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2. 모든 게 끝나고 새로운 시작에 서서 (22/151)


#022. 모든 게 끝나고 새로운 시작에 서서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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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들어올 때 왈츠곡이 새로 시작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무작정 대공의 손을 이끌고 연회장 한가운데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아랑곳 않았다.

올리비아는 대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와 동시에 대공이 춤을 리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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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렇게 뭐든 잘하는 편이에요? 지난번보다 잘 추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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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는 건 좀 잘해요.”

올리비아는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아니 마델레이네 공작을 외면한 채 걸어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킬까 봐 올리비아는 더 열심히 춤을 췄다.

올리비아는 최선을 다해 연회를 즐기려 애썼다. 대공이 깔아 준 판 안에서 고작 공작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즐길 수 없는 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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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요?”

뭉뚱그린 대공의 질문이 정곡을 찔렀다. 올리비아는 괜찮은 척을 하려다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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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렇다면 거짓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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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만큼은 아니지만 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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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왜요?”

물어 놓고 올리비아가 아차 했다. 설마 제가 복잡해서 같이 복잡하다느니 그런 말일까.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대공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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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께서 자리를 뜨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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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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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빌었는데 승인 없이 가신 거잖아요. 난 바로 오늘이라도 혼인을 할 수 있게 준비되었는데 말이죠.”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 올리비아의 얼굴을 확인하던 대공의 입매에도 느슨한 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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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밤에 혼인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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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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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재치가 넘쳐서 그렇죠.”

올리비아는 지난번 대공이 제게 했던 말을 인용했다. 혀를 내두르던 대공이 사르르 웃었다.

별거 아닌 대화였지만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턴을 돌면서 레오포드가 저만치 있는 것도 발견했다. 춤을 출 때 빼고는 늘 자리를 비우던 레오포드는 제 춤이 끝나자마자 뛰어올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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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가 안 끝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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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런 생각 했는데.”

대공이 말끝을 늘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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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윈스터가 파트너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대답하지 뭐예요.”

대공이 눈짓한 곳에 기사 윈스터 칼터가 있었다. 며칠 전 열심히 웃다가 저녁까지 정원을 뛰던 기사. 해나의 말로는 연무장까지 뛰었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윈스터를 바라보았다. 처음 사계의 정원에서 봤을 때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이었는데 저렇게 정복을 차려입으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한 번쯤 이야기해 볼 기회가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허탕이었다.

그때 레이스 달린 기사복은 취향이었던 걸까.

윈스터를 바라보던 시야 속으로 불퉁하게 뺨을 부풀린 대공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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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터를 보기에는 너무 괜찮은 남자가 바로 앞에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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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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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나라든가.”

말과 동시에 대공이 왈츠에 맞춰 올리비아의 허리를 잡고 훌쩍 들어 올렸다. 공중에 붕 뜬 상태에서 머리카락이 조금 날렸다. 부푼 드레스 자락이 퍼지는 사이에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왈츠가 끝났을 때 올리비아는 뺨이 조금 상기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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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분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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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말로요.”

대공이 웃으면서 올리비아한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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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뒤로 태자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레오포드가 다가오다니. 지금이라도 대공저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말하기도 전에 레오포드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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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좀 해.”

제이드였다.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형형한 얼굴로 대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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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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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장은 늘 말이 짧아.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아예 걷어치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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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페르티 잔당에 대한 첩보가 거짓이었음을 알았을 때 같이 가져다 버렸습니다.”

‘거짓’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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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니라니 다행이었어. 그러면 아가씨. 우리는 예정대로 저택으로 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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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제이드의 목소리가 좀 더 커졌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제이드를 보고 싶지 않았다. 마주하는 순간 어깨에 남았던 손자국 모양이 그대로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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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얘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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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얘기 많아. 그 잠깐 새에 사라지더니 이제까지 어디 있었어. 대공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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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낮춰. 보는 눈도 많은데.”

올리비아가 낮게 말했다. 씩씩거리던 제이드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올리비아를 쏘아보는 눈이 복잡했다. 그 혼란스러운 눈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장장 십사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제가 끊어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바뀔 사람들이었으면 진즉 저를 돌아봐 줬을 것이다.

제이드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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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도 정도껏 해.”

옆에 있던 대공이 올리비아의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올리비아는 대공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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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

올리비아는 천천히 제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제이드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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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반항. 안 그래도 에셀라 쓰러진 뒤로 분위기 안 좋아. 그러니 너까지 피곤하게 굴지 말고 지금 나랑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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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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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멍청하게 굴지 말,”

제이드가 짜증스레 말을 하다 멈췄다. 올리비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올리비아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늘 웃고 있던 녹색 눈동자가 유난히 멍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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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돌아가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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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연하게 공작저라고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제이드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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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하는 게 반항이야?”

올리비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목이 메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할 것처럼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감정이 ‘절박’이라고 생각했었다. 에셀라가 저를 거부했고, 차례로 아버지와 콘라드와 제이드가 저를 밀어냈을 때, 정말 벼랑에 밀려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매번 상처를 받으면서도 웃으면서 넘겼지만 더 이상은 숨이 막혀서. 그래서 나왔다.

제이드의 눈에는 그 모든 게 반항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제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그랬을까.

허탈함에 말문이 막혔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늘 저는 가족들부터 우선시했는데. 정작 가족들에게서 제 위치는 고작 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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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 마델레이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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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야, 너 지금 뭐라고.”

당황한 제이드가 길길이 날뛸 태세를 갖췄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제 걱정은 이제 저 스스로를 향해야 했다. 제이드가 말을 골랐는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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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마델레이네라며.”

제이드의 인식 속에서 저는 마델레이네가 아니었다. 그냥 마델레이네라고 주장하는, 올리비아일 뿐이었다. 그 지독한 사실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정말…….

나만 몰랐구나.

올리비아는 아릿하게 울리는 마음을 무시했다. 이제는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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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께는 말씀드렸어요. 저 이제부터는. 아니. 원래 그랬겠지만.”

올리비아가 희게 웃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주하던 제이드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이 커다래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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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에서 마델레이네를 지울 거예요.”

제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마델레이네를.

사랑했던 가족들을.

이제 지울 것이었다.

제이드를 등진 채 올리비아는 대공의 팔을 조금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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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택으로 가요.”

대공의 손이 조심스레 올리비아의 어깨를 감쌌다. 누군가 지탱해 준다는 것은 아주 기껍고, 또 울음이 날 것처럼 다정한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스무 살, 지금에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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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셨어요?”

대공저로 들어갔을 때 해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올리비아와 대공을 맞이했다. 올리비아는 비밀을 공유한 이들끼리 짓는 것처럼 은밀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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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 나는 연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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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정말 아름다우신데.”

해나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막듯 집사 소벨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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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아가씨. 따로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앳된 얼굴의 집사 소벨은 첫날부터 저랬다. 무뚝뚝하지만 걱정까지 숨길 정도로 노련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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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랄 게 있나. 아, 배 조금 고픈 거 정도?”

대공이 느른히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연회 때 대공이 뭔가를 먹는 걸 못 봤다. 저야 적게 먹는 게 습관이 되어서 괜찮겠지만 대공은 다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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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니 적당한 수프와 빵을 조금 준비하겠습니다.”

소벨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끝났겠지. 올리비아가 습관처럼 계단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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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어떠십니까?”

올리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벨은 착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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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가씨의 식단을 보면 지금도 스테이크를 드리고 싶지만, 밤에 드시면 탈 날 수 있으니 고기를 넣은 스튜 정도는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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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 밖으로 나간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쾌활하게 웃던 얼굴에 균열이 갈 것만 같았다. 목 안쪽이 뜨겁게 뭉쳤다.

처음이었다. 연회가 끝나고 누군가 제 식사를 걱정하는 게. 늘 가기 싫었던 연회의 끝은 힘들기만 했는데.

갑자기 대공이 올리비아의 등을 계단 쪽으로 슬쩍 밀었다. 올리비아는 놀란 눈으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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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께서는 오늘 너무 열심히 춤을 추어서 쉬는 게 먼저야. 좀 이따가 음식만 올려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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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라니! 그러면 마사지나 목욕물도 같이 올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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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이따가. 그러면 아가씨는 내 에스코트와 함께 위로 올라가실까요?”

장난스레 모든 것을 물린 대공이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끌어 주듯 당기는 터에 다리가 풀리지 않고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방문 앞까지 아무 말 없이 올리비아를 이끌던 대공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본 대공은 상냥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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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고 싶어요? 아니면 같이 있어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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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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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아쉬워라.”

대공은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얼른 들어가라는 몸짓에 올리비아는 잠시 대공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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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할 말 있어요? 배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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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냥. 고마워서요.”

진심이었다. 연회에 혼자 가지 않게 해 준 것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해 준 것도, 저와 함께 나온 것도. 그리고 이렇게 갈 곳을 만들어 준 것도.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는 다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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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갑자기?”

대공이 농담처럼 올리비아의 얼굴을 가리켰다. 지금 제 얼굴이 어떨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늘 혼자 거울을 보면서 삭였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올리비아는 더 뻔뻔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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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울기 직전의 표정이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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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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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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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으로 가자고 한 거요.”

저택? 올리비아는 대공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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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한테 대공저가 익숙해진 거면, 내게는 고마울 일이죠. 나는 또 아가씨가 갈 곳 없다고 하면 정말.”

대공은 잠시 말을 멈췄다. 가벼운 미소가 사라졌을 때에서야 대공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가면 하나 없는 날것의 얼굴이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올리비아를 단단하게 잡아 주던 그 얼굴이 느리게 휘어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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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슬플 것 같거든요.”

나직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흩어졌다. 짙게 가라앉은 붉은 눈을 마주하던 올리비아의 눈이 아주 조금 울 것처럼 휘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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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쉬어요.”

 
올리비아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대공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혼자가 된 방을 바라보았다.

늘 연회 후에는 속이 헛헛했다. 굶주린 것처럼 등허리 안쪽이 늘 고팠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분명히 모든 걸 끝내고 왔는데. 매번 느끼던 슬픔도 아닌 허탈함이 더 컸다.

손끝이 저렸고 살갗이 따끔거렸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몸이 약한 에셀라는 살이 따끔거릴 때마다 곧 아플 것 같다고 불평했다.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는 살이 따끔거린다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에셀라의 약을 준비했다.

그게 올리비아의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이 작은 변화가 그 시작인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기꺼운 마음으로 손끝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작게 웃던 올리비아가 침대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침대로 바로 가지 않고 테이블 쪽으로 향했을 때, 올리비아는 테이블 위 올려진 일기장을 발견했다. 공작저에서 십 년 넘게 써 왔던 제 일기장. 해나가 바로 사 온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 충동이었다. 올리비아는 침대로 가는 대신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냘프게 떨리는 손이 일기장을 열었을 때. 그 새하얀 종이에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늘 올리비아를 옥죄던 말들은 없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썼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그 한 줄의 일기에 올리비아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들을 걱정 따위도, 품위가 떨어진다는 염려도 하지 않은 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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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로, 올리비아를 묶고 있던 모든 게 사라졌다.

지워진 마델레이네와 가족들. 레오포드.

이 모든 게 낯설고 생소해서. 또 기꺼워서.

올리비아는 울면서 또 웃었다. 글자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제멋대로 번졌다. 아주 오래전 썼던 첫 일기의 문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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