지금 겨우 아파서 못 온다는 거야?”
거짓말. 레오포드가 이를 악물었다.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쓸데없이 튼튼해서 늘 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여자였다.
이게 무슨 술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좀 봐 달라는 발버둥 같은 거겠지.
하지만 지금 올리비아가 하는 짓은 선을 넘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상관없었다. 대공도 올리비아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잘생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