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가장 귀한 당신이 원하는 대로 2022.05.08.
“아가씨. 혹시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조심스러운 해나의 말에 올리비아는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말만 하면 모든 게 펼쳐지는데 불편할 리가.”
진심이었다. 대공저에서 사흘을 보내면서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맛있는 식사와 수시로 나오는 간식,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과 포근한 잠자리. 심지어 대공은 그 바쁜 와중에도 아침과 저녁은 꼭꼭 올리비아와 함께했다.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방문까지 에스코트를 올 때마다 낯간지러우면서도 그 손을 잡았다.
“하지만 계속 한숨을 쉬시잖아요.”
“응?”
“책 한 장 보실 때마다 한숨 쉬시고, 아까도 차 계속 드시면서 한숨 쉬시고.”
“내가?”
올리비아가 되물었다. 해나가 몰랐냐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불편하신 게 있는 거 맞죠? 침구나 슬리퍼 쪽이 불편하신 거예요? 아니면 드레스의 느낌이 꺼끌하다든가. 간식이 너무 자주 나온다거나.”
해나가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러다가는 모든 게 다 불편했냐고 말할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때문이 아니라.”
“그러면요?”
불안한 해나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빠르게 생각했다. 마침 가장 좋은 변명이 있었다.
“일기장 하나 부탁할게. 원래 일기를 쓰던 습관이 있는데, 그걸 안 지켜서 그런가 봐.”
반은 사실이었다. 늘 일기를 썼던 터라 일기를 쓰지 않는 게 어색했다.
“진작 말씀하시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최고급 일기장으로 사 올게요.”
해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올리비아는 웃으면서 일기장을 사던 서점이 어디인지 알려 주었다. 해나는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계속 한숨을 쉬는 순간 해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일기장 말고 다른 일도 있으신 거죠?”
해나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올리비아는 결국 책을 내려놓고 습관처럼 몸을 곧게 폈다.
“별건 아니고. 모레가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래.”
“네. 전하께서 전쟁 영웅으로 참석하셔서 알고는 있었어요. 그게 왜요?”
“그냥. 내가 연회 같은 것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둘러대듯 한 말이었지만 반은 사실이었다. 늘 혼자 있고 뒷말 따위가 무성한 연회를 좋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회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떠나서 아예 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연회장에는 제가 도망쳐 온 모두가 있었다. 아버지와 콘라드, 제이드, 그리고 레오포드까지. 이름만 떠올렸을 뿐인데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순식간에 그들이 제게 했던 말들이 귓전에 맴돌 것 같았다.
“그렇게 안 좋아하신다면, 안 가시면 좋을 텐데.”
해나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말하면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지 올리비아의 눈치까지 봤다. 올리비아가 피식 웃으면서 해나를 불렀다. 쪼르르 달려온 해나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 주자 해나가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안 가면 좋을 텐데.”
늘 연회를 갈 때마다 생각했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마델레이네 공녀이자 황태자의 약혼녀. 황가를 제외한다면 가장 지체 높은 여인이며, 곧 황가의 일원이 될 제가 연회에 빠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말없이 공작가를 나왔다 할지라도, 레오포드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올리비아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또 한숨을 쉬신다며 해나가 울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대공은 가볍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
“나랑 약속한 건 잘 지키고 있어요?”
함께 차를 들던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정교사한테도 숙제 검사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 제 일상을 묻는 게 이상했다. 감시야 많이 받아봤는데. 올리비아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키고 있어요. 지금도 잘 먹잖아요.”
올리비아가 장난스레 잔을 흔들어보았다. 대공은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 접시에 힐끗 시선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식사는 잘하고 있는 것 같고, 잠은 내가 확인할 수 없지만 잘 자고 있으리라 믿는데.”
대공이 말끝을 늘였다. 뭐가 문제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세 번째 약속이 떠올랐다. 아차. 뻔뻔하게 잊은 척을 하려 했지만 마주친 붉은 눈은 빠르게 눈치챈 듯 느리게 웃었다.
“세 번째는요?”
“네?”
“아가씨께서는 나를 한 번도 부리지 않으셨는데. 이거는 세 번째를 완전 어기신 거 아니에요?”
늘어진 말끝이 서운하다는 티를 여실히 드러냈다.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아버지는 물론 콘라드나 제이드한테도 한 적 없는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올리비아는 새삼스레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대공을 편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고작 사흘 새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올리비아가 느리게 운을 떼었다.
“감사하게도 대공저의 모두가 잘해줘서 따로 말씀드릴 게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정말 없어요?”
순간 해나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올리비아는 시립해 있는 해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해나가 배시시 웃었다. 해나는 말하지 않은 듯해서 올리비아는 시침을 뚝 떼었다.
“이상하다. 있을 텐데.”
말꼬리를 늘리던 대공이 고개를 까딱했을 때, 벽에 서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까지 전부 나갔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미련 어린 눈으로 사용인들을 바라보았지만 친절하고 감수성 넘치는 요리사 요한도, 제 방에 꽃을 가져다주던 배달원 젠슨도 해나도 빠르게 식당을 나섰다. 확실하게 문까지 닫은 상황에서 올리비아는 입꼬리만 올렸다. 차를 마셨는데도 입이 조금 말랐다.
“…….”
“…….”
올리비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공도 말이 없었다. 식당 위로 적막이 넘실거렸다. 이 조용함이 조금씩 불편해졌을 때 올리비아는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없어요. 정말 전하께 도움을 청할 만할 일은 없어요.”
올리비아는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황가와 황제파의 수장인 공작의 일이었고, 가족의 일이었다.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도 대공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올리비아가 연하게 웃었다.
“더 청하면 제가 너무 욕심부리는 거잖아요. 이미 이렇게 올 곳을 만들어 주셨는데.”
계속 이렇게 친절만 받고 산다면 좋을 텐데. 슬프지만 올리비아는 이 꿈 같은 친절의 끝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목 안쪽 어딘가 할퀴어진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내일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 볼게요.”
“진심으로요?”
“네. 보통 하루 전이면 드레스와 보석이 오거든요.”
올리비아가 씁쓸함을 삼켰다. 현실은 그런 법이었다. 기대감을 심어주면서 내동댕이치는 곳. 이렇게 잘해준 대공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계속 제가 이곳에 미적댄다면, 황가도, 공작가를 필두로 한 황제파도 대공에게 공격을 퍼부을지 몰랐다. 올리비아가 부러 장난스레 웃었다.
“이제 제가 보답할 차례네요. 제가 말씀드렸죠? 마델레이네, 는, 은혜에 강하다고.”
마델레이네. 그토록 자부심을 갖던 제 성이 어쩐지 껄끄러웠다. 올리비아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가늘어진 대공의 눈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 보였다.
“……왜 계속 그렇게 보세요?”
“내가 뭘요?”
“왜 화난 것처럼 보시는지 몰라서요.”
“화보다는 이해가 안 가서요. 나를 부리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굳이 참는 건 무슨 마음일까.”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흐름을 잡은 대공이 짧게 숨을 뱉었다. 루비처럼 붉은 눈이 요요히 빛났다.
“……아가씨께도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언제나 탐을 내는 자입니다.”
그 말을 하는 대공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신이 아름다움을 모아 빚은 것 같은 남자가 올리비아를 보며 웃었다.
“늘 가장 귀한 것에 목말라 있던 찰나에 아가씨를 만났고요.”
느른한 시선이 천천히 올리비아를 향했다. 은빛처럼 시린 은발을, 가냘픈 어깨를, 꽉 쥔 채 하얗게 질린 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희의 흔적이라 천대받는 녹색 눈동자를. 이상했다. 저 남자는 왜 저렇게 저를 귀하다 여길까. 시선이 얽히는 순간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늘 상냥하게 웃던 눈이 어쩐지 간절하게 제게 매달리는 것만 같아서. 그 순간, 대공이 올리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쥐어짜듯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이야기해 줘요.”
“…….”
“가장 귀한 당신이 원하는 바를.”
올리비아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사실은.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번 자각하자 둑이 터지는 것처럼 참아 왔던 것들이 흘러나왔다. 늘 괜찮다고 다독였던 모든 일들이,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마델레이네 공녀이자 태자의 약혼녀라는 역할에 얽매이는 일들도 힘들었고. 황녀의 일을 대신하는 게 당연한 것도 싫었다. 황후의 독한 말들과 사교계를 떠도는 자신을 향한 험담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를 돌아봐 주지 않는 가족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 레오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늘 진심이던 제 짝사랑을 이제 더 이상 이어 가기 힘들어서. 올리비아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저 붉은 눈을 보자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대공은 왜 저렇게 아무 말 없이 제 결정만을 기다릴까. 늘 결정된 사항만 통보받았던 제게. 저 간절함이 계속해서 올리비아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리비아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
“아가씨.”
대공이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어딘가 도발적인 눈빛이 올리비아의 입술을 스쳤다.
“내가 계속 얘기하잖아요. 난 언제든 아가씨를 위해 준비가 되어 있다고.”
* * *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 성대하게 꾸며진 연회장에 웅장한 곡조가 흘렀다. 쿵쿵 울리는 북소리에 커다란 금관 악기들이 연신 진동했다. 머리를 울리는 춤곡에 미간을 찌푸리던 마델레이네 공작의 입매가 굳어졌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공작. 무탈한가?”
레오포드가 오만하게 말했다. 금색과 남색의 화려한 제복을 입은 레오포드가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아니지. 무탈할 리가 있나. 내 약혼녀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공작의 눈매가 냉하게 가라앉았다. 레오포드도 마찬가지였다. 성마른 짜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잘난 얼굴이 공작을 마주했다.
“……책임감 없는 아이는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건 나도 알아. 중요한 건 지금 올리비아가 어디에 있냐는 거지.”
“확인하겠습니다.”
“부디 빠르게 내 약혼녀가 이 자리로 오길 바라지.”
공작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대쪽 같은 성미가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을 마주하며 레오포드는 의미 모를 불쾌감을 삼켰다. 저만치 있던 마리아 에텔이 살랑이며 다가왔다. 반짝이는 금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 에텔은 걱정스레 레오포드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전하?”
“……무슨 일은.”
레오포드가 짧게 대답했다. 분명 성미가 날카로운 이유가 있을 텐데. 하지만 똑똑한 마리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제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공녀에게는 남색을 보내셨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전하의 머리처럼 찬란한 금색을 입었답니다. 어떠세요?”
사랑스러운 아양에 레오포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입을 맞췄다. 진한 애정 표현에 마리아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승전 연회의 마지막 날, 유난히도 귀족들이 더 많이 모인 날이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저였다. 그 반쪽짜리 공녀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주변을 바라보던 마리아의 눈에 차근차근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공자들이 보였다. 여동생이 없어졌다는 소문에도 초연한 콘라드와 분노도 추스를 줄 모르는 제이드. 반쪽짜리 주제에 고작 공작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 연인을 어린 시절부터 묶어둔 여자. 덕분에 저는 지금 약혼녀가 있는 태자의 연인이라는 오명을 썼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때였다. 마리아가 교묘히 웃으며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심은 세작들이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 반쪽짜리 공녀가 이미 공작가에서 쫓겨났다고요?”
“어머, 말도 안 돼. 어쨌든 아직 공녀는 태자 전하의 약혼녀 신분이잖아요.”
“약혼이 뭐 대수인가요? 약혼하고 파혼하는 영애들도 많은 마당에.”
“하지만 공작은 황제파의 수장인데. 그렇다면 둘째 공녀님이라도?”
“입조심해요. 공작이 둘째 공녀를 끔찍하게 아끼잖아요.”
수군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제이드는 이를 아득 물며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소란 따위 일으키지 마.”
뒤에서 강하게 어깨를 누르는 콘라드만 아니었어도 뛰어나가고 남았을 것이다. 제이드는 잔뜩 독이 오른 눈으로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에 움찔한 귀족들이 큼큼, 헛기침을 했지만 모두의 입을 닫게 하지는 못했다. 제이드는 갑갑한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닷새 전 나간 올리비아의 행방이 묘연했다. 제도의 호텔은 다 뒤져보았는데도 행적조차 밟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제이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근덕거리는 화가 계속 치밀 무렵 문을 지키던 시종이 소리를 쳤다.
“전쟁 영웅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전하 드십니다.”
힐끗 바라본 곳에 대공이 들어오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금박 장식이 달린 검은 정장을 입자 새하얀 얼굴이 더 시리게 빛났다. 짜증스레 대공을 보던 제이드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대공 옆에 있는 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환호와 수군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대공의 옆에 선 초록 눈의 영애는…….
“……올리비아.”
제이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시종이 당황한 듯 다시 외쳤다.
“……파, 파트너인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님 함께 입장하십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늘 어둡고 칙칙한 드레스에 장식도 최소화하던 볼품없는 아가씨. 그런 그녀가 순백의 드레스라니. 촘촘히 보석이 박힌 흰 드레스와 반짝이는 핑크색 목걸이, 섬세히 세공된 액세서리들.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와 보석들이었지만 그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자체만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저렇게 아름다웠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초연한 표정은 마치 요정처럼 신비로웠다. 늘 비난을 사던 초록색 눈은 어딘가 달큼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릴 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는 서늘한 표정을 허물고 올리비아를 에스코트했다.
“지고하신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대공. 오늘은 파트너와 함께 오다니.”
대공의 인사를 받은 황제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공녀를 바라보았다. 늘 어두운 얼굴을 하던 공녀가 처음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다. 마치 지난번 맹세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그러는 사이 대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모두 폐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폐하. 연회의 첫날 제게 주신 소원을 기억하십니까.”
순간 연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가 이 분위기에 이어질 말을 알았다. 대공의 눈이 다정하게 공녀를 마주했을 때, 레오포드가 한 걸음 나섰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든 막아야 하는데,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장 귀한 여인,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와의 혼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황제 앞에서 감히 태자의 약혼녀에게 청혼한 대공은 누구보다 다정하게 웃었다. 청혼을 받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태자의 약혼녀는 그 누구보다 침착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내 연회장에 수군거림이 퍼졌다. 황제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파장이었다.