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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진실에 다가간 순간 (23/151)


#023. 진실에 다가간 순간
2022.05.18.


창을 통해 환한 햇살이 비춰 왔다. 침대에 누운 올리비아는 조금 멍한 눈으로 침대 옆에 자리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의 대공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해나, 평소처럼 무표정한 집사 소벨, 그리고 처음 보는 날카로운 인상의 의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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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심각한 건가.”

대공이 무겁게 말했다. 올리비아는 부끄러워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그냥 잠깐 어지러운 것뿐이지 아픈 건 아니었다.

아마 어젯밤 늦게까지 울었던 탓일 거다.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을 뿐인데 해나가 놀라더니 대공과 의원을 불렀다. 대공은 들어오자마자 올리비아가 말도 못 하게 막았다.

의원은 올리비아를 진찰하듯 바라보다 명쾌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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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심한 몸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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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올리비아는 단박에 부정하려다가 기침을 했다. 목 안쪽이 긁히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늘어지긴 해도 몸살이라니.

어릴 적부터 건강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엄마랑 살 때도 아팠던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 커서?

올리비아는 목이 아픈 것을 참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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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되게 건강한 편이랬는데.”

다 갈라진 목소리에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의원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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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아니 아가씨께서는 몸은 건강한 게 맞습니다. 건강하셨으니 몸살이 이 정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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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빨리 낫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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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휴식과 균형 잡힌 식사, 그리고 때맞춰 약만 잘 드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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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휴식과 균형 잡힌 식사라.”

대공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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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휴식 잘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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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으로서의 소견을 말하자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가씨.”

의원이 톡 끼어들었다. 대공의 눈이 어쩐지 음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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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휴식과 식사를 더 잘 챙겨야겠네요.”

지금도 잘 챙겨 주는데 더? 어떻게 여기서 더 잘 챙겨 준다는 말이지?

당황스러웠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아픈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너머 대공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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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벨. 주방장 마사한테 이야기해서 더 영양가 있는 식단으로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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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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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는 아가씨께서 충분히 휴식하실 수 있도록 신경 쓰이는 건 모두 치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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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단답형으로 떨어지는 소벨과 달리 해나의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울지 말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데 차마 이불을 내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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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랑 약은 먼저 준비했는데 바로 가져올까요?”

소벨의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는 어질거리는 와중에도 이불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대공의 대답이 없는데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 나갔을까?

안 그래도 뜨거운 숨이 고여 이불 안이 더웠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레 이불을 내렸다. 빼꼼 나온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 대공과 마주쳤다.

헉. 올리비아가 숨을 삼켰다. 대공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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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놀란 표정, 아니. 목 아플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올리비아는 놀란 눈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다 눈가를 찡그렸다. 머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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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프죠. 말도 하지 말고 고개도 끄덕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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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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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말라니까. 말도 안 듣네요.”

잔뜩 가라앉은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엄한 얼굴로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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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휴식과 균형 잡힌 식사. 이거 두 개만 하기에도 벅차게 해 줄게요.”

대공의 목소리가 어쩐지 심술궂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을 때, 올리비아가 묻기도 전에 문이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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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약 가져왔습니다.”

소벨이었다. 올리비아는 한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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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해요.”

한숨 놓은 것 취소.

올리비아는 입 앞까지 다가온 숟가락을 보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올리비아를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게 베개까지 고쳐 주었던 대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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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뜨거워요?”

이 뻔뻔한 남자가!

하지만 수프 냄새가 근사했다. 분명 식욕이 없었던 것 같은데 냄새를 맡자 허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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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도 괜찮은 거 같은데. 한번 먹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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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요. 제가 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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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말라니까요. 목 아프잖아요.”

올리비아는 불만의 표시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차라리 해나가 왔으면 조금 편했을 텐데. 퉁퉁 부은 눈으로 계속 울던 해나는 결국 환자의 안정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공한테 수프를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너무 부끄러웠다.

올리비아가 계속 버티자 대공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조금 미안했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결연한 의지를 표 내듯 이불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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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그렇게 안 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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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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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도 내가 먹여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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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통첩 같은 말에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 때문에 상기된 얼굴이 안쓰럽고 귀여웠다. 하지만 대공은 웃음을 숨긴 채 근엄한 표정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올리비아가 결심했다는 듯 눈을 꼭 감고 수프를 먹었다.

한 번, 또 한 번.

적당히 식은 수프는 맛있었다. 대공은 먹기 편하게 연신 올리비아의 입 앞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럽기만 했는데 대공이 아무렇지 않자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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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배불러요.”

올리비아가 작게 말했다. 대공은 남아 있는 수프의 양과 올리비아를 번갈아 보았다.

더 먹으라고 하려나.

하지만 평소 양이 적은 올리비아로서는 정말 배가 불렀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까 고민하는 새 대공이 수프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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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식사는 된 것 같은데. 약 먹을까요?”

대공이 생글생글 웃으며 약이 올려진 접시를 올리비아 쪽으로 가져왔다. 에셀라가 아플 때 먹던 약은 쓴 냄새가 올라오는 액상 약이었는데, 접시 위에 있는 건 동글동글한 환 형태의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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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이 먹어도 괜찮아요.”

대공의 말에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환을 들어 먹었다. 쓸 줄 알았는데 씁쓸한 맛 뒤에 단맛이 짙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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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입에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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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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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을 좀 섞으라고 했는데. 다행이네요.”

대공이 조금 웃었다.

꿀이라. 그러고 보니 단것을 굉장히 오랜만에 먹었다. 레오포드가 살이 찐 것 같다고 말했던 뒤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올리비아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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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건 살찌는데.”

대공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던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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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쓰지 않아 좋아요.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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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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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 졸린 것 같아요.”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팔랑였다. 점점 몽롱해지는 얼굴을 보며 대공이 올리비아의 이불을 다시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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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때문일 거예요. 한숨 자요.”

자세가 편해졌다. 가물가물하게 감기는 시야 너머 대공이 보였다.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안 아파 봐서 몰랐는데.

든든하고 따뜻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다정함이었다.

삽시간에 잠이 몰려왔다. 눈을 완전히 감기 전, 올리비아는 이제 막 생각난 사실 하나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아프기는 했다.

잠들기 전에 생각해서인가. 꿈에서 그날이 나왔다. 십 년도 더 된 어느 겨울, 여덟 살 때였다.

떠올려 보면 그날은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제이드가 저를 미워하기 시작한 직후라 집 안의 분위기는 위태롭고 무서웠다.

그 상황에서 올리비아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끙끙 앓으면서 공부를 하다가 결국 밤에 아팠었다.

장작조차 없는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호호 입김을 불었다. 이불 속에 갇힌 입김이 얼굴에 부딪혀 뜨거웠었다. 열에 들떴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 같은 게 났었던 것 같다.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데. 이건 제 꿈이 보여 주는 상상일까. 아니면 진짜였을까.

그때도 아마 깨어나서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은데.

올리비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누군가 있는 게 흐리게 보였다. 대공이었다. 나직이 웃는 얼굴이 더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올리비아는 제가 괜한 고민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을 게 뻔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은.

아니 그들은.

제게 관심 자체가 없었으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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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가 깊게 잠들고 나서야 대공은 방을 나섰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자 방 앞에 있던 의원 브랜든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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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지금 몸 상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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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부족, 영양 부족, 대체로 다 부족합니다. 아, 수분도 부족한 듯싶더군요.”

브랜든은 올리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잘 닦아 냈어도 눈가가 붉게 짓무른 건 영락 없이 운 얼굴이었다. 사교계에서 독하다 소문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저렇게 말갛고 순한 얼굴이라니.

생각에 빠져 있던 브랜든이 흠칫했다. 대공의 주변에서 어둑한 살기가 올라왔다.

아차. 친한 기사인 윈스터가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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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나쁘지 않으면 적당히 포장해서 말씀드려. 안 그러면 어둠의 끝을 보게 될 거야.”

 
그 말을 들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대공이 저 방의 아가씨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두리뭉실하게 말고 명확히 말할 것이지!

브랜든은 등 뒤로 땀을 찔끔 흘리며 허겁지겁 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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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원체 몸이 건강해서 충분히 휴식하고 식사만 잘 챙긴다면 별 탈 없이 곧 나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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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에 올 때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아픈 건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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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좀 경직되어 있던데.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참아 온 게 몰아서 아픈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긴장이 풀어졌다든지요.”

브랜든의 대답에 대공이 낮게 탁음을 뱉었다. 그리고 한층 짙어진 눈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어졌든, 참아 온 게 아프든 둘 다 속상하기 짝이 없다.

저 작은 몸으로 뭘 그리 참은 게 많은지.

그래 놓고는 잘난 척 ‘리브 그린’으로 제 걱정을 했다. 생각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비칸데르령에 있는 집사 베서니라면 올리비아를 단번에 건강히 살찌울 수 있을 텐데.

대공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대공령으로 잡음 없이 가기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혼인 관계를 명확히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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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시일 내로 황제를 만나야겠군.”

잇새로 짓이겨지듯 나오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브랜든은 익숙하다는 듯 오싹하게 돋아나는 소름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 *

마델레이네 공작가.

발코니로 햇빛이 들어왔다. 한숨도 자지 못한 에셀라는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만 들여다보았다. 햇빛에 다이아몬드가 찬란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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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아가씨께서는 에셀라 아가씨를 생각하셨어요. 정말입니다.”

 
엉엉 울던 하녀 샐리의 목소리가 에셀라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에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가 보냈다는 부티크 옷들을 받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내내 에셀라는 계속 언니를 생각했다.

무뚝뚝한 척하는 언니. 저를 피하는 언니. 웃어 주지 않는 언니.

하지만 저를 늘 챙겨 주던 언니. 그게 진심이었다는 건 에셀라가 제일 잘 알았다.

모든 순간의 올리비아의 모습들이 중첩되면서 에셀라를 혼란에 빠트렸다. 생기 없는 보라색 눈 위로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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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지 말고 나한테 말이라도 해 주지.”

중얼거리는 에셀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다. 언니는 말을 하려고 했다. 언니가 말할 새도 없이 제가 몰아붙였다. 스스로가 한 말들이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때 언니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에셀라가 올리비아한테 할 수 있는 건 못난 원망밖에 없었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불에 떨어진 눈물들이 동그랗게 젖은 자국을 만들었다. 머릿속에는 계속 언니가 잘해 줬던 것만 떠올랐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언니는 다정했었다. 손을 잡아 주고 놀아 주고. 아플 때는 몰래 들어와서 간호도 해 줬다.

……그랬던 언니가 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저를 차갑게 대했을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에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언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데.

에셀라는 올리비아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환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에셀라가 발코니로 다가가 창문을 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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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첫째 공녀님이?”

순간 에셀라의 귀가 쫑긋했다.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목소리가 깜짝 놀란 듯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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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해! 에셀라 아가씨께서 들으시면 넌 바로 쫓겨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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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가씨께서는 방문은커녕 창문도 안 여시잖아. 그나저나 사실이야? 첫째 공녀님이 대공 전하의 청혼을 받으셨다고?”

에셀라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놀라 비명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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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지.”

다른 목소리가 거침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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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황제 폐하께 소원을 비셨다니까? 첫째 공녀님과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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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에셀라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래층에서 헉, 하고 놀란 신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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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올라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건 거짓이어야 했다.

언니는, 언니는 태자 전하를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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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게. 신문에 다 나온 이야깁니다. 아가씨. 용서해 주세요.”

 
에셀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구겨 잡았다. 하녀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공이 언니와의 혼인을 소원으로 빌다니. 그것도 황제한테.

전쟁 영웅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비겁하게 연인을 떼어 놓으려 하다니!

순식간에 비칸데르 대공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살육귀, 전장의 괴물. 그 소문에 긍정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화가 나서 숨이 다 차올랐다. 억울함에 눈물까지 다시 날 것 같았다.

태자와 언니는 아주 좋은 연인이었다. 언니가 얼마나 태자를 사랑하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아무리 지금 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아도 이건 아니었다.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빨리 알아내 언니를 데려와야 했다.

에셀라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방을 나섰다. 며칠간 다시 방문을 걸어 잠갔던 막내 아가씨가 방을 나오자 사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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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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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니 콘라드 오라버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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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식당에 계십니다.”

다급한 에셀라의 목소리에 하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에셀라는 서둘러 식당으로 뛰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아버지한테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아버지라면 언니를 대공의 손에서 구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침 식당으로 들어가는 하녀가 식당 문을 열고 있었다. 에셀라가 그쪽으로 뛰어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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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라를 올리비아 대신 태자비 자리로 밀어 넣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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