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1.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21/151)


#021.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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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대공 전하께서 마델레이네 공녀한테 청혼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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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황제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하신 걸 보면 이미 청혼은 물론 승낙까지 이루어진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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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공녀는 하루도 얌전한 날이 없군.”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늘 그렇듯 수군거림의 끝에는 올리비아 제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습관처럼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괜찮아졌으니까.

그래서 손 위로 온기가 닿았을 때 올리비아는 조금 놀랐다. 대공에게 팔짱을 낀 손 위에 대공이 손을 올렸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느리게 제 손을 톡톡 치던 대공은 저 멀리 귀족들을 한 번 쭉 훑듯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떠들던 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다시 연회장이 조용해졌을 때 대공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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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그 드레스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소곤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뜬금없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을 흐트러뜨리고 조금 웃었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서 올리비아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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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지금 내 약혼녀에게 청혼한 건가. 감히?”

레오포드였다.

레오포드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와 파트너처럼 선 비칸데르 대공은 팽팽하게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레오포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대공은 아버지의 개였다. 그 말인즉, 제가 즉위를 한다면 얼마든지 제 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개가 감히 제 약혼녀와의 혼인을 원하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과 힘을 겨루듯 마주하다니.

아직도 대공은 분수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공이 개처럼 전장을 돌며 획득하는 영토들과 전리품들 중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늘 레오포드의 몫으로 진상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레오포드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레오포드가 올리비아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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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리브.”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볼 뿐 제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레오포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난번 연회 때도 첫 춤을 대공에게 허락하더니. 이제는 제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치미는 화를 삼키며 레오포드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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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는 그게 또 뭐야. 우선 이리 와. 여분이 있을 거야.”

흰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가 제법 아름다워 보이긴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흑백의 조합이 한 쌍의 커플처럼 보이는 올리비아와 대공을 떨어트리는 게 우선이었다.

오지 않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보던 레오포드가 한 발 더 다가갈 때였다. 대공이 마치 레오포드를 저지하듯 올리비아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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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마델레이네 공녀에게 드레스를 보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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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기가 막힌다는 듯 사나운 레오포드의 얼굴에도 대공은 입매를 올려 여유롭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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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녀에게 어울리는 보석을 직접 골라 선물하는 게 제 큰 즐거움 중 하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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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결국 레오포드가 성을 내었다. 모두가 움찔했지만 대공은 흔들림 없이 올리비아의 옆을 지켰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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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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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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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봐요.”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그 단단한 모습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오늘을 위해 바쁘게 준비하던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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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속 얘기하잖아요. 난 언제든 아가씨를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예약을 해도 두 달이나 걸리던 드레스 부티크도,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도, 꼭 맞는 아름다운 구두도. 올리비아의 앞에 당연하다는 듯 준비되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어젯밤, 대공은 올리비아한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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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제가 준 소원으로 아가씨한테 청혼할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올리비아는 헛숨을 삼켰다. 황제를 저렇게 높임 없이 부르는 것도 놀라웠지만 올리비아는 그를 지적하는 대신 말에 집중했다. 대공이 무언가 수를 써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게 청혼까지 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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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혼은, 어, 나중에는,”

할 말들이 엉켜서 올리비아는 말을 더듬었다. 대공이 재밌다는 듯 눈을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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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놀라는 거 아니에요? 나 서운하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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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실제로 조금 놀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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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방법이죠. 아가씨가 황가에서도 멀어지고, 마델레이네 공작가와도 멀어질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

그러면서 대공은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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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 사심도 좀 섞인 건 아가씨도 알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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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올리비아가 말끝을 흐렸다. 대공이 좋은 것, 대공이 저를 좋게 봐 주는 것과 태자의 약혼녀인 자신이 대공과 결혼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리 마음 정리를 한다고 해도 아직은 무서웠다. 그토록 바라보던 가족한테도 레오포드한테도 닿지 못한 마음이다.

이런 제가 누군가를 온전히 믿으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공은 올리비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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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걱정하지 마요. 이 청혼을 빌미로 내가 아가씨한테 뭔가를 강요할 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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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정말로 대공은 왜 이렇게 제게 친절한 걸까. 뭐든 다 해 주는 것일까. 대공은 대답 대신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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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신이라고 하면 웃기지만 바라는 건 있어요.”

그러면 그렇지. 올리비아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대공이 입을 떼는 순간 올리비아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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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연회에서는 나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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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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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듣든, 누가 다가오든.”

대공이 다정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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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가 원치 않는 건 누구든 무엇이든 내가 막아 줄게요. 그러니까.”

그 다정함이 올리비아의 상처를 어루만졌을 때, 대공이 못을 박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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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봐요. 알겠죠?”

 

* * *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연회장의 서늘한 분위기가 현실을 상기시켰다.

이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대공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계속해서 올리비아를 살피고 불편한 대화는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다.

그러니 올리비아도 약속을 지켜야 했다. 올리비아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대공이 올리비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맞잡은 손이 단단했다.

대공은 이제 레오포드를 보는 대신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황제를 향해 다시 말하려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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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리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아버지, 아니 마델레이네 공작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약속을 어기고 공작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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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잠시 제 딸과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이건 예상에도 없는 일이었다. 올리비아의 손이 조금 떨렸다.

한 번도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딸이라 불러 준 적 없는 아버지였다.

저건 무슨 의미일까.

올리비아는 차마 공작을 마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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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게 좋겠군. 공작은 공녀와 이야기를 해 보고, 자. 모두 연회를 다시 즐기지.”

굳은 얼굴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황제는 공작의 중재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공작이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오자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작은 얼굴에 가득 담긴 절박함에 대공은 부드럽게 올리비아의 손등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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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봐요. 아가씨. 어떻게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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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르겠어요.”

올리비아가 웅얼거렸다. 정말 모르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올리비아는 대공의 눈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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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죠?”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랬다. 도망치듯 집에서 나온 뒤 돌아가기 싫다고 했으면서. 잠깐 사이 전부 타 버려 재가 된 기대를 끌어모으다니. 고작 딸이라는 저 한마디에.

하지만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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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나는 그저.”

대공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벅이며 다가오는 공작을 향해 또렷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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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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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웅,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제 딸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전하의 허락을 구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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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허락보다는 본인의 허락이 중요하죠.”

대공은 자연스레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듯 의사를 물어보는 태도에 올리비아는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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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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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구나.”

공작이 마른세수를 했다. 말끝에 묻어난 한숨에 올리비아는 한쪽 마음이 조금씩 부풀었다. 저 힘든 얼굴의 한편에 저에 대한 걱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올리비아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맞잡은 손이 풀어지는 순간 대공은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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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델레이네 공작. 운을 함부로 쓰진 말아요. 내 말 이해하겠죠?”

하지만 공작은 다른 대꾸 없이 묵례한 뒤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버지의 응접실에 갔던 날 이후 이렇게 정식적인 독대는 처음이었다.

손끝이 떨려서 올리비아는 드레스를 꽉 잡았다. 잔뜩 긴장한 올리비아가 그 뒤를 따랐을 때, 대공은 다시 특유의 서늘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들을 바라보던 레오포드 역시 화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황제의 손짓에 현악기의 연주가 다시 흘렀지만 귀족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의 연회는 이미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말이다.

.
.
.

공작은 후원으로 나갔다. 사람이 없는 적막 속으로 들어가면서 올리비아는 공작의 등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

다잡으려고 했지만 올리비아의 마음이 요동쳤다. 며칠 사이에 아버지의 얼굴이 해쓱해진 것처럼 보였다. 저를 찾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저 때문에 얼굴빛이 좋지 않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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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며칠 전의 기억인데도, 잇새로 토해 내듯 말하던 공작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손에 다부지게 힘을 주었다.

등을 봐서는 아버지, 아니 공작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저를 보호하듯 데려왔다.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금 아버지는,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올리비아가 복잡한 생각을 오가는 사이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가 올리비아를 돌아보았을 때 올리비아는 제 모든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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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거야.”

날카로운 말이 여과 없이 올리비아한테 쏟아졌다. 마델레이네 공작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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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속살거렸기에 비칸데르 대공이 황태자의 약혼녀인 네게 청혼을 해.”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는 자수정빛 눈동자에 경멸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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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 잡음 없이 태자비가 되라는 딱 그 하나도 못 지킬 정도로 엉망인 거냐.”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여느 때처럼 묵묵히 날카로운 비난을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때였다.

공작이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지만 올리비아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제 미련을 완벽히 끝내 주시다니.

공작은 평생 모를 것이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연회장에서 공작을 따라나섰는지.

지금 이 순간, 처참하게 부서진 제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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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대답하지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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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리면, 이제는 믿어 주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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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매서운 시선이 올리비아를 꿰뚫을 듯 쏘아보았다.

늘 저 시선을 견뎠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 눈이 다정히 저를 바라봐 주겠지, 저도 아버지의 딸이라는 걸 인정해 주겠지, 믿어 의심한 적 없었다.

제 머리 색과 같은 공작의 은발을 보며,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특징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제 노력은 여기까지였다. 제 최선의 말로에서, 올리비아는 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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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말씀드릴게요. 저는 대공 전하께 혼인을 청해 달라 속살거린 적 없다고, 몇 년을 매달려도 약혼녀인 저를 무시하고 에텔 영애와 정답게 지내 잡음을 만든 분은 태자 전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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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 다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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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에셀라 대신 태자 전하의 약혼녀로 보내기 위해 저택에 데려오신 분은 여기 계신 공작님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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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사나운 노성이 밤을 뒤흔들었다. 새들이 놀라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델레이네 공작이 결국 이성을 잃은 듯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핏줄이 터진 듯 보라색 눈동자가 붉게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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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이다. 너. 네가, 네가 내 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네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어. 다 너 때문이다. 다.”

한 음절 한 음절에 응어리진 분노가 묻어났다. 공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 미움이 절절해서, 정말 제 탓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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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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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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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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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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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공작님을 불행하게 한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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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감히!”

쩌렁한 공작의 화에도 올리비아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크게 느껴졌던 공작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낼 때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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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지우고 싶다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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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던 말이, 고작 며칠 만에 저릿한 수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저 말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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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이제 제게 붙은 마델레이네.”

마델레이네.

그토록 바랐던 성이었다.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던 가문, 제 평생의 최선을 다 바쳐 짝사랑했던 가족.

그리고 끝내 돌아봐 주지 않았던, 제 외사랑들.

올리비아는 그 모든 짝사랑들을 향해 홀가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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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델레이네를, 전부. 지우겠습니다.”

스르르, 저만 당기고 있던 관계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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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공작의 고함과 함께 번뜩이는 살기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호흡조차 조이는 흉흉한 기세에도 올리비아는 몸을 꼿꼿이 했다. 그게 올리비아가 바라는,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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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그 순간, 저벅이는 발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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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중한 아가씨께 더 이상의 위협을 가한다면 비칸데르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공작.”

단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따스하게 감쌌다. 공작이 이를 으득 갈며 낮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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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칸데르 대공…… 전하.”

올리비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저갱의 까마귀 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루비처럼 붉은색 눈동자. 살인귀며 혈귀, 흉흉한 별명들로 가득 찼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잘생긴 남자.

절대로 깨질 것 같지 않은 무표정이 올리비아를 마주하는 순간 달큼하게 웃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제가 그토록 최선을 다했던 가족도, 약혼자도, 그 누구도.

올리비아를 저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저렇게 달콤하게.

그토록 올리비아가 바랐던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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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 다 끝났으면, 이제 내게 집까지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죠, 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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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저택 말고 다시 연회장으로.”

올리비아는 치미는 감정을 꾹꾹 삼키며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공작에게 처음으로 먼저 등을 돌렸다. 공작의 시선이 등에 꽂혔지만 올리비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늘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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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늘 꾸미느라 엄청 시간 오래 걸렸거든요. 적어도 춤은 한번 춰 봐야 하지 않겠어요?”

느릿한 말끝이 흔들렸다. 올리비아는 씩 웃으면서 대공의 손을 맞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느껴질 텐데 대공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올리비아와 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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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첫 춤의 영광은 내게 주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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